경기도 안산시의 한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경기도 안산시의 한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지난 3월 23일 밤, 강원도 양양군의 한 주택건물에서 불이 났다. 건물에 살고 있던 카자흐스탄 출신 이주노동자 알리씨는 귀가하던 도중 화재를 목격하고 건물로 뛰어들어가 일일이 주민들을 깨워 대피시켰다. 2층에 사는 여성을 구조하다가는 화상을 입기도 했다. 화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불법체류 중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곧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이 사연은 곧 널리 알려지며 “알리를 돕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LG복지재단에서는 알리에게 ‘LG 의인상’을 수여했고, 법무부는 곧바로 임시비자를 발급해주었다.

화재 사건의 영웅과 방화범 외국인

지난 4월 21일에는 또 다른 화재 사건이 있었다. 이번에는 이주노동자가 일으킨 화재였다. 튀니지 출신 이주노동자 A씨는 경기도 군포시 한국복합물류 군포터미널 내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꽁초에서 옮겨 붙은 불은 26시간 넘게 지속되면서 연면적 3만8000㎡(약 1만1500평)를 불태웠다. 추정 재산 피해액만 220억원에 달한다. 이 사건을 두고 2018년에 있었던 대한송유관공사 고양저유소 화재 사건을 떠올리는 시민들도 있었다.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가 날린 풍등이 저유소 잔디밭에 떨어지며 불씨가 옮겨 붙어 17시간 동안 화염에 휩싸인 사건이다.

이들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극명히 엇갈린다. 카자흐스탄 출신 알리씨에게는 호의적인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는 1만명 넘는 시민들이 알리에게 영주권을 줘야 한다는 취지의 글에 동의의 뜻을 표했다. 튀니지 출신 노동자에게는 가혹한 반응이 이어졌다. 뉴스 기사에는 ‘외노자(외국인노동자) 수준하고는’ ‘전부 추방해’ 같은 댓글이 달렸고 반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커뮤니티에서는 ‘외노자의 위험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 노동자가 일으킨 사건이 언급됐다.

엇갈린 반응들은 얼핏 당연해 보인다.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외국인을 환영하는 분위기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아직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민자에게 포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짚고 나면 꼭 당연하게 여길 것만은 아니다.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에서 매년 실시하는 ‘사회통합실태조사’의 2019년 결과 보고서를 보자.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민자를 이웃이나 직장동료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11.3%나 된다. 2018년의 조사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직장동료로 지내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껴 36.1%만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는데, 2018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수치다. 이 결과를 알리씨를 향한 영주권 청구 청원과 대비해 보자. 외국인에 대한 포용력은 줄었는데, 알리씨에 대해서는 기꺼이 곁자리를 내어주려는 시민들이 많다. 다시 말해 시민들이 내 이웃으로, 직장동료로,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외국인은 알리씨 같은 외국인, 즉 ‘착한 외국인’일 뿐이다.

착한 외국인이 되라는 훈육

이 생각은 다소 위험한 것이다. 전의령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는 2015년 논문 ‘선량한 이주민, 불량한 이주민’에서 한국의 다문화정책 자체가 반다문화주의적인 사고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반다문화주의가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외국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해로운 ‘나쁜 외국인’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나쁜 외국인으로부터 선량한 한국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국가는 제도적으로 누가 선량하고 누가 나쁜지를 구분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추방하는 등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번 두 사건처럼 착하고 나쁜 외국인을 구분하는 것은 시민들이 이런 기준을 내재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모범적이고 영웅적인 이주노동자의 사례를 앞세우는 것은 이같이 자기 희생을 보여줄 때만 예외적으로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이주노동자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권리들은 잊힙니다.”

이런 인식 아래에서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외국인은 ‘외국인다움’을 보여줘야 한다. 최근 들어 TV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외국 출신 방송인들을 떠올려 보자. 한국말에 유창한 이들은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뽐낸다. ‘한국적’인 사고를 하고 한국에 얼마나 잘 적응했는지를 목격한 시청자들은 호감을 표현한다. 이 중 한국에 비판적인 외국인이 있을까. 비판적인 외국인은 ‘외국인답지 않다’. 더 나아가 외국인다운 외국인이라면 시민 의식도 잘 갖춰야 한다. 제도와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사회의 윤리 규범도 잘 지켜야 한다.

서울의 한 외국인지원단체에서 오래 활동해온 활동가는 “사소한 범법 행위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고 말했다.

“길을 가다가 침을 뱉어 주변의 시선을 모으면 모든 이주노동자가 싸잡혀서 손가락질 받게 된다고 매번 강조합니다. 한국인보다 더 엄격하게 법을 지켜야 한다고 일부러 윽박지르듯 강조할 때도 많아요.”

종합해 보면 ‘외국인다운’ 외국인은 단지 출신지와 외양이 다를 뿐 한국인보다 더 한국에 동화된, 바람직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강진구 중앙대 다빈치교양대학 교수는 ‘순종하는 외국인’만을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이주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이주노동자다움’을 보여줘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알립니다. 그걸 저는 ‘훈육’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정부에서, 언론에서, 시민들이 옳은 일을 한 이주노동자에게 영주권을 주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수많은 외국인을 향해 ‘훈육’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외국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노인, 여성과 다른 모든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제 몫을 다하고 사회의 윤리를 지키는 소수자와 약자는 동정과 수혜의 대상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탄의 대상이 된다. 사실 다수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느끼기 힘든 일이다.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에 서 있어본 사람이라면 사회의 윤리 규범과 요구되는 기준이 유독 이들에게 더 빡빡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착한 외국인’과 ‘나쁜 외국인’을 갈라 착한 외국인만을 포용하려는 인식은 그래서 위험하다. 정해진 기준을 넘는 외국인만 포용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배제하여 심지어는 추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외국인에 대한 포용의 문제만으로 여길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한국인이라도 한 번은 속할 수 있는 약자와 소수자 집단에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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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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