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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676호] 202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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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권력과 돈의 사다리 된 시민단체 대해부

곽승한  기자 seunghan@chosun.com / 조윤정  기자 wastrada0721@chosun.com  2021-09-27 오전 10:53:53

▲ 한국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서울 통인동 사옥. 참여연대는 지난 9월 10일 창립 27주년을 맞았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추석을 앞뒀던 지난 9월 10일, 참여연대는 창립 27주년을 맞았다. 1994년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 출범한 지 27년이 지났다. 그동안 참여연대는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단체로 성장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장하성 주중대사 등 현 정권 주요 인사들이 이 단체 출신이다.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김경률 회계사, 권경애 변호사 등 언론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던 인사들도 모두 참여연대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인사들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차관급 이상 인사 중 20%(11명)가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출신이라는 통계도 있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민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연합, 환경운동연합 등의 시민단체들이 기성 정치권에서 담지 못한 의제들을 다루며 시민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부패방지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총선 낙선운동’ ‘이동통신요금 인하 100만인 물결운동’ ‘삼성 변칙증여 과세 촉구 국세청 앞 1인 시위’ 등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제도화된 의제들 대부분은 참여연대가 내세웠던 것들이었다. 낙선운동이나 1인 시위, 100만 서명운동 등 지금은 보편화된 주권자들의 의사표현 수단도 참여연대와 시민단체들이 들고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여연대와 같은 ‘진보’를 지향했던 시민단체들은 특히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맞물려 한국 사회 주요 의제 설정 기관이자 인재은행 등으로 성장했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정부의 이름을 아예 ‘참여정부’로 일컬었다.
   
   참여연대 창립 27주년을 즈음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민사회 전반을 향해 일갈을 퍼부었다. “지난 10여년간 민간보조금 또는 민간위탁금이라는 명목으로 직접 또는 자치구를 통해 시민사회와 시민단체에 지원한 금액이 무려 1조원 가까이 된다”는 지적이었다. 오 시장은 “그 액수가 모두 낭비됐다는 건 아니지만 집행내역을 일부 점검해 보니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다”면서 “시민단체와 이들을 비호하는 시민단체 출신 시 간부들의 압력에 못 이겨 부적절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면서 자괴감을 느꼈다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또 “검증되지 않은 기관에 위탁된 공공시설들과 거기에서 이뤄지는 업무들이 시민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해 외면받고 방만하게 운영되는 현장도 보았다”며 구체적 사례를 들었다. 오 시장은 “이것이야말로 시민단체의 피라미드, 시민단체형 다단계라고 할 만한 것 아닌가”라며 “서울시의 곳간은 결국 이렇게 시민단체 전용 ATM기로 전락했다”는 표현까지 썼다.
   
   오 시장은 지난 9월 16일에도 ‘서울시 바로 세우기 가로막는 대못’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발표하며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 마을, 협치,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등 민간위탁 9개 분야, 민간보조 12개 분야를 살펴보니 올해만 민간위탁은 45개 단체에 832억원이 집행됐고, 민간보조의 경우 842개 단체에 328억원이 지원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약 9개월간 민간보조금, 위탁금으로 집행된 금액만 1160억원에 이르고 지원받은 단체도 887곳이나 된다”고 했다.
   
   이런 거대한 돈이 시민운동에 사용되고 시민단체 인사들이 대거 정권 요직을 맡으면서 권력화됐지만 시민단체들은 오히려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시민단체를 향한 시민들의 시선이 예전처럼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다. 일단 현 정권과 얽혀있던 인사들이 각종 물의를 일으키며 여론이 떠났다. 자녀입시 문제로 재판 중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나 전셋값 문제로 사임한 김상조 전 정책실장, 21대 국회 개원 직후부터 불거진 윤미향 의원의 정의기억연대 기부금 유용 의혹 등은 국민들로 하여금 시민운동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여기에 시민운동의 대부로 통하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비위 사건은 시민사회 진영에 결정타가 됐다. 물론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들은 현 정부 지지율 하락에 원인이 된 LH 투기 의혹을 제기하는 등 여전히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시민운동 원로들이나 ‘정치’와 손잡지 않고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는 “시민운동이 예전만 못하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원인이 무엇일까. 주간조선이 ‘기로에 선 시민운동’이란 주제로 최근 몇 달간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과 원로들을 만나본 결과 결론은 명확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너무 섣불리 정치권력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 지난 9월 16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코로나19 자영업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시민단체는 권력 진출용 예비기관?
   
   이런 진단은 진보진영 대표 원로이자 시민사회와 연이 깊었던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필상 서울대 초빙교수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다. 지난 8월 30일 주간조선과 만난 한 교수는 “참여연대가 한국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실은 분명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다만 권력에 진출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시민단체 출신이 권력에 진입해 그냥 권력의 부품처럼 돌아가면 결과적으로는 그 단체를 먹칠하는 원인이 된다”고 했다. 경실련 정책위원장 출신인 이필상 서울대 초빙교수 역시 주간조선에 “정치나 관(官)으로 가서 시민운동에서 하던 일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간 이들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막상 운동과 실천은 다른 것이어서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시민운동할 때 소신과 철학을 버리고 정치적 진영 논리에 따라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그래서 시민단체가 권력 진출을 위한 예비 기관 아니냐는 비판을 받으며 신뢰가 떨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나온다. 한 여성단체 활동가는 “빅6로 꼽히는 여성단체 대표들이 정당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사다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다 보니 박원순 전 시장 피소 유출 사건에도 침묵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여성 시민단체 관계자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만 할 순 없다”면서도 “정당에 들어가면 시민단체에서 하던 활동을 정치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냥 ‘민주당 사람’이 되어버린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 민주당의 386이 과거 기득권 세력의 모습을 닮아가기에 비판받는 것 아닌가. 지금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활동가 중심이 아니라 명망가 중심의 단체가 됐다”고 덧붙였다.
   
   정치와 손을 잡는다는 건 권력과 돈이 생긴다는 의미다. 오 시장이 서울시가 시민단체의 ATM기가 됐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박원순 전 시장이 서울시 권력을 잡으면서 막대한 재정이 시민사회에 들어갔다. 의도와는 별개로 이런 예산 집행이 결과적으로 ‘독’이 됐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시민사회 내에서도 나온다. 한 장애인 관련 시민단체의 활동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시민단체라는 조직의 가장 큰 문제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하고 싶은 말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다. 예컨대 정권이 바뀌면 시민단체가 주로 다뤄야 하는 주제도 달라진다. 장애인 공모사업을 예로 들면 문재인 정부 들어 갑자기 행정안전부 공모전에 ‘녹색성장’과 ‘장애’가 주제로 나왔다. 이전에 해왔던 것도 아니고 들어갈 거라고 예상도 못 했던 주제다. 이런 게 5년마다 반복된다. 누적되면 몇십 번이 바뀌는 거다. 이런 공모전에서 지원금을 타가는 시민단체들이 관변단체로 바뀌기란 굉장히 쉽다. 시민운동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닌 단체들이 지원금을 타가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시민단체도 다음과 같은 고민을 토로했다.
   
   “현상만 놓고 보면 기득권이 된 시민단체들은 잡은 걸 놓치기 싫어한다. 대표적으로 서울시 여러 단체가 박원순 시장 체제하에서 이득을 봐왔다. ‘마을사업’ 등 지역기반 단체들에 예산을 책정했고 이런 단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형 시민단체가 됐다. 재정 자립이 안 되는 시민단체는 ‘해야 하는 일들’에 몰두하게 된다. 정부사업이나 공모사업을 얼마나 잘 따오느냐에 따라 시민단체도 빈익빈부익부가 심해진다. 어떤 단체는 1년 예산이 100억원 가까이 되는 반면, 정부 사업을 거부하는 시민단체는 ‘만년 비영리’로 남게 된다. 그런 비영리 단체는 한두 사람이 몸을 갈아 넣다 보니, 목소리도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저 연대에 낀다면 안정될 텐데’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위탁사업의 덫
   
시민단체에 정부의 위탁사업을 받아오는 건 일종의 ‘줄타기’와 같다는 토로도 나온다. “한 번 위탁받은 사업을 재위탁받기 위해 단체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을지라도 정치적 상황에 타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그렇게 (정체성을 잃어가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근데 악순환이라도 계속되면 차라리 상황이 나은 거다. 몇백만원씩 지원받는 위탁사업을 하다 다시 원래 활동으로 돌아오기가 매우 어렵다. 규모가 꽤 있는 단체들 중에서도 본래 활동보다 위탁사업에만 치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한상진 교수는 “진보정권이냐 보수정권이냐에 따라 색깔에 맞는 시민단체에 선별적인 지원을 해주는 현저한 경향이 있다”면서 “정부에 시민단체가 ‘파이프라인’을 대고 있는 건 시민단체나 정부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예산을 오롯이 본연의 목적대로만 사용했는지 여부도 불투명하다는 주장도 있다.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서울시당위원장)이 서울시로부터 받은 ‘마을공동체 사업 운영 실태 점검 결과’를 보면, 오 시장이 언급한 민간위탁기관의 운영 실태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당선된 직후인 2012년부터 공동체를 되살리겠다며 시작됐다. 이 중 마을생태계 조성사업에는 최근 4년간(2018~2021) 320억원, 연평균 80억원의 예산이 소요됐다. 2020년에는 83억원의 예산이 들었는데, 이 중 자치구의 중간지원조직 운영을 위한 행정비용으로만 44억원(53%)이 쓰였다. 주민공모사업에는 전체 예산의 19%에 불과한 16억원이 쓰였는데, 이 중 상당수(70%)가 공익성이 부족한 사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친목 당구모임, 요리동호회 재료 구입, 운동 일반 강좌, 철인5종 동호회 등에 수백여만원이 지원된 경우다.
   
   이 사업과 관련해 중간지원조직인 서울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서마종)는 2016년부터 올해까지 315억원의 예산을 받아 이 중 161억원(51%)을 인건비로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마종은 2012년 9월 만들어진 이후 사단법인 ‘마을’에 위탁 운영을 맡겨왔다. 이 ‘마을’의 대표가 박 전 시장의 측근을 중심으로 설립된 조직으로 알려져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7월 21일 서울시는 서마종의 새로운 운영 수탁기관 공모를 냈다. ‘마을’과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민사회로 흘러들어간 돈은 같은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끈끈하게 만드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했다.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박원순 시장이 10년 동안 구축해놓은 시민단체 생태계가 선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박원순 서울시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는 수백~수천 개의 시민단체 소속 활동가들과 그 가족들의 표를 합하면 수만 표가 될 것”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전임 시장의 성비위·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치러지는 선거임에도 “야당이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 이유였다.
   
   
   비판 기능을 잃은 감시단체
   
   그렇다고 재정 독립이 시민단체 활동의 순수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참여연대 얘기로 돌아가보자. 참여연대는 사실 정부의 지원금을 받지 않고 회원들의 회비를 통해 운영되는 순수한 자발적 운동조직이다. 하지만 참여연대의 경우 돈이 아닌 정치권 및 지방자치단체와 인적 네트워크로 깊이 얽혀 있다. 참여연대 출신 인사들은 참여연대 간사들을 ‘참여연대의 꽃’, 사무처장을 ‘꽃 중의 꽃’으로 일컫는다고 한다. 적어도 사무처장까지 했으면 단체에서 퇴임 이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리에 무게감이 있다. 박원순 전 시장, 김기식 전 금감원장,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등은 모두 참여연대 사무처장 출신이다. 대부분 진보 정권과 손을 잡았다. 박근용 전 사무처장도 퇴임 후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로 자리를 옮겼다. 제도권 정치인의 길이든, 생계유지형 직업인의 길이든 진영 내에서 ‘밀어주고 끌어주기’가 되기 때문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비판을 하지 않는 감시단체는 생명력을 잃기 십상이다. 참여연대에 오래 몸담았던 한 인사는 “우리 단체 초창기를 주도한 이들은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조직을 꾸려가기에는 역부족인 점들이 많았다”면서 “시민단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간부급’으로 크니 막상 외부에선 과거와 같은 ‘끗발’이 먹히지 않는다”고 전했다. 다만 이러한 정치권과의 공생은 소수의 거대 시민단체만의 ‘특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상 대부분의 시민단체는 정부의 공모사업을 바라보며 연명해야 하는 처지다. 이른바 시민사회의 ‘양극화 현상’이다. 이런 상황 탓에 정권의 입맛에 맞춰 시민단체의 색깔도 바꿔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 자체가 너무 정치적이란 반론도 있다. 참여연대 박정은 사무처장은 최근 뉴시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참여연대 출신 인사들은 진보정당·기후·인권 등 다방면으로 포진해 있는데 이 중 아주 일부(정부 인사)만을 찍어 참여연대가 친정부라고 한다”며 “시민사회운동의 정체성에 흠집을 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박 처장은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고 현 정부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참여연대가 정부를 비판하는 용도로 동원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 참여연대 등 100여개 진보성향 단체들의 정치연합조직인 ‘내가 꿈꾸는 나라’ 창립 후원의 밤 행사가 열린 2011년 11월 10일 서강대학교 곤자가컨벤션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왼쪽)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photo 뉴시스

   “시민단체 형태 재정의할 때”
   
   시민단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은 “결국 시민과 더 가까워지는 방법이 최우선”이라고 진단한다. 앞서 언급한 장애인 단체 활동가는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운동의 방향성부터 많이 달라졌다. 1970년대 미국 흑인민권운동 당시에는 ‘정체성 정치’가 통했다. 흑인이면 흑인, 여성이면 여성, 장애인이면 장애인, 통일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동의하는 생각을 주장하는 시민단체여도 ‘저 사람이 왜 날 대표하지?’라는 생각을 갖는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는 방법도 예전보다 많이 쉬워졌다. 단체를 샅샅이 뒤져보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활동이 하나라도 있으면 후원을 끊는다. 원하는 활동이 있으면 소셜미디어(SNS)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가 활동 몇 번 하고 해산한다. 이게 트렌드인데, 지금 활동하는 시민단체들이 방향에 맞게 가고 있나. 결국 기존에 있던 단체들은 남은 이권을 가지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시민단체 형태를 다시 정의할 때가 온 거다.”
   
   2015년 서울시는 사회성과연계채권(SIB·Social Impact Bond)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복지 사업을 추진한 바 있다. SIB는 민간 운영업체가 환경, 빈곤, 교육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벌여 성과를 달성하면 정부로부터 사업비와 성과급을 돌려받고, 실패하면 원금을 잃는 복지 사업이다. 2010년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SIB는 2012년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뉴욕시와 손잡고 교도소 출소자의 재수감 비율을 낮추는 사업을 실행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서울시는 2015년 1호 SIB로 공동생활가정 아동교육을 실시했다. 지능지수가 71~84 사이인 소외계층 자녀들을 교육·양육하는 사업이었다. 박원순 전 시장은 이후 SIB에 관심을 기울여 추진했지만, 지난해 그가 사망한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전문가들은 이 SIB제도가 기업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상진 교수는 “성과 위주의 방식으로 시민운동을 끌어들여 시민단체도 독립성을 확보하고, 정부도 실질적인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로 가야 한다”면서 “시민단체가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경우 시민들로부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투자를 받고, 성과를 낸 이후 성과급과 사업비를 나누는 투자 개념의 펀딩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한 교수는 “소통 방식이 고도로 기술화된 현재 상황에 적합한 방식”이라면서 “시민사회의 참여도뿐만 아니라 사회적 효율성과 생산성까지 높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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