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일본 나가노현 아사마 산장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적군파들.
1972년 2월 일본 나가노현 아사마 산장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적군파들.

1989년 여름, 평양을 몰래 방문한 한국의 여대생 임수경씨(현재 민주당 국회의원)가 판문점을 경유해서 돌아왔다. 국제적인 빅뉴스였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당초, 그녀가 출국할 때 비행기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임씨가 판문점으로의 귀환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나는 당시 이 사건에 대해서 일본 잡지에 긴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타이틀은 ‘서울의 김일성 신드롬’이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세대적 반항’이라는 관점을 가미했었는데, 잡지가 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수경씨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잡지 기사를 잘 읽었다. 고맙다”고 했다. 임씨의 아버지는 언론계 출신으로 당시 서울지하철공사의 홍보실장이었다. 임씨의 아버지는 “고맙다”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내 기사에는 그가 국내 언론에 발표한 사과의 편지도 소개돼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저 같은 대학생을 가진 부모님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충분한 대화가 없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다 컸으니까’라며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큰 선택을 허용해 버렸습니다. 저 같은 아버지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도록 부탁합니다”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씨의 아버지가 내 기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러한 정서적인 것보다는, 내가 임수경씨에 대해 ‘신좌익으로서의 가능성’을 제기했고, 결론 부분에 ‘북한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을 지적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임수경씨의 그 후를 보면, 결과적으로 이 ‘가능성’은 완전한 나의 환상이었다. 한국 또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필자의 무지와 인식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내게 있어서 큰 교훈으로 남아 있다.

나는 지금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일본의 좌익운동과 비교, 분석하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임수경 사건’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덧붙이자면 현재 민주당 의원인 임수경씨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도 모두 1980년대의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는가.

1989년 여름으로 되돌아가서, 임수경씨의 판문점 경유 귀환에 대해서 당시 판문점에서 북한 기자에게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임수경은 대단한 여자다. 특히 단식투쟁은 골치가 아팠다. 우리나라에는 단식투쟁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건국 이래 처음 있는 경험으로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고집이 세서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일을 낼지 몰랐다. 목숨을 걸고 무슨 일이 있어도 판문점으로 귀국한다고 끝까지 우겼다. 여자는 무섭다.”

임수경씨는 흰 티셔츠에 흰 바지, 스니커즈, 단발머리 등 산뜻한 패션으로도 북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것이 ‘억압된 암흑사회에서 온 남조선의 여성투사’인가 하는 것 때문이다. 패션을 포함해 파격적 이미지의 임수경의 인기에 대해서는 후에 많은 탈북자들도 증언하고 있다.

당시 나는 이러한 ‘임수경의 파격적 행동과 북한 당국의 당혹’을 알고, 북한 당국을 ‘구좌익’으로, 임수경을 ‘신좌익’으로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좌익’이란 한국에서는 생소한데, 일본 좌익운동사에서는 널리 알려진 말이다. 1950년대에 일본 공산당의 내부 대립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때까지 소련이 주도해 온 공산주의 운동은 본래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가짜이며, 참된 공산주의를 위해서 소련이나 그것을 따라한 일본 공산당 등 낡은 좌익, 즉 ‘구좌익’을 타도하는 새로운 좌익, 즉 ‘신좌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좌익은 구좌익을 ‘스탈린주의’라고 규정, ‘반(反)스탈린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신좌익이 스탈린주의에 대해 강하게 부정한 것이 권위주의적 관료주의,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편협한 국가주의, 민족주의였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구좌익을 대신해서 본래의 인간적인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신좌익이었다.

신좌익 사상과 조직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본 대학가에 퍼졌다. 권위주의의 상징인 억압적인 낡은 체질의 대학을 적으로 삼아 ‘대학 해체 투쟁’을 전개하는 것으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 후 국가권력에 맞서는 급진적 정치투쟁으로 기울어 ‘극좌과격파 집단’이라고 불렸다. 마지막에는 테러조직이 되어 대중적 지지를 잃고 해체에 몰렸다.

그러나 소련 공산권이나 일본 공산당이 그때까지 ‘진보세력’이라고 말하던 구좌익 세계를 억압적 기존 질서라고 부정한 신좌익은, 처음에는 신선해서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좌익의 ‘질서파괴 운동’은 정치뿐만 아니라 대학가를 비롯해서 널리 문화나 예술 세계에까지 영향을 주고, 일본 사회 변화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시 임수경 사건으로 되돌아간다. 당시 임수경씨를 비롯한 한국의 좌익운동권은 ‘주사파’라고 불리는 김일성 숭배의 ‘종북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나는 잡지 기사로, 한국 사회에서의 김일성 숭배 등 북한에 친근감을 느끼는 ‘김일성 신드롬’의 실태를 소개하면서, 이 현상은 임수경 부녀에게서 밝혀진 바와 같이 구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세대적 반항’이라고 썼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한국 젊은이들의 김일성 신드롬이 세대적 반항을 벗어나서 참된 정치현상이 될 때, 언젠가는 신좌익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데 신좌익이라고 하기에는 ‘반외세’라는 민족주의가 마음에 걸린다. 임수경씨 등(운동권)은 이 민족주의 때문에 김일성을 부정할 수 없다. ‘굶주린 민중’이라는 아래로부터의 발상이 아니고 ‘반외세’라는 위로부터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젊은이들의 감성은, 북한의 김일성이라는 터무니없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계속해서 인정할 수 있을까. 그들은 지금, 북한의 억압적 정치체제에 입을 다물고 있지만, 언제까지 침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일성에 있어서 임수경은 쓰고 버리는 일회용 총알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위협이 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이 결론과 전망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이미 썼다. 임수경씨는 한국판 신좌익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도 일어났다. 나는 한국 좌익운동권이 신좌익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전망이 틀린 원인은 무엇일까. 또 한국에서 신좌익이 탄생하지 못한 배경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한국 좌익운동사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다. 다만 한국 좌익 진영 사이에도 김일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 땅의 ‘구좌익’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운동권에 있어서의 ‘PD파와 NL파’의 대립이 그렇다. 민족해방 노선이라고 불리는 김일성주의, 즉 주사파의 NL에 비해 PD(민중민주주의)파는 지도자 개인숭배나 민족주의는 상대적으로 약하고, 이른바 신좌익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 같다. 또 박노해 사건이나 자생적 사회주의로 불리는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이 적발되었다. 김일성주의라든가 주체사상 같은 북한의 이른바 구좌익적 사상으로부터는 독자적인 움직임이었다. 정치권에 진출한 좌익에 있어서도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까지, 언제나 내부 파벌이 존재해 노선 갈등이 있었다. 북한의 억압적 체제, 즉 구좌익적 상황에 대한 내부 비판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종북세력’인 민족주의적 NL 계열의 ‘구좌익’이 우세해서 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한국에서의 좌익운동이나 좌익조직은 절대적으로 북한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체제를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좌익에서는 신좌익은 결코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이석기 사건의 ‘내란음모 의혹’은 한반도 유사시 그들의 지하조직(RO)이 북한에 호응해서 한국 내부에서 테러 등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북한 주도의 남북통일에 협력한다는 것이다. 사건에 관한 한국 언론 보도에 의하면, 그 지하조직은 유사시에 대비해서 총을 준비하고, 파괴 공작을 위해 폭탄 제조를 생각하고, 파괴 대상이 되는 국가 중요시설의 선정 등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테러적 발상이 눈에 띈다.

한국 좌익 지하조직이 무장화를 준비해 테러 등 파괴 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보도는, 일본에서의 신좌익 운동의 말로를 연상케 한다. 그 말로라는 것은, 한국에서는 보통 ‘적군파(赤軍派)’라고 불리지만 신좌익으로부터 파생한 극좌과격 집단이 마지막에는 무장화하고, ‘참된 혁명투쟁’의 이름하에 폭탄테러나 인질사건, 총격전, 항공기납치 사건을 일으키고, 결국은 소멸해버린 것을 말한다.

그들은 자위대 기지에 침입해서 병사를 살해하고, 기간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빌딩을 폭탄테러로 공격하고, 천황이 탄 열차 폭파를 목적으로 철교에 폭탄을 장치한 적도 있었다. 나는 1970년대 전반, 사회부 기자로 있으면서 치안 사건을 많이 담당했다. 도쿄 도심에서 경찰 파출소에 대한 폭탄테러를 목격했고, 총으로 무장한 극좌 그룹의 산장 인질사건도 취재했다. 그때는 포위한 경찰 부대와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거기다 그들이 해외로 도주해 팔레스타인 게릴라 부대에 가담해서 이스라엘 텔아비브공항을 습격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이스라엘까지 날아갔다.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 의혹에 의하면, 그들은 유사시에 국가 기간시설인 통신망이나 에너지 시설 등을 파괴하는 폭동 공작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의 극좌과격파 집단의 폭동 전술과 유사하다. 일본 적군파들은 1970년대에 수도인 도쿄 도심을 점거해서 마비시키는 폭동투쟁을 펼쳤다. 헬멧을 쓰고 쇠파이프를 손에 든 수천 명의 시위대가 철도역 등 주요 터미널을 장시간 점거해서 경찰부대와 대치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경찰부대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또한 나리타(成田)국제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이 엄청났다. 완공을 앞둔 시점에서 과격파 집단이 공항 관제탑에 침입해서 내부시설을 완전히 박살냈다. 그 때문에 나리타공항의 개항이 많이 늦어졌다.

내란음모라고 하면 나라의 치안을 혼란시키는 것이 투쟁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과격파들은 국가 치안조직의 중추인 수도 경찰을 테러 목표로 삼았다. 황궁을 지키는 지역 경찰서장 관저가 폭탄 공격을 당하는가 하면, 경시청 간부 자택에 ‘소포 폭탄’을 보내 간부의 부인이 목숨을 잃은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수도 경찰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 때문에 일본 수도 경찰에서는 과격파 집단을 척결하기 위해서 시민들에게 ‘당신 옆에 과격파가 숨어 있다’고 대대적인 홍보작전을 진행했다. 과격파 조직이 완전한 지하조직을 가지고 일반 시민으로 위장해서 사회 곳곳에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극좌과격 집단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국민 홍보작전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일본 적군파 등 과격파 집단은 내부 대립으로 조직 내부에서 일어난 비참한 대량 살인사건으로 괴멸했다. 적군파들은 1972년 2월 19일 나가노현 아사마 산장에서 인질극을 벌이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 당시 10일간 경찰과 대치한 적군파들은 사상 단결을 목적으로 29명의 대원 중 12명을 구타 등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으로 드러나 큰 충격을 줬다. 당시 사건은 전국에서 활동하던 적군파 대다수에게 회의감을 느끼게 하여 일본 적군파가 해체되는 원인이 됐다. 폐쇄적인 지하조직의 과격한 투쟁은 결국 소수첨예화한다. 거기에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대중적인 현실감각은 상실되고, ‘자기들만이 정의다’라는 관념적이고 이념적인 엘리트주의가 지배한다. 좌익운동은 본래 대중적인 것이다. 운동권 등 한국 좌익도 ‘민중’이라고 하는 말이 입버릇 아니었는가.

이석기 의원 등 한국의 통합진보당은 국회에 진출해 합법적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의미에서는 대중성이나 민중성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동시에 지하조직을 가지고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합법·비합법’이라고 하는 양면 작전은 혁명운동에 있어서는 상식이지만, 북한 통일노선을 따른 비합법 지하활동이 한국 사회에서 과연 대중적이고 민중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신좌익 운동은 과격화한 후 괴멸했지만, 기존의 좌익 공산주의 운동이 결코 인간의 해방과는 무관한 가짜라고 주장해 ‘구좌익’을 몰락시킨 공은 있을지도 모른다. 국제적으로는 그 후 소련 공산권이 붕괴되어 소멸했다. 중국 공산주의도 개혁개방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이 역사적 교훈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 사회 속의 한국 좌익은 비인간적이며 전형적인 구좌익 집단인 북한 공산주의를 변화, 개혁으로 유도하는 것이 본래의 역할일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황장엽씨가 말한 것같이 이제 공산주의도 아닌 봉건세습왕조로 후퇴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등 한국 좌익세력은 비인간적인 억압체제를 고집하는 북한의 구태의연한 노선을 따르고 있다.

보통 한국인은 “이런 북한의 체제를 지지하고 그것을 추종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마 종북·좌익세력 자신도 ‘북한에 살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진보당은 북한의 ‘혁명노선’에 따라 지하조직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북한의 추악한 인민 지배체제를 왜 직시하지 않는 것일까. 이석기 의원이나 이정희 의원 등 그토록 예리한 두뇌를 가진 엘리트들이 왜 북한을 지지할까. 북한의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사로잡는 것일까. 외국인 기자에게는 수수께끼 같다.

이하는 나의 가설이지만, 한국 종북·좌익에게는 북한의 ‘반외세·민족주의’가 최대의 매력점이 아닐까. 이것은 광복 후 한반도 역사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즉 남북 정권의 정통성에 관해 좌익은 일관해서 ‘북에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 경력을 그 근거로 하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대외 정책에 있어서 반미·반일이라는 반외세 정책을 민족적이라며 높게 평가해 왔다.

한국 좌익이 지금도 남북 통일노선에서 북한을 따르는 것은 그 때문이지만, 그러나 광복 후 역사에서 도대체 남북의 어느 쪽이 민족적이었나? 민중적 관점에서는 명백하다. 인민을 지금도 충분히 먹일 수 없는 북한보다 충분히 먹이고 있는 남한이 훨씬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것이 아닐까.

민중을 행복하게 할 수 없고 국제사회에서 형편없는 존재가 된 북한이 민족적일 리가 없다. 현재 남북의 국력 차이를 보면 어느 쪽 체제가 민족적이었는지는 이미 분명하다. 그것이야말로 대중적·민중적 관점인데, 엘리트주의적 관념론에 빠진 종북·좌익은 이 관점을 무시한다.

통합진보당의 지하조직은 유사시에 무장투쟁을 계획했다고 해서 내란음모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좌익이 만약 진짜 혁명을 지향하는 ‘신좌익’이 된다면 그 혁명의 대상은 북한의 구좌익적인 억압 체제일 것이다. 남북의 민중을 위해 또 민족을 위해서 지금 혁명이 필요한 곳은 한국이 아니라 북한이 아닌가.

한국의 좌익운동과 한국 정치에는 항상 북한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현실이며 지금 큰 정치 문제가 된 정보기관 개혁 문제의 아킬레스건이다. 끊임없이 북한의 정치공작이 침투하는 한국 정치 상황은 확실히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 된다.

일본의 좌익운동에는 한국처럼 북한과 김일성 콤플렉스 같은 굴레는 없었다. 그 때문에 신좌익운동도 나타났다. 이번 내란음모 사건은 좌익운동의 문제점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심각한 고민을 새삼스럽게 말해주고 있다. 민족분단이 없고 정치에 내란음모로 연결되는 북한 같은 그림자를 느끼지 못하는 일본에서는 이번 사건은 실감이 안 난다. 일본 기자로서는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복잡함과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일본으로 전할 뿐이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 특별주재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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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 특별주재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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