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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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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1호]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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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남북협상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김구가 우리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야 합니다.”
- 김일성·김두봉 대책회의록
▲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 회의석상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구. 북한 정권 수립 전이어서 당시 북에서도 태극기를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8년, 광복 3년이 지난 해였으니 희망에 부풀어 있을 법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이 1947년 9월 19일 한국의 독립 문제를 UN 총회에 부의하여 ‘43:0, 기권 6’으로 1948년 3월 31일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11월 14일)했지만, 북한이 UN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UN은 결국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0일 총선거 실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감격인지 슬픔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남쪽에서는 선거 날짜를 받아놓고 있는 터였고, 북한에서는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는 역사의 비난을 면하고자 남한의 추이를 주목하면서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을 뿐이다.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의 수립, 곧 분단을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제주 4·3사건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어 좌우익은 피차간에 적의가 팽배해 있었다. 1948년 초가 되자 해방 정국의 새로운 이슈로서 남북 협상의 문제가 정가에 대두되었다. 이니셔티브를 잡은 사람은 김규식(金奎植)이었다. 거기에 김구(金九)가 가세했다.
   
   김규식과 김구는 왜 갑자기 남북협상이라는 의제를 띄웠을까? 먼저, 단정파의 승리가 가져온 충격에 대한 반사작용이었다. 남한만의 단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이승만(李承晩)의 정읍(井邑) 발언(1946년 6월 3일)이 나올 당시만 해도 그것은 그의 사견이었으며 통일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48년 2월 23~26일 회기의 입법의원에서 김규식이 퇴장하고 우익만이 참여한 상태에서 단독 선거가 ‘40:0’으로 가결되었다. 이제 단정과 분단이 현실로 다가옴으로써 김규식은 입법의원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군정의 카드가 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규식은 민주의원(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 등 남한 각 정당 지도자 28명으로 구성)을 이끄는 과정에서 그것이 단독정부로 가는 미군의 전략이었고 자신은 이용되었다고 생각해 자책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 문제가 UN으로 이관되는 등 분단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남북협상은 명분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김구의 입장도 김규식과 동류의식을 찾기에 충분했다. 김구도 이승만에 대하여 열패감(劣敗感)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당초에 민족 통일을 염원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지만 이승만의 정치적 적수가 되지 못하고 끝내 그의 단정론에 말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단정 반대로의 노선 변경과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참담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는 데 유리한 인자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김구는 장덕수(張德秀) 암살 사건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압박을 받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일을 추진하면서 남북협상 의견서 6개 조항(1948년 1월 28일) 가운데 (6)항에서 남북 요인의 지도자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어서 2월 8일에 김구와 김규식이 UN한국위원단의 메논(K. P. S. Menon) 의장을 만나 남북 요인 회담을 제청했다는 사실이 정가에 오고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홍명희(洪命憙)·김구·김창숙(金昌淑)·조소앙(趙素昻)·조성환(趙成煥)·조완구(趙琬九)·김규식 7인이 성명을 발표하고, 2월 16일에는 서울 주재 소련 대표부를 경유하여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 협상을 제의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희망의 불씨인지 체념인지 국민 반응은 착잡했다.
   
   시작은 김규식이 했지만 추진에는 김구가 더 적극적이었다. 김구는 남조선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나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죽음의 구렁텅이(死坑)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지금으로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3000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투쟁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용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도선 이북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서울신문·1948년 2월 11~13일)
   
   
   김일성의 계산
   
   현실 판단이 복잡하기는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를 받았을 때 상황은 복잡했지만 김일성의 계산과 결심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948년의 상황이 되면 남한의 우익 및 미 군정이 단정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인민위원회의 조직이 완성되었고 그 나름대로 단정 수립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먼저 단정을 추진했다는 역사의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통일 의지를 표현하는 장소에 남한의 지도자들을 참석시킴으로써, 북한의 단정 수립을 위한 수순을 남북한 지도자 연석회의의 결정 사항으로 윤색하고 싶었다. 그러니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이 그에게는 밑지는 거래가 아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남쪽이 이니셔티브를 잡고 이 일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는 김일성의 판단이었다기보다는 당시 소련 정치 고문들의 충고였을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은 남한 지도자들의 의견에 대한 회신의 형식이 아니라, 남한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자신이 전혀 새롭게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3월 15일에 6개 정당·사회단체 명의로 남조선의 단정 반대 17개 정당·사회단체가 4월 초에 평양을 방문하여 정치협상을 열자고 제안하면서, 남한 대표로 김구·조소앙·김규식·홍명희·이극로(李克魯)·김붕준(金朋濬)·김일청(金一靑, 신한민족당)·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김창준(金昌俊, 조선공산당)·백남운(白南雲)·허성택(許成澤, 남로당중앙위원)·송을수(宋乙秀, 민전 중앙위원) 등 15명을 초청했다.
   
   예비 접촉을 맡은 사람은 안중근(安重根)의 사촌동생으로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김구를 가까이 모셨던 안경근(安敬根)과, 지난날 조선공산당에 몸을 담았던 한독당 중앙위원 권태석(權泰錫),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 부부장을 맡고 있던 성시백(成始伯)이었다. 이 밀사 가운데 주목할 인물은 성시백이었다. 황해도 평산 출신인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팔로군에 가담하여 투쟁한 경력이 있고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의열단)에도 관여했으며 광복과 더불어 남한으로 귀환하여 박헌영의 충실한 동지로서 지하운동을 하며 김일성과 남로당과의 고리 역할을 하던 인물이었다.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몽양여운형평전’(400~404쪽)에 따르면, “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의 주역이자 거물급 공산 간첩”이었던 그가 남북협상의 밀사가 되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이 회담을 김일성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처형되었는데 지금은 평양애국열사릉에 가묘로 묻혀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이 김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느냐의 문제이다. 1948년 초까지도 북한은 김구의 노선을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로 격렬하게 비판하고 김구를 김구(金狗)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당초부터 김규식에 무게를 두지 않은 채 김구를 주목한 것은, 김구의 정치적 비중뿐만 아니라 그의 입을 통하여 이승만의 단정 의지를 규탄함으로써 자신들의 단정 추진을 합리화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회의의 일정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김구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었다. 특히 회담 점검을 위한 전략 회의에서 김일성은 김구의 참석을 주장하면서, “김구가 오지 않아도 회의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냐”고 백남운(白南雲)이 물었을 때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김구와 그의 측근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 대책도 논의되었다. 그때는 김구의 일행을 내보내고 회의는 계속하며 그들을 미국 간첩으로 몬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레베데프 비망록’·1948년 4월 19일) 이에 대해 백남운은 “김구에게 이북의 공장과 민주 건설의 성과를 보여주면 이에 고무되어 남한 정부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귀국 후 별별 짓을 다 하던 김구가…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게 되니까 당황하여 평양에 오려 한다”(‘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1)·262쪽)는 것이 당시 북한 지도자들의 눈에 비친 김구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김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슈티코프일기’·1947년 1월 21일)는 것이 당초부터의 전략이었다.
   
   김구가 북행하던 4월 19일 오전 5시 반경부터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이북학련(以北學聯)·대한학생총연맹(大韓學生總聯盟)에 소속된 청년 학생 140여명이 밀려와 김구의 북행을 만류했다. 그러나 김구는 “내가 이번에 가서 성과가 없다면 차라리 38도선에서 배를 가르리라”는 말을 남기고 평양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분단이라는 제단의 순교자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미 군정은 분석했다. 남북협상의 전모를 충실하게 재구성한 도진순 교수(창원대학교)의 글(‘한국민족주의와 남북 관계’·257쪽)에 따르면, 김구는 손수건 하나 챙기지 못하고 경교장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민독당위원장 홍명희는 4월 19일에 월북했다. 건강이 나빠 북행할 수 없을 것 같던 김규식은 4월 21일에 원세훈·김붕준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 16명, 그리고 병간을 할 부인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장도에 올랐다. 도진순 교수의 기록(237쪽)에 따르면, 김규식은 자신이 북한에 갔을 경우에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다가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북으로 간 사람들
   
   김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환영객 가운데 곱게 차린 한 할머니가 있었다. 낯이 익었다. 아, 그 여인은 김구가 5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 안신호(安信浩)였다. 그는 안창호(安昌浩)의 여동생이었는데 두 남녀는 결혼까지 마음먹고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안창호는 동생을 양주삼(梁柱三·훗날 감리교 감독이 됨)에게 시집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의 결혼을 깨버렸다. 안창호는 왜 김구를 매부로 삼으려 하지 않았을까? ‘백범일지’에는 그 여인과의 헤어짐으로 인한 김구의 아픔이 아리게 묘사되어 있다. 안신호는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김구는 상처를 입었고, 안신호도 상처를 보듬으며 두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법인데, 50년 전에 헤어진 여인을 만난 김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북한이 그 여인을 환영객으로 내보낸 것은 김구의 연정(戀情)을 자극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김구가 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고 이미 칠순 노인이었다 하더라도, 회의 내내 심란했을 것이다.
   
   4월 19일 저녁 6시, 평양시 모란봉 극장에서는 연석회의의 막이 올랐다. 회의에는 북측에서 북로당 60명, 민주당 40명 등 15개 정당·단체 대표 300명이 참석했고, 남쪽에서는 남로당 39명, 사회민주당 7명 등 31개 정당·단체 대표 245명이 참석했다. 그밖에 이런저런 참석자를 포함하여 전체 참가자는 695명이었다. 통일을 논의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었다. 김규식은 몸이 아파서 오전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가 이튿날부터 참석했다. 그의 북행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몸으로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북행한 그는 자리를 채워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적 소신을 피력할 기회도 없었고 또 그의 발언에 귀를 기울여 주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김규식이 의사 진행 발언을 얻어 자신들이 참석하기 전에 회의를 시작한 점, 미국을 미 제국주의라고 부른 점, 자신들을 환영해주지 않은 점을 항의하고 연석회의보다는 소규모 회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스탈린의 초상을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레베데프 비망록’·1948년 4월 23일) 지식인으로서 그의 양식에 비춰볼 때 그는 회의의 진행 방법도 동의할 수 없었고 그 내용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남한으로 돌아온 뒤에 벌어질 미국과의 관계가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담은 북한의 정치 선전으로 시작했다. 먼저 김일성의 보고로 회의는 시작되었다. 그의 보고는, 북조선에 “낙원이 건설되었음”을 설명하는 말로 가득 차 있었다. 장건상(張建相)의 회고담(‘혁명가들의 항일 회상’·243쪽)에 따르면, 회의를 하다가도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다. 참가자들의 일제 때 옥살이 한 햇수를 모두 합치면 746년9개월이라는 점을 보고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성향을 부각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한 대표의 자격으로 등단한 김구가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쟁취인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이어서 1시간이 넘는 ‘남조선 정치 정세’ 보고에서 박헌영은 “소련은 해방자요 민주화의 동지이며, 미국은 식민지 지배의 점령군임”을 밝히고, 그 뒤로 이극로가 조선 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4월 24일에는 황해도제철소를 시찰하고 환영 공연을 열었으며 4월 25일에는 김일성광장에서 환영 군중집회를 열었는데 동원된 인원은 30만명 정도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그와 같은 선전 일색의 회의가 싫었고, 그런 식으로는 성과도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인 회담을 요청했다. 김구·김규식, 김일성·김두봉 간의 ‘4김 회담’은 4월 29일과 30일에 두 차례 열렸다. 김구·김규식은 여기에서 김일성·김두봉에게 남한에 대한 전력 공급과 송신 재개, 남한의 연백(延白)평야에 대한 농업용수의 송수, 조만식(曺晩植)의 월남 허용, 뤼순(旅順)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유해 이장을 요구했다.
   
   김구는 다시 김일성과의 단독 회담을 요구했다. 김구의 요청에 따라서 5월 3일에 김일성과 두 사람의 회담이 성사되었다. 이 회담은 5시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분위기는 좋았다. 김구는 북한에 억류된 한독당원들의 석방 문제, 조만식과의 면담 허용, 전력 문제를 요구하면서 “나는 북의 공산당원과 타협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과 남쪽 사람들과는 안 된다. 나를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김구의 독립당원들을 검거 투옥한 것이 아니라 테러분자를 체포 투옥했다고 대답하면서, 테러분자들을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통일을 걱정하는 구체적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위의 대화 가운데 김구는 독립당원이라고 표현했고 김일성은 테러분자라고 표현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 인물들은 김구가 거느리고 있던 외곽단체인 백의사(白衣社)의 요원들을 의미한다. 김구는 임정에서 귀국한 직후에 신익희(申翼熙)를 본부장으로 하는 정치공작대 중앙본부를 조직하여 그 산하에 백의사를 결성하여 이들의 지원을 받아 반탁 우익 진영 인사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정치 활동을 돕는 동시에 요원들을 북한에 밀파하여 공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백의사는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지하 공작 단체로서 국민당 조직처의 캉저(康澤)가 조직하고 특무처장 다이리(戴笠)가 이끌던 남의사(藍衣社)를 본떠 만든 것으로서,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뜻으로 백의사라는 이름으로 1945년 12월에 조직되었다.
   
   평남 출신으로 중국 루오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임정의 신익희·김원봉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염응택(廉應澤·일명 廉東振)과 북한에서 내려온 양근환(梁謹煥)이 백의사를 이끌고 있었다. 염응택은 만주에서 활약할 당시 중공군의 고문으로 시력을 잃어 미군 측 기록에는 ‘Blind General Yum’으로 기록되어 있다.(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던 그날 정확히 그의 집(미아리?)을 급습하여 그를 잡아갔다. 바로 처형했을 것이다.) 서북청년회 2대 회장 문봉제(文鳳濟)의 증언(‘서북청년회’(12)·중앙일보 1973년 1월 8일자)에 따르면, 이들은 조선공산당 평남도당 위원장 현준혁(玄俊赫)을 암살하고, 김일성의 외종조부이자 북한최고인민회의 중앙위원인 강량욱(姜良煜·제10회 김일성 편 참조)을 노려 자객들을 보냈으나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그의 가족들만 죽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일성이 김구의 부탁을 들었을 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구의 망명설
   
   요즘 느닷없이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당시에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장(縣長)에게 망명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와 이 시대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실소(失笑)를 자아낸 적이 있다. 국가 원수(元首)가 평생 원수(怨讐)로 여기던 일본의 지방 군수에게 망명을 신청했다니 소가 웃을 노릇이다. 그런데 김구의 생애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평양 회담 당시에 김구가 김일성에게 정치적 망명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곧 김구는 자신의 장래 활동에 대하여 만일 미국인들이 자신을 탄압한다면 이북에서 정치적 피난처를 구할 수 있는가를 물었고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일성은 1985년 8월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와의 회견에서 김구가 자신에게 “지난날의 죄과를 털어놓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과수원을 차려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뒷날 그의 어록에서 이를 다시 언급하면서, “김 선생(김구)이 남조선에 나가서 투쟁하다가 정 곤란하면 다시 북조선에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는 선생이 북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할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증폭되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정부 주석의 직인(職印)을 내놓으면서 “앞으로는 장군님이 국가의 지도자이시니 이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선생이 내놓은 상하이임시정부의 인장은 그냥 가지고 가십시오. 내가 그 인장은 받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저 인민 대중의 두터운 신임이 있으면 됩니다”라고 거절했다는 것이다.(‘김일성저작집’(4), 303~304쪽·김구와 한 담화(1948년 5월 3일))
   
   이 대목은 매우 미묘하여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당초 김일성의 입을 통해 이 비화가 공개되었을 때 그것은 사실을 과장했고 또 악의가 있었다는 것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의 인장을 김일성에게 바쳤다는 그의 발언은 믿을 수가 없다. 김구가 평양에 갈 때 그 직인을 가져갔으나 그것은 남북한의 합의가 이뤄지면 권위 있게 날인하기 위한 것이었지 김일성에게 ‘헌상(獻上)’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과수원 문제는 망명한다거나 구걸의 뜻이 아니라 김구가 자신의 고향도 이북인데 노후에는 통일된 고향에 돌아가 과수원이나 운영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더 나아가 영화 ‘위대한 품’(1986)에서 이 일화들을 과장하여 극화했다. 이 일화는 북한이 남북협상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선전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완범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김구는 김일성·김정일에게 살아서도 이용당하더니 죽어서도 이용당했다”는 글(‘김구, 남북협상, 대한민국 수립’·한국정치외교사학회·2015년 4월 23일·54쪽)을 남겼다.
   
   
   역사적 평가
   
   김구와 김규식은 5월 4일에 귀국했고, 북한에 남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당초에 기대했던 것처럼 통일에 대한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반(半)언약을 받아온 전력 문제도 약속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남북 협상에 대한 종래의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민족주의 운동으로 기술되어 있다. 김구·김규식 일행의 북행은 지혜롭지 않았다. 김규식은 귀국 보고에서 “생각했던 이상의 성과”(조선일보 1948년 5월 7일자)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제주 4·3사건이 전개되고 있고, 5·10 총선거가 한 주일 뒤로 임박해 있는 시기에 그들은 정치적 입지의 돌파구를 위해 북행했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역사의 현장을 이탈한 것이며, 통일 의지도 없는 북한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북행을 결심한 김구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가 몸담고 있던 한독당에서도 그의 북행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는 좀 더 숙고했어야 했다. 결국 이 시기에 협상을 통한 국토 통일이란 고전적 원로 민족주의자들의 가냘픈 꿈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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