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삼(왼쪽)·김익렬
김달삼(왼쪽)·김익렬

지난 6월에 첫 회를 시작한 이래 이번 15회에 이르기까지 무척 긴장했고 살얼음을 밟는 것 같았다. 틀린 점이나 없는지, 나의 글로 말미암아 마음 아파할 사람은 없는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일은 없는지…. 이번호에 특별히 그런 넋두리를 하는 것은 제주4·3사건이야말로 너무 극명하게 좌우가 갈려 대치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은원(恩怨)이 너무 깊다. 어느 편에 설 수도 없다. 학자의 소신이니 역사가의 정론이니 하는 것이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제주4·3사건을 쓰려니 그런 감회가 더욱 새록새록하다.

아름답고 슬픈 제주

언제인가 ‘내가 본 세계의 10대 명승지’라는 주제의 수필 원고 청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1)50만년이 걸려 생성되었다는 네바다주 소금사막에 서서 100년도 못 살며 아웅다웅한 인생의 무상함 (2)피라미드 앞 나폴레옹이 섰던 자리에서의 망연자실함 (3)고비사막의 유성(流星) (4)통일을 염원하며 울며 묵주 기도를 드리던 백두산 천지의 부슬비 (5)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마야(Maya) 유적지와 칸쿤(Cancuun)의 쪽빛 바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Frida Kahlo)전(展) (6)바르셀로나의 피카소박물관과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유적 (7)바이칼호의 물안개와 자작나무 숲, 그리고 데카브리스트(Decabrist·12월혁명당)박물관 (8)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 남쪽에 있는 골동품·고서점 도시 스틸워터(Stillwater) (9)일본 교토(京都) 북쪽에 히에이산(比叡山)과 비와호(琵琶湖)를 끼고 있는 엔랴쿠지(延曆寺) (10)한라산 1200고지의 설화(雪花)를 꼽았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곳은 한라산의 아름다움이다. 세계 10대 절경에 뽑혔다거나 내 나라 땅이라거나 하는 것과 관계없이, 나는 설령 한국인이 아니었더라도 한라산의 설화를 꼽았을 것이다. 이 좁은 땅에 한대(寒帶)에서부터 아열대기후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한라산에 갈 적마다 늘 기쁘고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제주4·3사건을 쓴 뒤로부터 그렇게 되었다. 더욱이 이산하의 시 ‘한라산’의 다음 구절를 읽을 때면 가슴이 저려온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신혼 여행지는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제주는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30년 전에 제주사건을 답사하면서 몇 가지 놀란 일이 있다. 한집안에 살면서도 부모와 자식이 따로 밥을 지어먹는 것이 이상했다. 김씨 집에 혼사가 있을 적에 하객인 이씨 집안의 아버지는 저쪽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저쪽 어머니에게, 형은 저쪽 형에게, 그리고 동생은 저쪽 동생에게 따로따로 축의금을 내는데 축의금은 각자 받은 사람의 몫이었다. 대문도 특이했다. 집이 비었을 적에는 긴 막대기를 가로질러 놓고, 여자만 있을 적에는 막대기를 비스듬히 놓고, 손님이 들어와도 좋을 때에는 그 막대기를 치운다. 육지 사위는 괜찮지만 육지 며느리는 환영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했다. 문화인류학을 꺼낼 것까지는 없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그들의 독립심이 매우 강인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주도는 대륙과의 격리로 말미암아 행정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혜택이 빈약하여 소외의식과 경계심이 강렬했다. 이미 조선시대 후기부터 제주도에서의 이러한 불만은 조직적 저항으로 나타났는데, 양제해(梁制海)의 난(1812), 철종 시기의 민요(民擾·1862), 방성칠(房星七)의 난(1898), 그리고 그 유명한 이재수(李在守)의 난(1901)으로 말미암아 중앙 정부와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이정재와 심은하가 주연하여 영화로도 유명해진 이재수의 난만 하더라도 할 말이 많다. 한국 천주교 박해사를 이야기할 때면 순교자의 거룩한 신심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제주도에서는 프랑스 세력을 배경으로 신자들이 비교도를 박해하다가 사단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흔히 제주교안(敎案)이라 부르는 이 사건에는 제주의 슬픔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4·3사건 당시에 민병대(民兵隊)들이 “예수쟁이를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대정교회 이도종 목사를 죽인 사건(‘한국의 성읍교회-대정교회’·전정희·국민일보 2015년 5월 23일자)은 그런 복수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제주도에 부임한 관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그 부하들은 육지인이었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가 되면 일본은 제주도를 최후의 항전지로 생각하고 많은 무기와 병력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무기에 매우 친숙해 있었다. 종전 무렵에 제주도에는 6개 보병사단과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육군과 막강한 해·공군 25만명이 주둔하고 있어서 도민들보다 군인이 더 많았다. 일본은 아마도 제주도를 ‘한국의 시칠리아(Sicily)’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해방정국에서의 제주도

광복 당시의 제주도는 13개 면에 인구 25만명을 가진, 전남에서 가장 큰 군(郡)이었는데 광복과 더불어 5만명이 더 귀환했다. 일본이나 육지로 나가 있던 유학생, 사상 도피자, 상공인이 대거 귀환한 데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좌익 사상에 젖어 있었고 남로당과 연결된 사람도 많았다. 미 군정이 들어서기 전에 인민공화국 정부가 있었으며 남로당원이 자칭 5만명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농부와 어부였고, 진심으로 공산주의의 교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의 이입은 분노를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정국에서의 제주 상황을 가장 정확히 인식했던 사람은 제주 사태의 조사 책임을 맡았던 서울지방심리원(審理院) 판사 양원일(梁元一)이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제주도민들은 사실상 정부 행세를 하던 인민공화국을 너무 과대평가했고, 경찰이 가혹한 행동을 자행함으로써 인심을 잃었으며, 여기에 우익청년단이 협조했고, 밀무역 단속을 빙자하여 관리들의 횡포가 극심했으며, 도민들은 강대한 세력에 아부하여 지위와 재산을 보존하려는 심리가 강했으며, 남북 협상을 지나치게 기대했다.(조선일보 1948년 6월 17일자) 경찰의 가혹행위, 곧 고문이나 수탈, 보복살해에 대해서는 제주 사태의 진상 조사를 맡았던 최란수(崔蘭洙) 경감의 기록(동아일보 1948월 6월 23일자)에 잘 나타나 있는데 100명 전후의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를 비롯한 우익들이 제주도민의 생업이었던 일본·제주·육지 간의 중간무역을 위협하고 침해했다. 당시 미 군정하에서 귀환 동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재산은 대부분 섬에 결핍되어 있는 생활필수품이었는데 서북청년회가 이를 압수하여 상인들에게 다시 팔아 돈을 벌었다.(조선일보 1948년 7월 24일자)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의 3·1절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서울운동장(우익)과 남산(좌익)에서 따로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하는 동안에 좌우익이 충돌하여 사망자 16명과 부상자 22명이 발생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제주에서는 남산국민학교에서 3·1절 행사를 마치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현장에서 6명이 죽었다. 시위가 격화된 것은 3·1절 경축식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의 시국 문제를 거론했고 그 틈새에 남로당이 사건을 확대하려고 암약한 탓이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요인으로 민심이 격분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에 경찰서와 우익이 공격받는 것으로 제주사건은 본격적으로 폭력화되었다. 첫날 민병대의 수는 100명이 넘었다. 당시 제주에는 15개 지서에 약 480명의 경찰관이 있었는데, 이날 경찰관서 11개소와 지서 5개소가 습격을 받았고 경찰관 4명이 사망했으며, 일반인 8명이 사살되었다.(조선일보 1948년 4월 6일자) 습격의 주요 원인은 밀수 혐의 등을 이유로 도민과 그 가족에게 가해진 경찰과 서북청년들의 횡포, 고문치사, 강간에 대한 보복이었다. 민병대의 당초 목적은 경찰에 구치되어 고문당하는 피의자들 구조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정부는 1400명의 본토 경찰을 파견하는 한편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김정호(金正晧)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해상교통망을 차단함으로써 외부 세력의 가세를 막으면서 민병대의 귀순을 유도하고자 했다. 김정호는 만주봉천군관학교 3기 출신으로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경찰에 투신, 경무부 공안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 귀순 공작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제주지사 유해진(柳海辰)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섭을 위해 ‘산(山)사람들’을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몸이 아파 못 가겠다고 말했다. 그 다음의 교섭책임자는 김정호였으나 그 또한 갑자기 서울로 올라갈 일이 생겨 빠졌다. 세 번째로 임명된 책임자는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이었는데 그 또한 회담 당일에 갑자기 몸이 아팠다. 이어서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이 네 번째 책임자로 지명되었으나 그도 또한 담판을 회피함으로써 9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이 다섯 번째 교섭자로 지명되었다. 김익렬(1921~1988)은 경남 하동(河東) 출신으로 일본 고베(神戶)상업학교를 나와 후쿠지야마(福知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한 인물로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에 국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제주도 부임 당시에는 중령이었다. 그는 유서를 써 남겨두고 한라산 유격대 김달삼(金達三·1925~1950)의 아지트로 올라갔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대좌가 이뤄진 것은 4월 28일이었다. 제주 대정중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김달삼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대정 출신이다. 본명은 이승진(李承晋)으로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정토종계(淨土宗系) 세이호(聖峯)중학교와 주오(中央)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그는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아버지가 살던 대구에서 잠시 살았는데 이때 어떤 형태로든 대구사건과 연루되었을 것이다. 1946년 제주도로 귀향한 그는 대정초급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을 가르치면서 남로당 대정면 조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남로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강문석(姜文錫)의 사위였다.(‘20세기 제주인명사전’ 102~103쪽)

김익렬의 유고(遺稿) ‘4·3의 진실’(‘4·3은 말한다’(2) 320쪽)에 따르면 김익렬과 김달삼 두 사람은 전혀 초면이라고 하나, 제주 사건을 논문으로 발표한 메릴(John Merrill·‘The Cheju-do Rebellion’ 174쪽)과 김익렬의 선임 연대장이었던 이치업(李致業)은 김익렬이 학병 출신으로 김달삼과 동료였으며 제주도에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번개장군’·이치업·107쪽) 유격대의 지휘자는 김달삼이었지만 군사 지휘관은 학병 출신인 이덕구(李德九)였고 초기의 병력은 500~600명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무렵 버리고 간 무기를 모아 무장하고 군사 훈련은 팔로군(八路軍) 출신들이 담당하여 자못 그 기세가 당당했다.

김익렬과 김달삼, 그리고 박진경

제주학살명령서
제주학살명령서

김익렬과의 첫 대좌에서 김달삼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없었으며,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 일제 경찰, 서북청년회를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실시한다면 순종하겠다는 골자의 내용을 피력했다. 4월 말이 되자 유격대 수는 약 2000명 정도로 늘었으며 약 3개월분의 탄약과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유격대 가운데에는 퉁퉁 부은 젖가슴을 보이면서 어서 집에 돌아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여인도 있었다. 김익렬은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도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며, 김달삼과 유격대 두목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선박을 제공할 용의도 있으며, 이를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잡혀두겠다고 약속했다.(김익렬·328~330쪽)

이 자리에서 김익렬이 제시한 사항은 전투 행위의 중지, 즉각적인 무장 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명단 제출이었다. 이에 대해 김달삼이 제시한 조건은 제주도민으로만 행정 관리와 경찰을 편성하고, 민족반역자, 악질 경찰, 서북청년들을 제주도에서 추방하고 제주도민으로 편성된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제주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현재의 경찰은 해체하며, ‘의거’(봉기)에 참가한 어떠한 사람도 죄를 묻지 않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김달삼의 제안은 김익렬의 직권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일단 휴전에는 합의를 보았다.

전투가 소강(小康) 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5월 1일의 노동절(May Day)이 다가왔다. 불행하게도 이날 오전 11시경 정체불명의 일단이 제주읍 중산간 부락 오라리를 습격하여 주민을 죽이고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경찰들에 의한 귀순 방해 공작이었다. 며칠 안에 귀순 작업이 종료되어 진압이 끝나면 경찰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그들은 두려워했다. 더욱이 우익들은 연대장 김익렬을 암살하겠노라고 위협했다. 습격은 2~3일에 걸쳐 자행되었다. 5월 3일에도 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 민병대를 습격했다.(김익렬·332~335쪽)

5월 5일 제주도에서는 딘(William F. Dean) 군정 장관의 주도하에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宋虎聲),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Mansfield), 제주지사 유해진,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이 참석하여 진압 정책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하는 김익렬 연대장과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사이에 첨예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으나 딘 장관이 토벌 작전으로 방침을 결정함에 따라 김익렬은 용공분자라는 의혹을 받고 여수 14연대장으로 전출됐다.

김익렬의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朴珍景·1920~1948) 중령이 부임한 것은 5월 6일이었다. 그가 부임한 직후 9연대는 11연대로 편제가 변경되었다. 박진경은 경남 남해(南海) 출신으로 오사카(大阪)외국어학교를 졸업하여 영어에 능통하였다. 그는 광복이 되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했으나 행정장교 출신이었으므로 작전 지휘의 경험이 없었다. 딘 장군은 박진경을 몹시 총애했다. 그는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지형과 요새 배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취임식에서 미욱한 짓을 저질렀다. 내용인즉, 자기 부친은 친일 단체인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 간부였으며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발언한 것이다. 김익렬의 유고(344~345쪽)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 발언에 대하여 우익들을 박진경이 양민을 보호했다고 반박했다.(‘민족정론소식’ 2000년 3월호 4~5쪽)

박진경의 부임과 함께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김정호 사령관의 작전 계획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이 제주도의 민중 봉기를 유격대로 확대시킨 근본 원인이 된다. 더욱이 사태를 어렵게 만든 것은 경찰의 실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고자 노골적으로 귀순 공작을 방해했다. 미 군정이 초토화 작전을 묵인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마을들을 초토화시켜 나감으로써 산간 주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유격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밭의 경계선에 돌담을 쌓았는데 이것이 유격대에는 훌륭한 방새(防塞)가 되었다. 언제인가 제주도 우근민(禹瑾敏) 지사에게 제주도의 돌담 기술자를 명장(名匠)으로 선정하라고 말했다가 제주도 출신이면 초등학교 출신도 다하는 일이라고 핀잔만 들었다. 돌담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남기고 간 토굴이 많아 유격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박진경이 부임한 뒤 거의 1개월이 지나 군정장관 딘은 박진경의 사기를 고무하고자 몸소 제주도에 내려가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그날 관리와 민간 유지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축하연을 열었다. 박진경이 만취하여 6월 19일 오전 3시에 연대본부의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을 때 문상길(文相吉) 중위를 비롯한 4명의 부하들이 그를 사살했다. 그들은 박진경의 무자비한 공격 작전이 살해의 동기였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고등군법재판은 문상길, 신상우(申尙雨) 1등상사, 손선호(孫善鎬) 하사, 배경용(裵敬用) 하사 등 4명에게 총살형을 언도했다.(조선일보 1948년 8월 11일·15일자) 우익들은 그들이 남로당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박진경의 장군 추서를 추진했다.(‘민족정론소식’ 2000년 3월호 4~5쪽)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崔慶祿) 중령이 취임했다.

이 무렵인 9월 14일에는 제주사건과 관련하여 목포(木浦)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440명의 죄수들이 집단으로 탈옥했다. 경찰은 그들을 처형하고 살점을 저며 좌익 인사들에게 배달했다.(John Merrill·193쪽) 군사 법정은 공산주의 용의자 1650명에게 유죄를 언도했고 이들 중 250명이 처형되었다. 이와 함께 여수·순천사건의 소식을 듣고 유격대는 다시 경찰초소를 공격했다. 아울러 여 순천사건은 우익들에게 제주 학살의 명분을 제공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경비대와 경찰은 제주도 주민을 해안에 설치된 캠프로 소개(疏開)하고, 한라산 아랫자락을 따라 가옥과 농작물을 불태웠으며, 혐의가 있는 유격대와 그들의 가족을 살해했다.(Allen R. Millett·‘Captain James H. Hausman and the Formation of the Korean Army’ 528쪽)

혈흔(血痕)

인간의 마성(魔性)은 얼마만큼이나 극악할 수 있을까. 과연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잔혹하게 동족을 집단 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방 공간이라는 동족의 무대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식민지 지배에서도 겪지 않았던 대량 학살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다시 어리석은 질문을 해보자. 도대체 얼마나 죽였을까. 양민 학살의 진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성산포경찰서에 소장되어 있는 문서(사진)가 곧 그것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계엄사령관이었던 해병대 김○○ 중령이 성산포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공문인데, 내용인즉 성산포경찰서에 수감 중인 C-D급 미결혐의자를 즉시 총살하라는 것이었다. D급으로 올라갈수록 중범자이다. 그런데 문서 윗부분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총살이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도 모두 성산경찰서처럼 총살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김 중령은 그 뒤 해병대 사령관으로 진급했고 독립유공자 5등급을 받았으며, 어느 교회 장로님으로 살다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불이행’이라고 부전지(附箋紙)를 붙인 인물은 성산포경찰서장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신원을 추적해 보니 문형순(文亨淳) 경감이었다. 대정리 앞바다에서 이 문서를 들여다보는데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 문제를 학술적으로 처음 다루었던 메릴은 적어도 제주도 인구의 약 10%인 3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194~195쪽) 군정청에서는 1만5000명이 살해당하고 3분의 1의 가옥이 파손된 것으로 보고하였으며(G-2 Periodical Report, No. 1097 : 1 April 1949), 군사(軍史)학자 밀레트(Allen R. Millett)는 제주도에서 ‘사라진’ 주민이 약 3만명으로 추정되지만 아마도 실제로 피살된 숫자는 8000~1만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528쪽) 제주도의회가 접수한 피해자 통계에 따르면, 당시의 피살자가 9987명, 행방불명자가 1225명,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피해자 1031명, 피해자로 접수되지는 않았지만 사망이 확실한 무연고 피살자가 2598명, 합계 1만484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제주도 4·3 피해조사 보고서’ 60~63쪽·2000)

요컨대 제주4·3사건의 본질은 사건의 발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수습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적 현상이다. 원인만 따지는 것은 죄상을 묻으려는 구실일 뿐이다. 제주사건은 처음에는 자발적인 민중 봉기로 시작된 것이었으나 ‘상호간’의 보복살해로 말미암아 사태가 악화되었고, 남북한의 정면대결로 번지자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추격을 당하게 된 잔여세력들이 점차로 조직적인 빨치산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주 사태는 남로당으로 하여금 승리할 수 없는 때에 무장투쟁에 뛰어든 결과를 초래했고, 우익에는 양민 학살이라는 오명을 안겨주었다.

김달삼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주도를 탈출하여 월북했다. 북한 혁명열사의 능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1950년 9월 30일에 죽은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김익렬은 그 뒤 육군 중장에 올라 국방대학원장을 끝으로 퇴역했다. 그는 “좀 허풍스러웠으며 좌경한 군인”(‘번개장군’ 110쪽)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공개하라는 부탁과 함께 가족들에게 제주 사태의 진상을 담은 유서(遺稿)를 남겼는데 그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305·357쪽)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