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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날씨 걱정하던 농민들 왜 철사에 묶인 채 오동도 앞바다에 던져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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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2377호] 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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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날씨 걱정하던 농민들 왜 철사에 묶인 채 오동도 앞바다에 던져졌을까

세 번의 비극 여수·순천사건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불행했던 과거 역사를 알고 나면 마음은 더욱 비참해진다.”
- 앤드루 릭비(E. Rigby·2007)
▲ 여수·순천 사건 당시 학살된 시민들.
나는 1960년대 초엽, 대학 초년 시절에 서울 성동구 신당동 시구문시장에서 점원을 하며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이발소 주인의 입담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손님의 넋을 빼놓았다. 그의 입담을 듣다 보면 어느덧 이발은 끝났다. 신변잡기에서부터 현대사를 종횡하는 그의 이야기에는 허풍도 많았지만 무근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빈부가 엇갈리는 길 건너 사이여서 나와 사는 수준이 달랐으나 그 이발소 뒷집에 박정희(朴正熙) 의장이 살고, 그 옆에 육군참모총장 김종오(金鍾五) 대장이 살고, 조금 올라가면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사는데 그분들이 모두 자기의 고객이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머리를 깎던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고향 이야기를 했다. 오늘이 아버지 제삿날인데 먹고살기 어려워서 고향에 내려가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수·순천사건 때 진압부대 요원인 김종원(金鍾元)의 손에 죽었다고 했다. 면도하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어찌나 무섭던지…. 그날 그의 아버지는 시국 강연을 들으러 동네 사람들과 함께 쭐레쭐레 학교 교정에 가서 연설을 듣고 있었다. 연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비가 좀 올랑가?” “금년 농사는 좀 잘되었으면 씨겠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느닷없이 총알이 날아오고 칼을 빼든 군인과 경찰이 시민들을 죽여 한 구덩이에 묻었다. 그래서 자기네 동네에는 제삿날이 모두 같다고 했다. 왜 죽였을까. 정말로 그렇게 죽였을까.
   
   
   호남의 정치적 유산
   
   지난날 내가 ‘전봉준(全琫準) 평전’을 쓰면서 전북 고창에 들렀을 적에 고창문화원장 이기화(李起華) 선생은 ‘전라도 자랑’의 버전을 들려주었다. 옛날에는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고흥 가서 힘 자랑하지 말랬다”인데 지금은 “고창 가서 양반 자랑하지 말라”는 말을 보탰다고 한다. 그 뒤로 내가 역마살 낀 사람처럼 호남 땅을 헤매고 다니면서 얻은 신판 호남 자랑을 더 보태자면, 진도 가서 창(唱) 자랑하지 말고, 목포 가서 그림 자랑하지 말고, 전주 가서 글씨 자랑하지 말고, 남원 가서 아미(蛾眉)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호남은 정이 흐르는 예향(藝鄕)이라는 뜻이다.
   
   그런 호남이 왜 그리 가슴 아픈 땅이 되었을까.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 남도 답사기를 먼저 쓴 뒤로 그 책 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지만 호남의 한(恨)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내가 20년 동안 호남 땅을 내 고향보다 더 자주 찾아본 뒤에 얻은 결론은, 호남에 한(恨)이 깊다지만 정확하게 그것은 한이 아니라 원(寃)이었다. 그 둘은 다르다. ‘한’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떤 운명적인 것(팔자)에 의해 나에게 내려진 아픔, 이를테면 고아나 과부가 되는 것과 같은 불행을 뜻하며, ‘원’이란 인간의 악의(惡意)가 할퀴고 간 상처들, 이를테면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이나 지주의 수탈로 인한 아픔을 뜻한다. 이것이 호남 문화의 유산이다. 전주비빔밥을 자랑하지만 국 한 그릇 떠놓을 형편만 되어도 밥을 비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남은 풍년에 배곯아 죽는 땅이었다. 여수·순천사건은 그러한 원통함의 한 고리이다.
   
   여수(麗水)는 1948년 기준 인구 15만5000명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좌익적 성향이 강했으나 남로당원의 수는 70~8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46년 5월 경찰서가 서기 이전까지는 치안대가 치안을 유지했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순천(順天)은 15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6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해군 병사였으며 2~3개월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 무렵 지방정부를 운영하면서 미 군정이 가장 신경 써야 했던 부분은 좌익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었다. 대구사태와 제주4·3사건으로 좌익에 대한 공포가 점차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 군정이 좌익의 섬멸을 구상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계제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朴珍景) 대령의 피살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방경비대의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국방경비대의 숙군(肅軍)과 14연대의 반란
   
   건국 초야에 맞이한 공산주의 발흥에 대해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당혹했다. 국방경비대 정보처장 백선엽(白善燁)은 남로당의 첩자들을 노출시키지 않고서는 군부를 정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용하면서도 대규모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여수의 제14연대를 가장 위험한 부대로 여기면서 그들이 지리산에 게릴라작전 지역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좌익에 대한 사찰은 제1연대(泰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연대장 이성가(李成佳) 소령은 부대 내에 침투하고 있는 좌익 인사를 색출하고자 김창룡(金昌龍) 소령을 정보주임으로 발탁했다. 김창룡은 함남 영흥 출신으로서 만주로 건너가 관동군 헌병대 대공 사찰 담당자로 활약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기의 우수생으로 졸업한 뒤 소령에 임관되었다. 그의 별명은 ‘스네이크 김(Snake Kim)’이었다.
   
   14연대는 여수읍 신월리(新月里)의 옛 일본 해군 비행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초대 연대장 이영순(李永純) 소령은 한 달 남짓 근무하다가 1948년 6월 18일자로 전출되고 제주도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金益烈) 소령이 부임하였으나 좌경 군인으로 의심받던 그도 곧 경질되어 7월 15일 오동기(吳東起) 소령이 부임했다. 오동기는 평소에 군장교의 부패를 개탄하면서 군대의 개혁을 외쳐 오던 터였다. 오동기는 부임하자마자 송호성(宋虎聲) 사령관이 독점하고 있던 군대 부식의 납품을 공개 입찰로 바꿔 부식의 질을 높이고 장교들에 편중되어 있던 부식비 배정을 모든 장병들에게 균등하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이렇게 하자 그동안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기존 상인과 장교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그에게 혁명의용군 음모라는 누명을 씌우는 빌미를 제공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366~367쪽)
   
   여기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승만 계열에서 이 사건을 김구(金九)를 거세하기 위한 작업으로 확산하려고 한 데 있었다. 최능진(崔能鎭) 외 2명에 관한 혁명의용군사건의 공판은 1949년 1월 2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사건의 연루자들은 최고 책임자 서세충(徐世忠), 정치 재정 책임자 최능진, 14연대 책임자 오동기, 경비대 책임자 김진섭(金鎭燮), 강원도 원주(原州) 동원 책임자 안종옥(安鍾玉), 춘천(春川) 동원 책임자 박규일(朴奎一) 등으로 발표되었다. 이들은 1947년 12월 하순부터 1948년 9월 22일까지 10회에 걸쳐 밀회를 가지면서 원주와 춘천 부대 병사 200명과 14연대의 응원을 얻어 서울로 진격하여 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했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49년 1월 23일)
   
   윤치영(尹致瑛) 내무부 장관의 보고에 따르면 “오동기는 한국 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자 남한 정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좌익 계열의 선동과 음모 아래 소련혁명기념일(11월 7일)을 계기로 행동을 전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국회속기록 1949년 10월 27일) 그러나 사실인즉 오동기가 이 사건에 직접 연루된 것은 아니었고 연루자 중의 몇몇이 입대할 때 오동기가 보증을 서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오동기를 연루시킨 것은 그가 광복군(光復軍) 출신으로 열렬한 김구 추종자였기 때문이다. 1948년 9월 28일에 송호성의 소환을 받고 서울로 올라온 오동기는 곧 구속되었다. 취조의 내용은 최능진과 관련하여 정부 전복과 반란 음모를 했으므로 사건의 주모자로서 내용과 배후를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동기 소령은 최능진을 한 번도 만나본 사실이 없다고 했다가 박일원(朴馹遠)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박일원은 광복 후 공산당 경기도당 청년부장과 박헌영(朴憲永)의 비서를 역임했으나 광복 후에 경찰에 투신하여 좌익의 탄압에 앞장섰다가 남로당 특수대원의 손에 죽었다. 노선을 바꾼 사람이 더 지독하다.
   
   오동기 소령이 구속되어 10년형을 언도받은 뒤 일본군 출신 박승훈(朴勝薰) 중령이 10월 7일자로 14연대장에 부임해 왔다. 연대장이 정부 전복의 혐의로 구속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14연대는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서 1대대가 제주도 토벌 작전에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10월 19일 20시에 여수항을 출항하라는 전문 지시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서 상륙용주정(LST)에 선적 작업을 시작하였다.
   
   
▲ 피카소의 1951년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

   사건의 전개
   
   10월 19일 오후 9시30분경이 되자 제14연대 내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연대 주임 상사였던 지창수(池昌洙)는 군대 내에 침투해 있던 좌익들과 함께 부대에서 제주도 출병을 위한 장교들의 환송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16명의 장교를 사살했다.(‘하우스만(Hauseman) 증언’·173쪽) 당시 14연대의 3개 대대에는 일제 무기 대신에 M-1 소총이 지급되어 있었는데 파견 명령을 받은 대대가 M-1소총과 자동기관총을 모두 거둬 제주도로 가려 했기 때문에 당초에 지창수 무리에는 무기가 없었다. 이들이 봉기할 당초에 추종한 무리는 4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반란 당시 지창수는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이들 악질 반동 경찰과 일본군을 타도해야 하며, 나아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에 반대한다”고 병사들을 선동했다. 오동기 연대장의 체포와 다가오는 숙군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좌익 군인들은 제주도 토벌 작전이라고 하는 마음 내키지 않는 명령에 불복하여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0일 오전 3시에 여수경찰서를 습격 점령한 반란군은 오전 5시가 되자 2000명 정도로 증가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장악한 후 그 세력을 순천 쪽으로 확대해 나아갔다. 이들에게는 제주도 토벌을 위해 미군의 M-1소총과 기관총, 박격포가 새로 지급된 직후였기 때문에 화력이 막강했다.(‘軍과 나’·백선엽·340쪽) 오전 9시30분부터 시작한 반란군과 군경의 교전이 오후 5시경에 끝나면서 순천경찰서는 완전히 반군에 점령당했다. 반란군은 10월 21일 오전 8시경에 유치된 죄수 20여명을 석방하여 경찰에서 노획한 무기를 그들에게 제공했다. 그들은 인민군을 편성하여 사령부를 경찰서에, 인민위원회를 민족청년단 사무소에, 인민재판소를 군청에 각각 설치하는 한편 각 공무원과 경찰 가족, 우익정당, 청년 단원 400명을 검거하여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그들 가운데 간부급은 총살형을 받았고 나머지 100여명은 23일 국군의 진주로 사형 집행 직전에 구출되었는데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의 총살형은 가장 처참했다.(세계일보 1948년 10월 28일)
   
   10월 21일 오후 3시에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우익 요인과 경찰관 가족을 살해하고 순천의 경찰서·군청·읍사무소·전기회사·은행 등 공공기관을 접수한 뒤 인민공화국 국기를 게양하고 간판을 내걸었으며 자칭 계엄령을 선포하여 순천재판소를 인민재판소로 개칭하여 재판을 시작했다.(국회속기록 1949년 10월 27일) 재판은 민간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경찰관, 관리, 지방의 우익 인사, CIC의 첩보원들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벌교에서는 한자리에서 67명이 처형되었다.(‘G-2 Weekly Summary’·29 October-5 November 1948)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사령관에게 넘겨준 작전은 ‘4F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후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뜻이었다.(‘하우스만 증언’·184쪽) 4F 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인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시키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梧洞島) 앞바다로 밀어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日本刀)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169, 213, 331쪽)
   
   초토화작전으로 여수·순천 반란은 종식되었지만 여수의 함락은 반란의 종식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무서운 보복과 살육이 전개되었다. 물 빠진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으며, 정체불명의 편지를 배달했다는 이유로 배달부가 처형되었다. 목포·해남·완도·진도에서는 양민들이 바다에 실려가 돌에 매달린 채 수장되었다.(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1)·165, 288, 229, 258쪽)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의 한 회원은 ‘호박잎 하나 건네준 죄’로 잡혀갔다.(‘順天市史(순천시사)’·818쪽) 종산(鍾山)국민학교에서는 125명을 처형하여 묻어버렸다.(이 학교는 지금의 여수중앙초등학교인데 앞서 이발사가 말한 바로 그 학교이다.) 문중 간의 해묵은 감정을 이유로 처형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여자들의 국부를 막대기로 쑤시기도 했다.(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289~323쪽) 나의 저서 미국어판이 출판될 당시 미국 측 편집자는 이 문장이 너무 야만적이어서 문명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라는 이유로 표현을 바꿀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나는 “They (policemen) violated women with sticks”라고 문장을 바꾸었다. 읽는 이의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군번이 260xxx로 시작되는 청년들도 처형되었는데 이는 14연대 병력의 군번이 260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인민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처형된 사람도 있지만 당시에 이념의 확신 때문에 인민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없으며 대부분이 구장을 맡는 심정으로 그 직책을 맡았다.
   
   보복은 이듬해에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보복살인 중에서도 보도연맹(保導聯盟)에 대한 살육이 가장 처절했다. 보도연맹은 반공 검사 오제도(吳制道)의 제안으로 1949년 4월 21일에 발의되어(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6월 5일에 결성된 것으로서, 초대 간사장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 조사부장이었던 박우천(朴友千)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을 조직하면서 여기에 가입하면 좌익으로서의 전과를 묻지 않고 애국적인 국민으로서 포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예비 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하기 이전에는 생업에 충실한 양민이 대부분이었다.
   
   
   해원(解寃)
   
   어느 날 내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구장이 보도연맹에 들라고 하는데 어쩔까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무렵 사람들은 보도연맹이라면 당연히 시국 강연을 하는 보도연맹(報道聯盟·reporting union)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자수한 공산주의자들을 회개하게 만들어 잘 보호하고 인도하는 모임’, 곧 보도연맹(保導聯盟)으로 안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기에 들어가면 비료표도 준다고 했다. 아버지는 별 뜻 없이 보도연맹에 들어가셨고 그날 이후로 사흘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며칠이 지나 밤중에 밖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내다보았더니 마당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놀라 나가 보니 아버지였다.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내가 울며불며 이웃 사람들을 불렀다. 어떤 아주머니는 ‘다야찡’이 좋다 하고 누구는 ‘구아노찡’이 좋다고 했지만 그런 약을 어디에서 구하는지도 몰랐다.(다야찡은 전시 부상병의 지혈제였고 구아노찡은 지사제(止瀉劑)였는데 워낙 위약(僞藥·placebo) 효과가 높아 감기와 골절에도 썼다.)
   
   그때 정씨 아저씨가 말했다. 옛날에 저렇게 고문을 당한 몸에는 오래 썩은 똥물이 좋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저씨와 함께 재래식 변소에 가 똥물을 퍼 용수로 걸러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는 깨어나셨다. 아버지는 그때 얻은 골병으로 평생 오만 삭신이 쑤시는 고통 속에 살다 돌아가셨다. 몸이 괴로울 때면 “그때 문광면 지서 주임 장(張)씨가 왜 나를 그렇게 팼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지서 주임은 쉬엄쉬엄 사흘 동안 패며 히죽거렸다고 한다. 그때 생각만 하면 목이 메고 앞이 뿌예진다. 국창(國唱) 박동진(朴東鎭) 선생도 묵은 똥물을 마시고 득음(得音)했다는 수기를 남겼다. 그래서 그분의 창을 들을 때면 아버지 생각이 더욱 절절하다. 그때 맺힌 원통함이 이제까지 내가 독하게 살아온 근력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억울한 일 겪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여수·순천사건을 다루면서 가장 거북스러운 대목이 바로 박정희(朴正熙) 연루설이다. 수사 과정에서 방첩대에 끌려온 많은 장교들 가운데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소속의 박정희 중위는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무기징역이라는 기록도 있다. 박정희는 신문 과정에서 이재복(李在福)·이중업(李重業)으로 이어온 한국군 내부의 적색 조직을 백선엽에게 진술했다. 그의 진술에 따라 ‘줄기에 딸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200명의 남로당원이 체포되었다.(‘실록 박정희’·중앙일보 1997년 11월 17일자) 이로써 그는 감형을 받아 6·25전쟁 때 석방되어 군대에 복귀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한림(李翰林) 회상록’(390쪽), ‘장도영(張都暎) 회고록’(신동아 1984년 7월호·133쪽), ‘김정렬(金貞烈) 회고록’(121쪽),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347쪽), ‘하우스만 증언’(34쪽), 이치업 회고록 ‘번개장군’(24쪽) 등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조선일보(1949년 2월 1일자)에도 보도된 바 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10쪽·2001)에서 박정희가 “공산주의를 찔러보는 유희(flirted with communism)에 빠진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치업은 박정희의 동기인 육사 2기생의 80%가 좌익이었다(95쪽)는 말과 함께 그 당시 군부의 좌경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기록했다. 이 문제는 미국의 정가에도 관심거리였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 9일, 미국 대리대사이며 쿠데타 전문가인 그린(Marshall Green)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박정희를 안심시켰다.(‘Korea’s Development under Park Chung Hee’·Kim Hyung-A·71, 360쪽) 이 문제는 흔히 오고가는 이야기인데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뒤에서 수군거리다가 말만 더 증폭시킬 일은 아닌 것 같다.
   
   
   공산주의자들의 사주
   
   당초에 여수·순천사건은 군부 안의 공산주의자들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국가 또는 정부의 전복을 도모한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의 남로당 잔여세력이 남도 끝자락에서 연대 병력으로 ‘공산 혁명’을 추진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민중의 참여와 그들에게 엄청난 아픔을 준 데 대하여 중대장 김지회(金智會)나 지창수는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후에 이현상(李鉉相)으로부터 “군사적 모험주의”라는 이름으로 심한 질책을 받았다. 이후로 국군 부대의 단위별 명칭에는 ‘4’ 자를 넣지 않는 전통이 세워졌다.
   
   여수·순천사건 이후로 한국은 엄혹한 우익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48년 12월에 공포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었다. 이 법에 따라서 군부에 광범위한 경찰권이 부여되었다. 안호상(安浩相) 문교부 장관은 취임 이후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전국 교원에 대한 사상 경향을 조사하여 전체 교원 가운데 10%인 5000여명을 교직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했다.(연합신문 1949년 1월 23일자) 이어서 3월 8일 서울운동장에서 서울 시내 10만 학도들의 호국단을 결성하여 학생 조직을 연대니 대대로 불렀다.(서울신문 1949년 3월 9일자)
   
   여수·순천에서 5400여명이 죽임을 당했는데(연합신문 1949년 6월 18일자) 그 가운데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설령 모두 빨갱이였다 하더라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어차피 겪어야 할 죽음이 일찍 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서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위에 씌운 너울이 억울하고 정의롭지 않았으며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정당하지 않았다. 원인만 강조하는 것은 결과를 호도하려 함이다.
   
   가해자와 희생자가 우익이었든 좌익이었든 그들에게는 합당한 진혼제가 필요하다. 이 사건은 격동기의 혼란이나 이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민족사의 비극이었으며, 언젠가는 해원(解寃)해야 할 과제이다. 이 사건은 전설도 아니고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소재도 아닌 엄연한 현실이며 잊기에는 아직도 그 모습이 내 눈에 선연하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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