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북한군 전력의 핵인 소련제 T34 탱크부대에 힘없이 무너져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앗겼다. ⓒphoto 조선일보
탱크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북한군 전력의 핵인 소련제 T34 탱크부대에 힘없이 무너져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앗겼다. ⓒphoto 조선일보

1985년, 유학을 떠나기에는 늦은 나이인 마흔세 살, 미국 워싱턴 근교 수틀랜드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황량한 벌판에 서서 나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어림하여 30억쪽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는 이곳에서 명색이 한국전쟁 문서를 찾고자 왔다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히도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설이 된 방선주(方善柱) 교수를 만나 도움을 받았으나 “나는 이곳에서 7년 동안 8만쪽의 자료를 복사했는데도 아직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 나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2개월이 지나서야 무슨 자료가 어디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귀국할 무렵에는 1만5000쪽의 1차 사료를 복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 한국현대사 연구의 거름이 되었다.

전쟁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역사의 재앙이었다. “전쟁은 부흥을 가져온다”는 스탠퍼드대학교 역사학자 모리스(Ian Morris)의 말은 너무 잔인하다.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요, 정치는 피 안 흘리는 전쟁일 뿐이다.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전쟁은 가장 멋진 게임이라고들 말하지만, 로마의 정치인 대카토(Cato the Elder)의 말처럼, 용맹한 것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거기에는 무고한 생명들이 권력자의 오판이나 허세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훈련되지 않고 비이성적인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보다 더 국가의 통치에 두려운 것은 없었다.

전쟁, 그 무모하고도 덧없는 참상

인간은 왜 전쟁을 일으키는가? 수많은 변명과 명분에도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떳떳하거나 선명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굳이 정리해 본다면, 자원의 결핍,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토 확장에 대한 욕심, 정치지도자의 공명심과 헛된 영웅심, 승리할 것만 같은 오판으로 말미암은 충동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은 위의 요소를 함께 갖춘 특이한 전쟁이었다. 전쟁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광기와 탐욕, 그리고 복수심 앞에 윤리나 도덕적 외침이나 이성의 호소력은 매우 낮았다. 그 참혹함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하다. 한국전쟁 당시에 어느 장교가 사병에게 “내가 만약 하느님이라면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너에게 무엇을 줄까?” 하고 물었더니 그 사병은 “내일(來日)을 주십시오(Gimmi tomorrow)”라고 대답한 데(S. Weintraub·‘MacArthur’s War’·p. xiii)에서 전쟁의 절박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한국전쟁은 개전의 이유와 개전 책임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이었다. 따라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의 관문서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남침설, 수정주의자들의 남침유도설, 그리고 재수정주의자들의 내전설 등 그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김일성은 왜 전쟁을 결심했는가? 김일성은 무엇을 의도했는가? 그리고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을 화두(話頭)로 삼아 1950년 6월의 상황을 되돌아보려는 데에 그 본뜻이 있다.

건국 초기인 1948년까지만 해도 “남한의 진보(좌익) 세력은 막강하며, 혁명적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김일성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은 패퇴한 일본 34군과 58군의 무기를 접수하여 무장하고 있었다. 중국혁명과 러시아 홍군에서 실전경험을 쌓고 귀국한 2개 사단 규모의 조선인 병력도 뿌듯해 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기간에 북한에 주재한 소련 군사 고문의 숫자는 중공에 주재한 소련 고문의 숫자보다 많았다.(Sergei N. Goncharov·‘Uncertain Partners’·133쪽) 젊은 나이에 최고 권좌에 오른 김일성은 좀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모두 딸 것만 같은 도박사의 자기최면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국가 기반 위에서 자기의 힘만으로 한반도를 공산화할 능력도 없던 그는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Stalin)과 한국전쟁을 협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오고간 논의는 주로 자신의 개전 의지를 스탈린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 김일성이 ‘먼저’ 전쟁 구상을 스탈린에게 피력했으나 스탈린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남침 계획을 들었을 때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했다. 남한의 공산화가 바람직한 것은 사실일지라도 소련은 미국과의 전쟁을 감수할 뜻이 없었다. 스탈린은 개전을 협의하는 단계에서 만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조선에서 미군이 물러난 지금 초전(初戰)에 승리하면 미국이 개입할 겨를이 없어 승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주장에 설득되었다. “미국은 그토록 작은 나라를 구출하고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판단도 소련의 결심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국공내전에서 국부군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그런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스탈린의 머뭇거림이 개전으로 바뀐 것은 1950년 2월 전후인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28일자로 스탈린에게 비행기·전차·탄약 등 전투 장비 51종, 공병 장비 43종, 통신 장비 42종과 기타 부품을 요청했고 소련이 이를 ‘부분적으로’ 응낙한 사실이 있지만(‘러시아 문서’(YS)·255~267쪽) 이는 개전을 결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어서 개전과 관련하여 큰 의미를 둘 것은 못 된다.

그 자리에서 또한 김일성은 박헌영(朴憲永)의 말 도움을 받아 개전의 첫 총성과 함께 남한에 있는 1500~2000명의 빨치산과 20만명의 지하당원이 봉기함으로써 남한이 즉시 붕괴하리라고 장담했다.(‘툰킨(Tunkin)이 비신스키(Vyshinsky)에게 보낸 암호전문’·1949년 9월 11일) 김일성은 지리산의 게릴라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여기까지 대화가 진전되자 스탈린은 중공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김일성의 의지를 지지했다. 스탈린으로서는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의 손으로 적을 이길 수 있는 방법(差刀殺人)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김일성의 전쟁 구상

내가 한국전쟁의 개전 초기에서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수수께끼는 김일성이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그 중요한 초전의 시각에 왜 남진하지 않고 서울에서 3일의 시간을 보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숨고르기(소련 군사고문 Stanikov)라느니, 한강 도강 장비의 부족(백선엽)이라느니, 상부 지시의 대기 때문(딘 러스크·Dean Rusk)이라느니 온갖 이론이 난무하지만, 본디의 작전에 수원 이남으로의 진격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김일성이 전면전을 획책했다면 서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승세를 몰아 남진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이렇다. “6월 28일 아침, 탱크 사단을 앞세운 인민군 제4사단이 서울에 입성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남침 계획은 사흘 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전 개념은 우리가 남한 전역을 장악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남한의 수도를 점령하면 남한 전체가 우리의 손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적의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세계의 전사(戰史)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우리는 20만 남로당 당원이 봉기하리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만약 이때 인민군이 쉬지 않고 진격을 계속했다면 6·25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유성철·‘나의 증언(10)’·한국일보 1990년 11월 13일)

유성철의 증언인즉 한국전쟁은 당초 ‘3일의 전쟁’이 ‘3년의 전쟁’이 된 것이다. 이것은 “3일 이내에 서울의 점령을 끝내고 낙엽 지기 전에 남한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러시아 문서’·서울신문사·KO-4D·2쪽)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개전 직전에 북한군 참모부가 4사단 참모장에게 내린 ‘정찰명령서 제1호’와 보병 4사단 이권무(李權武)의 이름으로 하달된 ‘작전명령서 제1호’에도 서울 이남의 작전이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산까지 쳐내려가는 전면적 장기전을 계획했다고 보기에는 북한군의 장비가 너무 허술했다. 6월 23일자로 인민군 657부대에 하달된 군장(軍裝) 명령에 따르면, 전투원은 1개 분대에 모포 1매, 3인에 식기 1개, 미숫가루를 주로 한 비상식량, 군화 1켤레, 세면도구, 예비 발싸개, 마초(馬草) 2일분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RG 242, SA2010 Item 1/52, WNRC) 이와 같은 경장비는 속전(速戰)을 의미하며 남한 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장비로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장마가 오기 전에 전쟁을 종식시켜야 하며, 장기전은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김일성으로서는 짧은 시일 안에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그 시간 안에는 남한 전역을 완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옹진·서울의 장악에 주력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작전 명칭은 ‘옹진작전’이었다.(‘러시아 문서’·외무부·21쪽)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인민군이 서울의 남쪽에 있는 수원(水原)의 장악을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산비행장을 장악함으로써 남한의 공군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 이외에 서울에 있던 정부 요인의 퇴로(退路)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서울을 점령한 2~3일 동안에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북한군으로 서울에 최초로 진주한 부대는 3사단 9연대로서 그 시각은 6월 27일 23시였다. 그리고 곧 이어서 4사단이 진주했다. 이들이 3일(27~29일) 동안에 서울에서 한 일은 “군인, 경찰, 그리고 민족 반역자를 색출하는 것이었다”(‘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32, 53쪽)는 것이 미국의 해석이다.

그러나 요인의 색출 작업은 미국 측의 설명처럼 ‘처단’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납치를 통해 남북 협상의 우위를 장악하려는 정치 공작이었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북한군은 6월 말에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48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하여 김용무(金用茂)·원세훈(元世勳)·백상규(白象圭)·장건상(張建相)·오세창(吳世昌)·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유동열(柳東說)·조완구(趙琬九)·안재홍(安在鴻) 등을 공산군의 영문(營門)으로 끌고 나가서 ‘항복식’을 거행하고 북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했으며 끝내 이들을 북한으로 이송했다.(‘김창숙문존 (金昌淑文存)’·62쪽)

전선의 구축에도 의문이 남는다. 곧 6월 25일에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을 돌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부 전선의 돌파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춘천 방면의 진격은 더디었다. 그 이유는 북한의 탱크 부대가 산악 지대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고 남한군 6사단의 저항이 결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27~28쪽) 그와는 달리 서울 공격에 주력 부대를 투입하다 보니 동부 전선 침공에 무게를 두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피란민.
한국전쟁 당시의 피란민.

왜 남한의 게릴라들은 호응하여 일어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의문이 제기되는 또 다른 부분은, 김일성이 진실로 남한 전역을 장악하려 했다면 남하하던 2사단과 7사단의 병력은 홍천에서 ‘서쪽을 우회전하여’ 수원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계속 ‘남쪽을 향하여’ 횡성·원주·제천·단양·영주를 거쳐 민중 봉기와 연고가 깊은 대구를 장악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시 북한군은 T34 탱크 242대, SU72㎜ 자주포 176대, 장갑차 54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남한군은 대전차 무기를 전혀 보유하지 않았고 전차공포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전차 부대로 신속하게 남진을 감행했었다면 그들은 쉽게 남한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딘 러스크·‘As I Saw It’·163쪽) 그러나 북한군 2사단과 7사단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한반도 전역을 무력으로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가 가능하리라고 오판했다. 그는 이승만(李承晩)이 항복할 줄로 알았다.

한국전쟁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제한전이었다는 나의 글이 발표되자(‘한국정치학회보’ 30/3·1996·163~182쪽) 김영호 교수(성신여자대학교)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1998·60~79쪽)에 나의 입장을 반박하는 장문의 글을 게재했다. 나의 글에 대해 김영호 교수가 제기한 반론의 핵심은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의 소산이었지 김일성의 결심 사항이 아니었으며, 김일성은 서울만을 점령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남한 전역을 공산화하려 했으므로 서울제한점령설은 김일성의 전쟁 책임에 면죄부를 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자세하고도 정중한 지적에 감사하지만, 사실의 규명은 정죄(定罪)에 앞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지 김일성을 비호할 뜻은 없었다. 김일성에 대한 면죄부의 문제를 말하자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개전 의지에 따른 전쟁이었다는 나의 논리보다는, 한국전쟁이야말로 거대한 미·소의 냉전 구도 속에서 김일성은 한낱 하수인(pawn)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리가 더 강하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남한 출신인 박헌영은 한국전쟁을 추동하면서 김일성보다 더 게릴라전의 효과를 과신하고 있었다. 그는 “남조선의 우리 조직은 800만명”(해방일보 1946년 5월 15일자)이라고 호언했다. 이것은 아마도 허장성세였을 것이다. 일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남한으로 내려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던 그의 정치적 욕망과 계산이 빚은 실언이었다. 김일성이 전적으로 그의 말을 믿고 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박헌영으로서는 언제인가 이러한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계산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1950년 12월에 부수상 겸 외무상(군사위원)인 박헌영에게 중장 계급 부여와 함께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임토록 했다.(강상호(姜尙昊)·‘내가 치른 북한 숙청’·중앙일보 1993년 3월 8일자)

그러나 남한에서 게릴라전의 호응이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하여 승리하리라던 김일성의 소망이나 박헌영의 계산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대구사건과 남로당의 와해, 제주 4·3사태와 여수·순천사건의 좌절은 그들로 하여금 유격전을 통한 승리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의 빨치산은 수적으로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서주석·‘한국의 국가 체제 형성 과정’·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1993·77쪽)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서는 가혹한 소탕 작전으로 말미암아 남로당 당원 90만명은 1948년 현재 24만명으로 감소되어 있었다. 이는 그들을 통한 승리의 가능성이 날로 낮아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게릴라의 성공 가능성이 낮을수록 내전이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남한에서의 게릴라전은 전술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수에 의한 테러 위주의 도시 게릴라가 아닌 전투 개념으로서의 유격전을 전개하려면, 연륙(連陸)한 퇴로가 있어야 하며, 강추위가 없어야 하며, 밀림이나 동굴과 같은 엄폐 수단이 있어야 하며, 생식(生食)으로 식사가 가능해야 하며, 주민의 호의적 동조가 있어야 하며, 핵무기와 같은 대형 살상 무기가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래식 무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지형지물은 이와 같은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의 기억 속에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공산게릴라들은 추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동네로 내려와 서성거리다가 잡힌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글이 가장 거세게 저항을 받은 것은 내가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이 개전한 6월 25일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책임을 확대하고자 전쟁의 이름도 ‘한국전쟁’에서 ‘6·25전쟁’으로 바꾼 우익들의 눈에는 개전 일자를 희석시킬 수도 있는 내전설로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것이 매우 위험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 만에 벌어지고 마친 사건이 아니라 3년 동안 지속된 전쟁을 개전 일자로 명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었다. 전쟁을 특정일자로 표기하는 것은 승전일을 표기할 때나 하는 일이다. 국제정치학이 주류를 이루고, 김일성의 악마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나의 논지가 우익의 강력한 공격에 노출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공산화를 위한 침략 전쟁”이라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 반론의 주류였다. 그러나 이미 1949년 5월의 하계 공세에서부터 남북의 교전이 시작되어 국지전에 돌입하고 있었다는 점을 나는 주목했다. 외세를 등에 업지 않은 내전은 없다는 점에서 국제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6월 25일 이전에 38도선을 둘러싼 크고 작은 교전은 수없이 있었다. 2000~3000명의 연대 병력에 의한 충돌도 있었으며, 이러한 충돌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남한에서만 10만명이 피살되었다.(J. Merrill·‘The Origins of the Korean War’·Current Review·December 1988·19쪽)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이 이토록 빈번했기 때문에 6월 25일 막상 북한의 남침 소식이 미국대사관에 전달되었을 때에도 미국은 그것을 사실로 믿지 않았으며, 서울 시민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고(김성칠(金聖七)·‘역사 앞에서’·1950년 6월 25일) 군부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남북한은 1950년 초에 옹진반도와 개성에서 이미 교전이 있었다. 남한의 군대가 북한을 공격하여, 38도선을 1㎞까지 침범한 적도 있었고, 이때 양춘 대대는 국방군을 격퇴하고 보복 조치로 남측 지역 1㎞ 안으로 진격해 들어와 있었다.(유성철·‘나의 증언’(8)·한국일보 1990년 11월 9일자)

전쟁의 책임

나는 한국전쟁의 확산 과정에서 국제적 요인이 깊이 개재된 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일본의 보호를 위한 교두보로 여기는 미국과 러일전쟁 이래 극동에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소련의 욕망이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을 확산시켰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수립된 신생국들이 경험했듯이 독립 이후에는 거의가 내전을 통해 씻김굿을 치렀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시작은 내전이었다. 그러던 차에 극동에서의 패권을 추구하던 남북한의 후견국인 미국이나 소련은 한국에서 전쟁을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타협으로 풀 수 없었던 해방정국의 정치적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김일성의 오판이 내전으로 폭발한 것이었으며, 거기에 국제적 요인이 작용하여 국제전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맬서스(Malthus)는 인구의 팽창이 기하급수적이라고 걱정했지만, 잔혹하게도 그 인구를 억제해준 것은 질병과 전쟁이었다. 한국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도 정확한 자료를 제시할 수 없지만, 어림잡아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는 110만명 정도이며 군인의 전사·실종자는 55만명 정도이다. 중공군의 사망·실종자는 13만명이며, 남한 민간인 피살자는 99만명으로 추산되며, 남한군의 전사·실종자는 16만2000명이다. 미군은 3만7423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그 가운데 200명은 장군의 아들이었다. 장군의 아들이 이렇게 많이 죽은 것은,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의 지도층이 먼저 나가 스스로를 조국 전선에 바쳐야 한다는 로마 이래 서구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서구의 전쟁사를 보면 귀족의 전사율이 사병의 전사율보다 높았다. 한국인 장군의 아들이 전사했다는 기록을 나는 보지 못했다. 미군 이외의 UN군은 4429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대략 298만명이 한국전쟁으로 죽었다. 그 가운데 한국인 사망자는 대략 280만명인데 당시 남북한의 총인구 약 2966만1000명(남한의 2018만9000명과 북한의 947만2000명) 가운데 9.5%가 죽은 셈이다. 나누어 말하자면 북한 인구의 18%가 죽었고, 남한 인구의 6%가 죽었다.(‘통계로 본 6·25전쟁’·국방부·2014)

김일성은 저세상에서 한국전쟁은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이루고자 함이었다고 자신의 처사를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합참의장 브래들리(O. Bradley)가 맥아더청문회(1953·732쪽)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만난, 잘못된 전쟁”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통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동족상잔을 일으킬 때 그 민족주의는 죄를 짓는다. 나도 젊어 한때는 가슴이 끓는 민족주의자였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민족주의적 열망은 국제 문제의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원인일 경우가 많았다.

요컨대 1950년 6월 25일의 남침은 분명히 김일성의 결심 사항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국가 건설의 초기 모순을 공산화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내전이었든, 적화 야욕이었든, 저들이 말하는 “해방 전쟁”이었든, 민족사적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무고한 죽음을 차치하더라도 통일을 적어도 60여년 이상 뒤로 물렸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가 없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2000년 전에 내전에 휘말렸던 로마의 황제 오토(Marcus Otho·32~69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내란에 따른 동족상잔은 조국에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그 길을 피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플루타크영웅전’·오토편 § 15)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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