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운 촛불시위 인파.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운 촛불시위 인파. ⓒphoto 뉴시스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지낸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부터 한국을 취재해왔다. 당시 도쿄 본사에서 서울발 기사를 다듬는 한국 데스크였다.

구로다 기자는 한·일 관계가 불거졌을 때 종종 반한(反韓) 발언으로 한국인의 분노를 사긴 하지만 한국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외국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실제로 신촌 대학가에서 30년간 거주하면서 한국 젊은이들의 성장사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해왔다. 그런 구로다 기자에게 ‘100만명’이 모였다는 11월 12일 촛불시위에 대한 인상을 묻자 이런 얘기를 했다.

“한국이 일본과는 무척 다르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일본 사람들은 평소 권력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 총리든 천황이든 일상에서 잊고 산다. 아마 민주주의가 일상에서 잘 작동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늘 최고 권력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잘못되면 다들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는 “한국은 광장 민주주의의 시험장 같다”고 했다.

구로다 기자가 강조한 한국의 광장 민주주의는 11월 12일 다시 한 번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4·19혁명과 6월 민주항쟁 때처럼 시민들은 권력에 분노하며 거리로 나섰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위임한 권력을 사인(私人)에게 함부로 넘겨준 대통령에게 화가 났다. 그런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려 고장난 권력을 정상화시키겠다는 의지를 광장에서 표출했다. 대통령의 비선실세가 주도한 ‘사설 권력’ 앞에서 공적 제도들이 무너져 내리자 시민들은 그 공적 제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광장에 몰려나와 촛불을 들었다.

11·12 촛불시위는 한국의 광장 민주주의가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11월 12일 오후 3시, 평소 노인들로 북적이던 종로3가 탑골공원 앞 대로는 중·고등학생들로 메워져 있었다. 학생들은 차도에 주저앉아 ‘전국 청소년 시국대회’를 열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왔다는 한 고등학생이 연단에 올랐다. “세월호 사건 때도 어른들은 공부만 하라고 했잖아요. 이제 나라가 침몰하는데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청소년들의 대열 앞줄에 ‘선생님, 이럴 때 화내라고 공부한 거죠?’라는 현수막이 놓여 있었다. 평소 시국토론을 즐기던 노인들은 길가에 우두커니 둘러서서 어른들이 뽑은 권력을 비판하는 아이들을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하지만 아이들이 차지한 광장은 30년 전 부모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와는 달리 비장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박근혜 하야’를 외치고 나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고 노래했다. 학예회에 나온 듯 남학생들이 앞에 나와 현란한 춤을 추자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어른들은 힙합과 민주주의의 어울림이 낯설다는 표정이었다.

힙합과 민주주의의 만남

중·고등학생들 뒤로 대학생들의 행렬이 광화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행렬을 이끄는 트럭에 마련된 연단에 차례로 올라가 정유라, 최순실, 박근혜를 비판했다. 광화문을 향한 ‘분노의 행진’에도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영국 록그룹 퀸의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와 빅뱅의 ‘뱅뱅뱅’ 같은 노래가 깔렸다. 각 대학과 대학 단과대학의 깃발이 무수히 펄럭였지만 대학생들의 숫자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생들 뒤로 길게 이어진 시민들의 행렬이 더 커 보였다.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은 장년 부부, 머리가 희끗한 중년 부부들이 대학생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서울 신림동에서 왔다는 한 50대 부부는 “대학생인 우리 딸애가 저 앞에 있다”며 “1987년 6월 민주항쟁 30년 만에 딸과 함께 거리로 나온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오후 4시, 촛불 문화제가 시작된 광화문광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가족과 함께 앉아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사회자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싸온 음식을 나눠 먹는 가족들도 있었다. 초등학생 자녀들과 햄버거를 나눠 먹던 한 30대 가장은 “아이들에게 민주주의가 뭔지 가르쳐주러 왔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외국인들은 뜻밖에 마주친 축제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한 백인 여성 관광객은 시위대가 들고 있던 태극기 깃발을 건네받아 흔들면서 세종대왕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여성은 “한국에 오길 잘했다”며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광경을 어디서 보느냐”고 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시위대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였다.

100만명이 모여 한목소리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광경은 한국을 잘 안다는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듯하다. 조선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 영국인 팀 알퍼씨는 “영국에서도 시위는 자주 있지만 한국처럼 1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똑같은 주장을 하는 시위는 보지 못했다”며 “100만명을 한꺼번에 불러낼 수 있는 이슈가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고 했다.

지난 11월 12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전국 청소년 시국대회’.
지난 11월 12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전국 청소년 시국대회’.

한국은 직접민주주의의 시험장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시민들은 이전보다 훨씬 똑똑해져 있었다. SNS 등을 통해 행동요령과 준비사항을 숙지하고 나왔고 광장에서 무엇을 요구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학 동창생들과 함께 이날 시위에 나왔다는 이영신(50)씨는 “카톡으로 필요한 정보를 다 공유했다. 노동단체는 어디에 모이고 일반 시민은 어디에 모이는지 다 알고 왔다. 준비물도 다 챙겼다”고 했다. 스마트폰은 시위대와 경찰 모두를 긴장시키는 감시자 역할도 했다. 이날 밤 늦게까지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한 경복궁역 일대에는 ‘LIVE’라는 글자가 번쩍이는 스마트폰들이 현장을 찍고 있었다. 시위 현장을 생중계하는 스마트폰들이었다. 이들 1인 방송 때문에 경찰이나 시위대 모두 거친 행동을 하기 힘들었다.

외국 언론도 주목한 이날의 평화시위는 시위 구성원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날 촛불 행사를 주관한 민노총 등 노동 시민단체들의 색깔을, 광장을 뒤덮은 시민들이 지워 버렸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 단위의 시위 참가자들은 시위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이날 문화제 무대에 선 염형철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집회에 앞서 가족과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와 평화적인 행진 제안이 쏟아졌고 우리는 그걸 실현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 단위의 시위 참가를 보장해달라는 ‘시위 인권’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는 폭력뿐 아니라 거친 말도 제지당하는 장면이 보였다. 이날 오후 서울시청 인근에서 한 남성이 “망측한 일을 벌인 여자 대통령의 행각이 병신년(丙申年)에 발각됐다”고 소리치자 “여성과 장애인들도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차별적인 말은 삼가주세요” 등 부적절한 발언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도 했다.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이 광장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는 ‘평형수’ 역할을 했다.

비폭력과 가족, 배려 등의 키워드가 떠오른 이날 시위는 쇠파이프와 물대포가 난무하는 이전의 시위 현장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참가자들 스스로가 달라진 시위 현장에 놀라는 눈치였다.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내내 문화제를 지켜보던 종로구 사직동 주민 정인학씨는 “시위가 과격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왔는데 놀랐다”며 “하지만 이런 시위 문화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광장을 울리는 노래도 달라져 있었다. 10~20대들이 알지 못하는 1980년대의 비장한 혁명 가요 대신 ‘하야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의 노래가 광장을 울렸다. 록그룹 크라잉넛이 무대에 올라 ‘말 달리자’를 부르자 광화문광장은 거대한 록페스티벌 현장처럼 보였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문화제를 지켜보던 한 노인은 기자에게 “저게 무슨 노래냐”고 물어봤다. 이 노인은 “70평생 데모를 숱하게 봐왔는데 오늘 같은 데모는 처음 본다”고 했다.

한번 달아오른 광장은 쉽게 식지 않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100만 촛불 시위’ 앞에서도 버티기로 나오면서 시민들은 대통령이 민심을 받아들일 때까지 광장으로 나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측은 26일을 ‘전국 집중투쟁일’로 정하고 대통령이 퇴진 입장을 표명할 때까지 매주 집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시위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오른쪽)와 우상호 원내대표.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시위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오른쪽)와 우상호 원내대표. ⓒphoto 뉴시스

광장 민주주의의 역설

사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광장에 많은 빚을 졌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헌법 1조2항은 광장에서 가장 절실하게 체감됐다. 군중들의 그런 공감과 연대감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씩 밀어올렸다. 4·19혁명과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모두 그런 공감과 연대의 장이었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사람들로 인해 민주주의가 빛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광장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온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에 따르면 “광장은 대의민주주의의 무덤”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광장에서 군중 집회와 시위가 발생하는 빈도는 그 나라의 대의민주주의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이용될 수 있다. 세계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수준 높게 실천되고 있는 민주국가들은 모두가 광장에서 군중 집회와 시위가 발생하는 빈도가 매우 낮은 나라들이다.” 양 교수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날 38개 보수단체와 함께 ‘법치 준수’ ‘국가 수호’ 등을 외치며 대통령 하야 반대 시위를 했다.

광장에 사람이 모여들수록 대의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정치인들의 부담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날 촛불시위를 지켜본 일부 정치인들은 실제 부담감을 토로했다. 더불어민주당 최명길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광화문을 떠나 돌아오면서 저 절망과 분노는 정녕 민주주의의 뿌리일 것이나, 대의민주주의가 설 자리는 남겨줄 것인가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시민이 내준 숙제를 담당해야 할 정당들이 덩달아 숙제를 내고 있다는 죄송스러움과 함께.’

광장에서 온갖 요구가 나오더라도 결국 해결은 제도 정치권에서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정치권은 광장의 요구를 수렴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사태를 촉발시킨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약속한 검찰 수사도 ‘서면 조사’ 운운하며 질질 끄는 모양새다. 이에 맞서 야당은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인화성 강한 광장의 힘을 빌리려 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차기주자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지난 1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선언을 할 때까지 국민과 전국적인 퇴진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제 민심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약관화해졌다. 광화문광장에서 쏟아진 ‘이게 나라냐’라는 국민의 통탄은 대통령의 하야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절망감의 표현”이라며 “대통령의 퇴진을 넘어 시대를 교체하고 나라의 근본을 확 바꾸라는 준엄한 명령이고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주권이 바로 서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자는 국민의 합의”라고 말했다.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들을 광장으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하고 있다. 광장이 거칠어지고 뭔가 불상사가 나기를 오히려 기다리는 것 같다.” 대통령이 2선 후퇴를 하지 않고 버티는 한 야당으로서는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이는 길밖에는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든 한국의 민주주의는 변곡점에 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30년 전의 6월 민주항쟁이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87년 체제’로 수렴됐듯이 이번 촛불시위 역시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이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불쑥 꺼내든 개헌이 ‘정치적 꼼수’라며 동력을 상실했다가 다시 정국의 해법으로 탄력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헌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단축해 명예 퇴진의 길을 열어주고 새 정부는 7공화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정치학회장인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100만 촛불시위는 단순한 대통령 퇴진이 아닌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 변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광장 민주주의를 다시 제도권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단계”라고 말했다.

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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