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한 축이었던 헌법재판소가 12년 만에 다시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한다.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30여년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한 축이었던 헌법재판소가 12년 만에 다시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한다.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지난 12월 20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북촌로의 저녁 풍경은 대체로 여느 때와 같았다. 백반집의 유리창 너머로 손님들의 모습이 어른댔고, 한복 차림으로 경복궁 관람을 끝낸 앳된 얼굴의 여성들이 어디론가 걸음을 재촉했다. 저편에는 현대그룹 계동사옥이 불을 밝히고 서 있다. 아귀찜, 해물탕 등을 파는 식당이 옹기종기 몰려 있는 골목에선 직장인들이 옷깃을 여미며 식당 문을 열어젖혔다.

약간의 예외라면 헌법재판소(이하 헌재) 주변을 지키는 경찰들이었다. 정문 앞엔 열 명의 경찰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거리의 평온한 분위기 때문인지 오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그들의 눈길은 그리 날카롭지 않았다. 교대 근무를 기다리는 의경 네댓 명이 헌재 옆 편의점에 몰려가 초콜릿과 삶은 달걀을 샀다. 정문 주위가 잠깐 붐비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헌법연구관 한 무리가 경찰들 옆을 지나 헌재 청사로 향했다. 청사 2층과 3층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재판관과 연구관의 집무실이 자리한 층이다. 12년 만에 다시 한국 대통령의 운명이 갈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과 이정미·김이수·이진성·김창종·안창호·강일원·서기석·조용호 등 총 9명의 재판관과 74명의 헌법연구관들이 탄핵심판을 준비 중이다.

헌재는 1988년에 탄생했다. 1987년 이뤄진 9차 개헌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당시 개헌 논의 과정을 보면 헌재가 상당히 우연한 계기로 탄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개헌에 참여한 누구도 헌재가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로 중요한 기관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헌법재판소라는 명칭이 최초로 법률에 등장한 것은 1960년이다. 그해 4·19혁명이 일어났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헌정 사상 가장 짧은 기간(9개월) 존재했던 정권이다. 이 기간 만들어진 제2공화국 헌법은 헌재의 설치를 규정했지만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이 단명하며 설치조차 되지 못한 채 사문화됐다. 1962년 등장한 제3공화국 헌법은 헌법재판소 자체를 없앴다. 위헌법률심사와 위헌정당해산심판은 법원이 하게 하고, 탄핵심판권은 별도로 만든 탄핵심판위원회라는 조직에 맡겼다. 탄핵심판위원회는 대법원장이 위원장 자리에 앉고 대법원 판사 3인과 국회의원 5인이 참여하는 조직이었다.

1972년 7차 개헌이 단행됐다. 제4공화국 헌법, 소위 유신헌법 아래 헌법위원회가 탄생했다. 헌재의 원형이 바로 헌법위원회다. 구성 방식과 권한 등이 유사하다. 헌법위원회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3인은 대법원장이 지명하고, 다른 3인은 국회가 선출하도록 했다. 나머지 3인은 대통령이 지명한다.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을 담당했다. 이 시기는 헌법 재판의 암흑기였다. 16년간 단 한 건의 위헌법률 심판도 열리지 않았다.

1987년 8월 한 달간 진행된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8인 정치회담의 결과로 현재의 헌법이 탄생했다. ⓒphoto 조선일보
1987년 8월 한 달간 진행된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8인 정치회담의 결과로 현재의 헌법이 탄생했다. ⓒphoto 조선일보

한 달 만에 완성된 9차 개헌안

30년 가까이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최후의 울타리 역할을 해온 1987년 헌법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참여했던 몇몇 인사들의 회고와 헌법학자들의 논문에 일부 소개돼 있을 뿐이다. 당시 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장과 민주정의당 헌법특위 간사를 맡았던 현경대 전 의원이 2008년 국회보에 실은 글에 비교적 상세히 그 과정이 나와 있다. 9차 개헌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입법 취지를 통해 2016년 현재 헌법의 역할과 한계를 알 수 있어서다.

현씨의 회고를 보면, 개헌안이 한 달 만에 완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7년 7월 31일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8인 정치회담이 시작됐다. 민정당에서는 권익현·윤길중·최영철·이한동 의원이, 야당에서는 이중재·박용만·김동영·이용희 의원이 협상 대표로 나섰다. 한 달 후인 8월 31일, 부칙을 제외한 110여개의 쟁점에 합의가 이뤄졌다. 그나마 한 달의 논의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이 대통령 임기를 결정하는 데 쓰였다. 헌재 설치 여부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던 헌법위원회를 폐지하고 위헌법률심사권과 위헌정당해산심사권을 대법원으로 돌려주려 했으나 예상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대법원의 저항이었다. 헌법사를 연구한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설명이다.

“1971년 국가배상법에 대한 위헌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국가배상법에는 공무원이 순직할 경우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데, 군인은 예외로 두고 있었어요. 이에 대해 대법원이 위헌이라 판결했는데 이는 이른바 ‘사법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판결에 참여한 대법원 판사 9명 전원이 재임용에서 탈락했지요. 9차 개헌 당시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권을 되돌려받는 걸 거부한 배경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본다. 민정당은 헌재 설치를 당론으로 정했다. 야3당은 반대했다. 협상의 물꼬를 튼 건 이중재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당시 8인회담의 통일민주당 대표였던 이 의원이 협상 중 휴식시간에 현 의원에게 다가왔다. 질문을 던졌다. “야당 정치인이 불법으로 남산에 연행됐을 때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현경대 의원이 답했다.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는데 다른 구제수단이 없을 경우 이용되는 권리구제제도로 독일 헌법에 있는 헌법소원제도가 있습니다.” 현 의원은 서울대 법대와 검사 출신이다. 다음날 이 의원은 “헌법소원제도를 받아준다면 대법원장을 법관추천회의가 아닌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민정당은 제안을 수락했다. 대법원장 지명권과 헌법소원제도를 맞바꾼 셈이다. 자연스럽게 헌재 설치가 결정됐다.

헌재의 설치 여부도 단기간에 정해진 판에, 탄핵 규정이 상세하게 논의되긴 일단 물리적으로도 힘들었다. 개헌의 당사자들 자체도 ‘설마 탄핵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합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상력으로는 여소야대 정국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재적의원의 3분의 2는 개헌도 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당시 개헌안에 참여한 인사가 훗날 사석에서 ‘그런 일(탄핵안 통과)이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생각했다’고 말한 일도 있어요.”

2004년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판결이 나오던 날 헌재 정문 앞 풍경. ⓒphoto 최순호 조선일보 기자
2004년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판결이 나오던 날 헌재 정문 앞 풍경. ⓒphoto 최순호 조선일보 기자

대통령 탄핵은 사법적 결정인가

그러니 논란이 되는 규정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권한중지’ 조항이다. 헌법 65조3항은 ‘탄핵심판이 있을 때까지 그 권한행사가 정지된다’고 정했다. 현 탄핵 조항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탄핵재판소법(1950년 제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탄핵소추의결이 있더라도 탄핵대상 공직자의 권한행사를 곧바로 정지하지 않고, 탄핵재판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에 권한행사를 정지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1961년 개헌 때에 탄핵소추 의결이 있으면 자동으로 권한행사가 정지되도록 했다. 당시 왜 법을 바꿨는지는 법학자들 사이에도 알려져 있지 않다. 개헌 시점이 장기집권을 연장하려던 이승만 정권이 시위로 물러난 직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통령 직위에 제동장치를 두려던 시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권한의 자동정지는 전 세계를 살펴봐도 거의 한국에만 있는 규정이다. 핀란드 헌법에 비슷한 예가 있긴 하다. 우리와 유사한 탄핵심판제도를 갖춘 독일의 경우는, 필요한 경우 연방헌법재판소가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국정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미국의 경우는 하원이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켜도 상원의 결정 전까지 대통령 권한에 아무 변화가 없도록 했다.

비슷한 판례로 ‘이광재 강원도 지사 직무정지 사건’이 있다. 이씨는 2010년 지사 당선 직후 박연차 게이트 재판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직무가 바로 정지되었는데, 이씨 측은 ‘형이 확정되기 전에 선고만 되더라도 직무를 정지하도록 한 지방자치법은 무죄추정원칙에 반하는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해당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이씨는 지사직에 복귀했다. 당시에도 법조계에는 대통령 탄핵과 비교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헌재가 실질적으로 탄핵의 최종 결정권자 역할을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의결한 안을, 선출되지 않은 기관인 헌재가 심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을 둘러싸고 ‘헌재는 탄핵의결서가 법적 요건을 갖췄는지만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의 핵심 논거다. 이에 대해선 정치학자와 법학자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임 교수의 말이다.

“탄핵이라는 것은 국회의 정치적 결정입니다. 사법적인 판단에 맡길 게 아니에요. 탄핵제도 자체는 미국 헌법에서 가져온 건데, 미국 헌법은 탄핵의 목적을 두고 대통령직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에 준 권한이라고 규정했어요. 미국은 하원이 탄핵소추 역할을 하고 상원이 탄핵심판을 하지요. 이 정신에 맞춘다면 헌재는 좁은 범위에서만 기능해야 해요. 국회의 탄핵소추에 절차상 하자가 없는지 정도만 따져봐야 한다는 겁니다.”

법학자인 차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우리나라의 탄핵제도는 미국과 다릅니다. 미국의 대통령 탄핵 과정이 정치적 절차라면, 우리나라는 사법적 제도입니다. 소추기관과 판단기관을 분리해 놓았잖아요.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면 법원이 판단을 합니다. 이때 법원은 형식적인 판단만 해야 하나요? 탄핵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 탄핵대상자가 파면당할 정도로 중대한 위반을 했는지 헌재가 따져 봐야 합니다. 게다가 국회에서 탄핵되는 과정에서 소추대상자가 변론을 하지 못하잖아요. 헌재로 넘어가면 변론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공정한 재판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미국과 한국, 양국의 대통령 탄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김창준 전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은 “어느 나라의 제도가 옳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할 순 없다”고 말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저도 찬성표를 던졌어요. 하원의원의 경우 절대적으로 지역구 여론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지역구에서도 ‘클린턴을 자르라’고 난리였어요. 기명으로 투표를 하니 다른 결정은 생각도 못 했지요. 한국은 상원 대신 헌재가 결정하는 시스템이지요. 각자 다른 방법으로 민주정치를 발전시키는 것뿐입니다.”

헌재 결정을 지켜보는 건 국내만이 아니다. 국제 법조계, 특히 헌재가 있는 국가들이 이번 재판에 주목하고 있다. 국제 법조계에서 한국 헌재의 위상은 꽤 높다. 국제 헌법 포럼에 가면 한국 대표에게 의견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국은 전 세계 헌법재판소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베니스위원회의 정회원국이다. 최근엔 서울에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 상설사무국을 두기로 했다.

헌법 연구관 출신인 이명웅 변호사는 “헌재의 위상이 높은 건 헌법소원제도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제회의에 나가면 우리나라 헌재만큼 할 말이 많은 나라도 없습니다. 권위적인 시대를 거치며 특히 인권 분야에서 위헌법률 판결이 많았잖아요. 한국 헌재의 역사가 곧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시카고대 법대의 톰 진스버그 교수는 ‘신생 민주주의에서의 헌법재판’이라는 책을 쓰면서 아예 한국에 와서 취재를 하고 갔어요. 책에도 가장 큰 비중으로 한국을 소개했고요.”

과거와 비교하면 헌재의 위상도 현저히 상승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6년, 청와대 신년인사회에 윤영철 당시 헌재소장이 불참한 적이 있다. 국무총리보다 의전 서열이 낮은 데에 대한 항의였다. 이후 헌재소장의 서열은 대통령(1위), 국회의장(2위), 대법원장(3위) 바로 아래인 4위로 굳어졌다. 헌재소장의 월급은 대법원장(1059만4700원)과 같다.

헌재의 위상이 올라가며 한때 대법원과 ‘대결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2012년 ‘GS칼텍스 과세’ 논란이 그 예다. GS칼텍스가 예전 세법을 근거로 한 법원의 과세 결정에 불복해 헌재에 헌법소원을 냈고, 헌재는 이를 받아들였다. GS칼텍스는 이를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다시 대법원은 GS칼텍스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GS칼텍스는 다시 헌재에 헌법소원을 냈다. 일종의 핑퐁 재판이었다. 두 기관의 힘겨루기는 인사권을 두고 이어지고 있다. 현재 헌재 재판관 9인 중 3인을 대법원장이 지명한다. 한국처럼 헌재가 있는 독일의 경우엔 의회에 재판관 선출위원회를 별도로 설치해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헌재 재판관이 될 수 있도록 정했다. 국회가 헌재 재판관 전원을 지명하는 셈이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헌법이 한국 민주주의를 이끌었다면, 이제는 법이 현실을 채 못 따라가게 되었다”며 “무기명 투표 규정 등 탄핵 조항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내년이면 ‘87년 헌법’이 서른 살을 맞는다. 이상적인 정치제도가 없듯, 이상적인 법률도 있을 수 없다. 분명한 건 5년도 안 돼 개정되기 일쑤, 단명의 아이콘이었던 대한민국 헌법이 30년을 버티며 한국 민주주의의 한 축으로 기능해왔다는 점이다. 그 정신을 어떻게 이어가면 좋을지 헌재는 다시 한번 고민 중이다.

헌법소원 누가 내나

1명이 5년간 966건 헌법소원… 3명이 28% 차지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헌법재판소가 접수한 헌법소원심판은 총 8409건이다. 이 중 28%를 차지하는 2371건을 다수접수자 3인이 제기했다. ‘남소(濫訴)’다. 새누리당 송석준 의원(이천)실이 입수한 자료를 보면, 특히 서모씨의 활약이 눈부시다. 지난 5년간 966건의 헌법소원을 냈다. 올해 상반기에도 136건의 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의 심판비용은 국가가 부담한다. 심지어 이들은 국선대리인도 신청한다. 받아들여지는 확률이 낮긴 하지만 사법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헌법소원 절차는 이렇다. 소원이 접수되면 3인의 지정재판부가 사전심사를 한다. 요건을 충족한다고 판단하면 전원재판부로 넘긴다. 이 과정에서 남소가 걸러진다.

다수접수자 3인은 주로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 걸까. 헌재 측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습관적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한다”고 답했다. 대통령이 사면을 해도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내고, 방송에서 누가 한마디를 하면 또 헌법소원을 내는 식이다. 이들은 헌법소원 절차 및 청구서 작성에도 능숙하다.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헌재로 온 것은 아니다. 경찰서 민원에서 시작해 법정투쟁을 거치며 체급을 키워 헌재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잦다. 관청 등 공공기관에서 접한 특정 공무원을 직무유기로 고소하고, 판결에서 지면 재심을 청구하며 점점 상급법원으로 올라가는 것이 전형적인 예다. 이명웅 변호사는 “검찰 시보 시절 만났던 고소인을 10년이 지난 후 헌재에서 다시 만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헌재엔 남소를 방지하기 위한 과태료 규정이 있지만 한 번도 발동한 적은 없다.

송 의원은 “국민의 권리구제를 위해 도입된 헌법소원이 특정인들에 의해 남용되어 재판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비효율성을 초래하여 일반 다수의 국민이 적기에 권리구제를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며 “헌법재판소법 제37조 제2항과 제3항에서 공탁금을 통한 남소를 막기 위한 규범적 근거가 있는 만큼, 공탁금제도 등을 실질화하여 남소를 막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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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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