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후보가 말하는 적폐(積弊)청산, 국가 대개조는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을 겨냥한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무너진 시스템과 특권적 구조를 바로잡겠다는 것입니다. 문 후보의 정치인식은 여의도식 고정관념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보편적 상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난 양정철(53)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의 선거구호인 ‘적폐청산’과 ‘국가대개조’에 담긴 진의(眞意)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수 언론에서는 문 후보의 ‘캐치 프레이즈’가 적의(敵意)를 담은 편 가르기라고 의심하고 있다. 양 전 비서관은 이런 시각을 바로잡고 싶어했다. “정권교체의 열망은 문 후보가 잘해서 된 게 아니다. 헌정사 최초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국민의 공분과 문제의식에서 촉발됐다. 혁명이나 누굴 타깃으로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것이다.”

양정철 전 비서관은 문재인 대선캠프(이하 더문캠) 비서실 부실장이다. 정치권에서는 그를 캠프 ‘부실장’이라는 직함보다 문 후보의 ‘최측근’으로 분류한다. 민주당 내 다른 대선캠프와 타 정당에서는 그를 문 후보의 ‘비선(秘線)’ 중 한 명으로 지목한 바 있다. 양 부실장은 그러나 “나는 비선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비선 논란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유령 같은 공격논리다. 2012년 대선 때 당내 경선을 치르는 동안 비선·패권 등으로 공격받았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 후보를 돕던 이호철·전해철 등 9명의 인사가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캠프 내 공식직함을 내려놨다. 문 후보가 당 대표를 맡았을 때도 비선 운운하며 당 일각에서 문 후보를 흔들었다. 지난 총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 후보는 패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 비선이라는 프레임을 계속 덧씌우고 있다.”

양 부실장은 문재인 후보가 ‘양비’(양 비서관) ‘양교수’라고 부르며 하대(下待)하는 참모다. 문 후보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나이 차가 있더라도 존칭을 생략하는 경우가 드물다. 양 부실장은 지난해 6월 문 후보가 네팔 히말라야 트래킹을 떠날 때 동행하기도 했다. 그는 하루 300~400통의 문자를 받는다. 중앙 언론사 간부조차 그와 약속 잡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양 실장은 ‘최측근’이라는 수식어에 민감했다. 그는 “나는 문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계실 때나 정치에서 물러나 있을 때 소소한 일을 밖에서 돕는 집사 같은 역할을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 비선이나 패권이 계속 거론되는 이유는 뭔가. “비선이나 패권을 거론하는 배경에는 문 후보를 비하하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마치 누군가 써주는 걸 읽거나 조종당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것 같다. 문 후보는 정치적 메시지가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무적 판단력도 뛰어난 분이다.”

이런 논란을 의식한 탓일까. 양 부실장은 문 후보의 두터운 신뢰에도 불구하고 캠프 내 직함은 비서실 부실장이다. 그보다 나이가 두 살 적은 임종석 전 의원이 비서실장으로 있다. 더문캠 비서실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 ‘일정’ ‘수행’ 등을 담당한다. 양 부실장은 “캠프는 절차와 시스템으로 움직인다”면서 시스템을 강조했다.

- 문 후보의 신뢰를 받게 된 계기는 뭐라고 보나. “그분 천성이 사람을 먼저 버리는 분이 아니다. 나를 신뢰하고 총애한다기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며 편안하고 익숙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 부실장과 문 후보의 인연은 2002년 시작됐다. 당시 노무현 대선캠프에 합류한 양 부실장은 부산 선대위를 이끌던 문 후보를 알게 됐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5년 내내 근무한 양 부실장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 등을 거친 문 후보와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청와대 비서실장과 비서관이라는 공식적 관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 언제부터 문 후보와 가까워졌나.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시고, 나도 봉하로 내려갔다. 노 대통령을 옆에서 모시면서 문 후보를 뵐 기회가 많았다. 노 대통령이 서거하신 뒤 2009년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을 맡았는데, 그때 문 후보를 재단 이사장으로 모셨다. 재단을 그만두고 자연인으로 있을 때(2011년)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정권교체의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나와 주변 분들은 문 후보에게 그 역할을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 문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했다. “그래서 문 후보 본인과 그분을 설득하는 인사들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문 후보는 정치에 뜻이 없었다. 그런 그를 정치권에, 그것도 대선후보로 나서도록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처음 정치를 권유했을 때 그야말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회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서전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신 노 대통령을 기억하기 위해 책을 쓰자고 제안했다. 문 후보는 책을 내는 것도 완강히 거부했지만 노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책무감으로 결국 수락했다.”

- 그게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인데. “대박이 났다.(2011년 6월) 그래서 북콘서트를 열어 독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자고 말씀 드렸다. 그것도 싫다하시는 걸, 서울에서만 한 번 하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북콘서트를 하자고 전국에서 요청이 들어와 지방에서도 열 수밖에 없게 됐다. 차츰 언론과 시민의 주목을 받았고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문 후보가 (정치에서)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등 떠밀려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시대적 의무감 때문에 준비가 부족했지만 대선에 나섰다.”

양 부실장은 문 후보가 대선에 나서달라고 등을 떠민 핵심 참모 중 한 명이다. 그가 기획한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은 결국 대선후보 문재인을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이후 지난해 총선 때 승리를 견인한 김종인 전 대표를 당으로 모셔올 때도 양 부실장이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모든 게 양 실장 혼자만의 기획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1년 ‘문재인의 운명’ 북콘서트 현장에 참석한 문 후보와 양정철 부실장. ⓒphoto 뉴시스
2011년 ‘문재인의 운명’ 북콘서트 현장에 참석한 문 후보와 양정철 부실장. ⓒphoto 뉴시스

- 이번이 대선 ‘재수’를 하는 셈인데, 과거와 달라진 점은 뭐라고 보나 “와신상담, 절치부심…. 2012년 대선 때와 달리 지금 문 후보는 그야말로 준비된 대선후보다. 대한민국은 그때보다 훨씬 심각한 이른바 ‘정치적 IMF’에 처해 있다. 무너진 민주시스템을 바로 세우고 보편적 시장가치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튼튼한 안보를 책임지겠다는 비장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대선에 임하고 있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해준 호남 분들에게 한없이 죄송하고 한스럽게 생각하고 계신다.”

- 문 후보의 정치 리더십을 설명한다면. “거버넌스형 리더십이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차이는 있지만 나름의 카리스마로 통치해온 분들이다. 이제는 1인 카리스마로 국정을 이끄는 시대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협치와 협업, 공정과 존중의 마인드를 품은 문 후보가 지금 시대에 가장 부합하는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

- 안희정 지사가 말하는 대연정 또는 협치와는 무엇이 다른가. “안 지사는 정치적 가치로서 대연정을 말한다. 어떤 세력과도 함께 의회를 이끌어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반면 문 후보는 협치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국민이 바라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경선에서 문 후보가 승리한다면, 통합적 기조를 강화해나갈 것으로 예상한다. 문 후보는 경제민생 이슈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 보수 진영을 끌어안아야 정권을 잡더라도 국정을 안정되게 이끌 수 있는 것 아닌가. “조금 더 개혁적·민주적·시장적 방향으로 국가가 재정비되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정쟁을 일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어렵다? 돌파하는 게 청와대와 집권당의 숙명이다.”

- 김종인 전 대표가 문 후보를 비판하는 까닭은 뭐라고 보나. “두 분이 경험해온 정치문화와 정서 차이가 원인인 것 같다. 김 전 대표가 비례대표 2번을 받을 때 그리고 당 대표직을 계속 맡을지를 두고 당내에서 이견이 있었다. 김 전 대표는 그 과정에서 문 후보가 이런 분위기를 제어하지 않고 망신당하게 했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당시 문 후보는 대표직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줄곧 패권 프레임에 갇혀 당내에서 입김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인식의 차이가 커 (감정을) 풀기 어려웠다. 아픈 대목이다.”

- 지근거리에서 본 문 후보의 단점은 뭐라고 보나. “요즘도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받으면 일일이 응대한다. 정치적 동지라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단호할 필요가 있다. 문 후보가 지금보다는 매몰찼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다.”

- 문 후보 부인 김정숙씨는 어떻게 내조하고 있나. “내조가 아니라 외조에 가깝다. 문 후보가 만나지 못한 분들을 대신 만나는 등 별도 일정으로 움직인다. 캠프에는 전혀 관여하는 바 없다.”

양 부실장은 가난을 극복하고 성장한 문 후보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생생하게 들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나는 한때 세상에 대해 분노했고 학생운동도 했다. 그런데 문 후보는 어려운 가운데 성장했음에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분이었다.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막노동을 한 아버지, 청소부를 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로서는 세상을 다시 봐야겠다고 느꼈다.”

- 노무현 정권의 ‘강성’ 비서관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악역이라면 악역일 수 있다. 당시에는 누군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기존 정권의 폐단을 모두 거부했기 때문에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노 대통령은 말과 글로 국민과 소통하고 여론을 등에 업고 가야 했다. 정치권이나 언론으로부터 과도한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 본인이 감당할 게 있고 참모들이 방어나 해명, 때론 공격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후회는 없다.”

- 캠프에서 지금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렇지 않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의 활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언론과 불필요한 긴장관계는 없어야 한다. 의회와 정당과도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당청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민주적 틀 안에서 권력기관도 잘 운용할 수 있다고 본다.”

문 후보 측 한 인사는 양 부실장에 대해 ‘글 잘 쓰는 잡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과거의 거친 언행을 쏟아내던 시절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양 부실장은 한국외국어대 재학 시절 학보사에서 일했다. 운동권에도 가담해 한국외대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 위원장을 맡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88년부터 언론노보에서 7년간 기자로 일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에 들어가려다 ‘자민투 경력’이 문제가 돼 실패했다. 이후 나산실업, 한보, 신원 등의 기업에서 홍보업무를 담당했다. 스카이라이프에 임원급으로 재직하다 2001년 해고됐다. 2003년 복직 소송에서 이겨 밀린 월급을 받아냈다. 당시 그는 노무현 청와대의 비서관이었다.

- 유진룡 당시 문화부 차관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배 째 드릴까요?” 발언의 진실은 뭔가. “100% 허위사실이다. 당시 소송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말려 그렇게 못했다. 두고두고 후회한다.”

- 정치를 할 계획이 있나. “전혀 없다. 내게 맞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누가 밀어준다 해도 출마할 생각이 없다.”

양 부실장은 19대 총선 때 서울 중랑을 지역에 출마했지만 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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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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