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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호]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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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단독 52년 만에 공개된 김일성의 고백

“1956년 조봉암 대선 자금 지원했다”…봉인 풀린 구소련 극비문서

▲ 1968년 9월 12~13일 김일성 당시 조선노동당총비서 겸 내각 수상과 방북한 드미트리 폴랸스키 소련 내각 부의장과의 대화를 기록한 구소련 외교문건.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북한 김일성 주석이 남한 대선에 개입했다고 실토한 구(舊)소련 외교문서가 발견됐다. 1968년 9월 당시 조선노동당 총비서이자 내각 수상이었던 김일성이 북한을 방문한 드미트리 폴랸스키(1917~2001) 소련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각료회의) 부의장에게 1956년 남한 대선에 개입했다고 밝힌 문서다. 이 문서는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 때 자유당 후보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출마한 무소속 조봉암 후보가 북측에 조언을 요청했고, 이를 전달받은 북한이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 진보당 설립과 조봉암 후보를 지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김일성 발언이 기록된 구소련 외교문서의 해당 기록은 1968년 북한을 찾은 폴랸스키 소련 내각 부의장이 김일성에게 남한의 정세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에 김일성은 “우리 당(조선노동당)의 남조선에 대한 노선은 혁명세력 준비 겸 사회민주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쪽에 있는 우리 사람들에게 총선에 우리와 관계 있는 정당은 자기 후보자들을 출마시키지만 어떤 높은 직위를 얻도록 노력하지 말라고 했다. 1958년에 우리는 이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이 있었다. 한 정당의 나쁜 영도 탓에 우리는 큰 상실을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겠다”는 말로 조봉암과 진보당에 관한 비화를 풀어놓는다.
   
   기록의 요지는 북한이 남한에 ‘진보당’이란 소위 ‘합법 정당’의 설립을 지원했고 1956년 남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 후보 측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언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1958년 소위 ‘진보당 사건’으로 진보당이 와해되고, 당수였던 조봉암이 이듬해인 1959년 처형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김일성이 폴랸스키 앞에서 털어놓은 회고다. 김일성은 “그(조봉암)는 우리에게 해당 임무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조선노동당) 정치국에서 이 편지를 토론했고, 다른 동지들을 통하여 그(조봉암)에게 연결체가 될 수 있는 합법 정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고 폴랸스키에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조봉암이 북측에 대선 출마 여부를 타진했다는 대목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 대선에 출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조봉암)는 우리의 조언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조봉암)가 이승만 정권의 장관(농림부 장관)이라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소련 측에 털어놓았다. 김일성은 조봉암 측에 선거자금을 건넸다는 사실도 소련 측에 밝히고 있다. 김일성은 “대선 한두 달 지나서 어쩌면 그 이전에 미국은 우리가 조봉암에게 선거운동을 위해 돈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다만 김일성은 자금의 구체적 액수는 소련 측에 밝히지 않았다.
   
   
   모스크바 문서보관소에서 발견
   
   김일성의 발언이 기록된 구소련 외교문서를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연방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사람은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 국민대 선임연구원이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과거 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에서 기밀해제된 김일성과 최용건, 김책, 안길, 서철 등 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88국제여단) 출신 북한 정권 수립 초기 핵심인물들의 수기(手記) 이력서를 비롯해 미국 푸에블로호 피랍사건(1968) 직후 북한 주재 구소련 외교관이 보고한 각종 기록 등을 발굴해 주간조선에 제공한 바 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관련 대화가 남한 대선이 있었던 1956년(3대 대선)에서 12년이나 지난 1968년 이뤄진 것으로 봤을 때, 상당 부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반면 기록에 따르면, 소련 측은 1968년 당시 조봉암과 박헌영 등 주요 인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 째르치즈스키 박사의 해석이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러시아식 발음으로 조봉암은 ‘존봉안’, 박헌영은 ‘박헨잉’이란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며 “소련 측은 김일성이 언급하는 인물들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해당 문서의 작성자 역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들었던 그대로 정확하지 않게 표기했다”는 각주를 적어 두었다.
   
   이 문건을 살펴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교수)은 “문건이 진본이라면 김일성의 발언이 조금 과장되거나 할 순 있어도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며 “조봉암과 진보당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주범 김질락이 쓴 옥중수기 ‘어느 지식인의 죽음’과 북한에서 펴낸 ‘김일성 저작선집’에도 언급된다”고 말했다. 실제 ‘김일성 저작선집’(5권 480~481쪽)에는 진보당과 관련한 김일성의 언급이 등장한다.
   
   “남조선 혁명가들의 줄기찬 투쟁의 결과로 그리고 남조선혁명운동 발전의 필연적 요구를 반영하여 1955년 12월에 남조선 혁명가들의 합법적 정당으로서 진보당이 나오게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해당 대목은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 때 김일성의 연설로 노동신문 1970년 11월 3일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재확인했다.
   
   이영훈 교장은 기록에서 “이 당(진보당)의 당원은 1만명 이상이었다”고 김일성이 소련 측에 밝힌 숫자에도 주목했다. 이영훈 교장은 “조봉암이 옥중에서 북한 자금을 전달한 양명산(양이섭)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비밀쪽지에도 ‘1만명’이란 언급이 등장하는데, 김일성이 밝힌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실제 조봉암 사형 판결의 결정적 증거가 된, 조봉암이 양명산에게 옥중에서 보낸 비밀쪽지에는 “당신(양명산)의 말 한마디가 나와 우리 진보당 ‘만여명’ 동지들의 정치적 생명에 관계가 되어 결사적으로 부인하시오”란 대목이 등장한다. 해당 비밀쪽지는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지난 5월 4일 망우리공원 묘원에 있는 조봉암 묘소(경기도 구리시 소재)를 찾은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일부 사실과 숫자가 틀린 부분도
   
   문건을 확인한 ‘조봉암 연구’의 저자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김일성과 소련 측의 회담이 이뤄진 1968년이란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1968년은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1월 21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1월 23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10월 30일) 등 한반도에 안보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박 교수는 “1968년은 한국군의 베트남전(戰) 추가 증파를 막으려고 북한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안보위기 상황”이라며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점”이라고 했다.
   
   자연히 공산진영에서 김일성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우 주목되던 시점이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 역시 “김일성과 폴랸스키와의 회담이 진행된 1968년 당시 북한은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 발동으로 북·중 관계가 악화하면서,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1964~1982)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 중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소련 측에 자신의 한반도 내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뻥튀기’가 김일성의 발언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봉암이 북한의 조언을 구해 대선에 출마했고, 진보당을 설립했다”는 김일성의 주장이 과장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소련 측이 기록한 김일성의 발언 중에는 일부 사실과 숫자가 틀린 부분도 엿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조봉암의 대선 출마(1956년 5월)와 진보당 창당(1956년 11월) 간의 선후 관계가 틀린 것이다. 김일성은 조봉암이 북측의 지원을 받아 진보당을 설립한 뒤 1956년 대선에 출마했다는 식으로 소련 측에 털어놓는다. 하지만 당시는 진보당 추진위원회(1월)가 결성됐을 뿐, 실제 창당이 이뤄지지 않아 조봉암은 같은 해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진보당의 공식 창당은 대선이 끝난 직후인 1956년 11월에 이뤄졌다.
   
   득표수에 관한 언급 역시 잘못됐다. 김일성은 “조봉암이 280만표, 이승만이 300만표를 얻었다”고 소련 측에 밝혔다. 반면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3대 대선에서 자유당 이승만은 504만표(69%), 무소속 조봉암은 216만표(30%)를 얻었다.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조봉암 처형 방식에 대해서도 “총살”이라고 잘못 발언하고 있다. 조봉암은 1959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김일성은 “보시다시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남조선 높은 직위에 출마시키는 경험은 결국에 부정적이었다”고 소련 측에 털어놓고 있다.
   
   이에 김일성의 설명을 듣던 폴랸스키 부의장이 “제 생각으로 이 분야에 당신들의 행동은 완전히 옳았다. 사람이 공산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 아니다. 상황의 요구에 따라 어떤 중립적인 지지자의 깃발 아래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주는 목표에 나갈 수도 있다. 이렇게 큰 사업에 실패가 있을 수도 있다”고 위안하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김일성의 입장에 동조하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 공판정에 앉아 있는 진보당 사건 피고인들. 맨 왼쪽이 조봉암. photo 연합

   공산주의자 조봉암, 전향했나?
   
   이번 문서 발견으로 조봉암은 평생을 따라다닌 ‘공산주의자’란 물음표를 사후에도 끝내 뗄 수 없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일성은 조봉암이란 인물을 소련 측에 설명하면서 “진보당 당수(조봉암)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시절에 모스크바에서 유학했고 공산주의적 세계관이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실제로 조봉암은 일본 유학 시절 전후로 사회주의에 심취해 ‘코민테른’이 운영한 공산당 간부양성기관인 모스크바의 ‘카우트브(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조선공산당 창당(1925) 등에 핵심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조봉암은 1946년 조선공산당(남로당의 전신)을 이끈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보낸 뒤 강제 출당당한다. 박헌영과 조봉암은 조선일보에서 함께 기자로 근무한 사이다. 이후 조봉암은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기록에서 “이 동무(조봉암)는 배신자가 돼서 이승만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조봉암은 확고한 공산주의자로 남았다. 공산주의자로 남았던 조봉암은 이승만 편에 살아남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기 위하여 넘어갔다는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다”고 소련 측에 밝혔다.
   
   이영훈 교장은 “조봉암은 박헌영과의 불화로 북쪽에 간다고 해도 활동공간이 없었을 테고, 결국 남한에 남는 쪽을 택했을 것”이라며 “한번 공산주의자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주대환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부회장은 “6·25전쟁 때 서울 함락 당시 국회부의장이었던 죽산은 국회 기밀문서들을 들고 남으로 내려갔다”며 “미 군정 시절 조봉암과 미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봤을 때 죽산은 오히려 미국 쪽 사람에 가까웠다”고 주장했다. 주대환 부회장은 “조봉암의 ‘평화통일론’도 미국 내지 UN의 입장에 가깝다”며 “정치자금도 미국 쪽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김일성의 발언이 수록된 이번 구소련 문서 발견으로 2011년 대법원이 재심 끝에 내린 ‘무죄’ 판결 역시 재론이 불가피해졌다. 지난 수십 년간 ‘간첩’으로 낙인찍혔던 조봉암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끝에 재심 권고가 내려지며 복권 수순을 밟았다. 당시 과거사위원회는 “조봉암이 일제의 국권침탈 시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사형 판결로 인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인 만큼,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권고했다.
   
   
▲ 망우리공원 묘원에 있는 조봉암 묘소에 놓인 문재인 대통령의 화환. photo 뉴시스

   2011년 대법원 ‘무죄’ 판결 어떻게 되나
   
   결국 대법원은 2011년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에서 조봉암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지 52년 만이었다. 2011년 대법원 재심 끝에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에는 망우리공원 묘원에 있는 조봉암 묘역(경기도 구리시 소재) 역시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져 지금은 여느 역대 대통령 묘소 못지않다. 조봉암은 1959년 처형 직후 이곳에 묻혔는데, ‘비명(碑銘)’을 적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조봉암 기일에 맞춰 3년 연속 화환을 보냈다.
   
   박태균 교수는 “북한에 방문했을 때 조봉암이 김일성에게 건넸다는 ‘만년필’이 혁명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며 “물론 중간에서 남북을 오가며 이중간첩 역할을 했던 양명산(양이섭)이 자금 출처나 답례로 오간 선물 등의 출처에 대해 제대로 안 밝혔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박태균 교수의 추가 설명이다. “북에는 조봉암이 문의도 하고 선물도 주고 북한의 돈도 받았다고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조봉암은 양명산이 그렇게 북에 보고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북은 조봉암에게 돈을 주라고 양명산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양명산이 돈을 줄때는 자기가 사업을 해서 번 돈을 준다고 했다. 조봉암도 그 딸인 조호정도 양명산이 사업으로 번 돈을 호의로 준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의 선물을 줬는데, 양명산은 그 선물을 다시 조봉암이 북에 준 선물로 둔갑시켜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양명산은 이중간첩 역할을 하면서 남과 북에서 서로 다른 얘기를 했고, 이것이 68년 문서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양명산은 조봉암 사형 이틀 전인 1959년 7월 29일 먼저 사형당한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김일성이 주장했듯이 조봉암이 북한의 승인을 받아 출마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히 그렇게 주장할 수 있도록 추가 정보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죽산 조봉암 누구?
   초대 농림부 장관·국회부의장… 3대 대선 출마 30% 득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부의장 등을 지낸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맞서 2대 대통령 선거(1952)와 3대 대통령 선거(1956)에 출마했다. 특히 1956년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은 30%의 득표율을 올리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 자유당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4년 전인 1952년 2대 대선 때 무소속으로 출마해 얻었던 득표율(11%)의 3배 가까운 수치였다. 당시도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고 여겨지는데, 이에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풍자가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집중견제를 받게 된 조봉암은 1956년 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북한의 남파간첩으로 알려진 ‘양명산(양이섭)’이라는 대북사업가로부터 창당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소위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조봉암 구명에 나섰지만,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자,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홍진기(전 중앙일보 회장) 등을 향해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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