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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9호]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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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의 正眼世論]소모적인 건국절 논란 멈춰라…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기억의 정치학’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jayho63@gmail.com

▲ 지난해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photo 연합
수년 전부터 건국절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논란은 보수진영의 일부 지식인들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제껏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만을 기념해 왔는데, 앞으로는 1948년 8월 15일도 기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반대 측은, 대한민국은 이미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건국절 제정 및 기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맞서왔다.
   
   주지하듯이 국가의 3요소는 주권, 국민, 영토다. 1919년의 대한민국은 국가의 요소를 갖추지 못하였고, 상하이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였다. 안타깝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1919년이 건국이라면, 한국은 일본에 병합된 지 9년 만에 독립한 셈이 된다. 일제강점 기간도 36년에서 9년으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1919년 대한민국이 진정한 의미의 건국이 아니었음은 상하이임시정부의 궤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제1장 총강 7조는 “복국(復國)과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과 독립, 민주, 균치(均治)의 3종 방식을 실시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나라를 회복한다는 의미의 복국이다. 건국강령 제2장은 복국을 3단계로 나누었는데, 제1기는 적에 대한 혈전을 정부로서 계속하는 과정이고, 제2기는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국제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취득함에 충족한 조건이 성숙할 때이며, 완성기인 제3기는 국토와 인민,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 등을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지위와 자유의지로서 각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할 때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1919년이 온전한 의미의 건국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였음을 보여준다.
   
   제헌의회의 헌법 제정 과정에서 국호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등이 거론되었는데, 임시정부의 멤버였던 신익희는 고려공화국을 지지하였다.
   
   반대 측은 1948년 8월 15일에 있었던 행사의 이름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란 점을 들어 건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정부수립=건국’이라는 보편적 인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199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50년’이라 칭하면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주화를 발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1948년이 진정한 의미의 건국이었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이 주장이 1919년 3·1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제헌헌법이 전문(前文)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정신적 건국’은 1919년에, ‘실질적 건국’은 1948년에 했다는 자기 정리 아니겠는가. 이는 이승만의 역사 인식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미국 등으로부터 상하이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필자는 2005년 1월 박효종·전상인·김일영 교수 등과 함께 ‘교과서포럼’이란 단체를 출범시켜 활동하였다.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성공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폄훼하고 분단 책임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돌리는 ‘외눈박이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금성사를 비롯한 상당수 중고교 역사 교과서들이 그 같은 오류에 젖어 있었다.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은 해방군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서술까지 등장하였다. 1948년 8·15에 대한 강조는 그러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소련의 일관되고 치밀한 38선 이북만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 기도와 미국의 오락가락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한반도 정책은 너무도 달랐다. 김일성은 꼭두각시로 소련의 지령에 충실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미국과 갈등하였다. 한반도 분단의 일차적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에게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는 일이 발생했다. 2008년 7월 한나라당 J의원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칭하는 내용을 담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한 것이다. 이는 커다란 전략적 오류였다. 대체(代替)는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두 개의 8·15는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였다. 1948년 8·15의 재발견과 의미 부여라는 애초의 의도는 1945년 8·15와 상하이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이라는 엉뚱한 결과로 변질되었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반박 논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좌파 역사학계와 민주당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광복을 폄훼하고 상하이임시정부를 부정하려 한다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광복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등은 건국절 제정 움직임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보수 성향의 단체들이었다. 분단의 책임을 둘러싼 좌우간 역사전쟁이 ‘광복절 대 건국절’ ‘이승만 대 김구’라는 보수 내전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J의원은 2008년 9월 법안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내상은 깊게 남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한민국 보수는 김구를 품어야 한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명분론과 이상주의에 빠져 판단을 그르쳤지만, 백범 김구는 우남 이승만과 더불어 대한민국 보수우파의 양대 기둥이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출범 당시 좌우 독립운동 세력이 총망라된 무지개 조직이었지만, 이내 노선을 둘러싼 갈등으로 심각하게 분열하여 1920년대 중반 이후 집세도 내기 힘들 정도로 곤궁한, 몇몇 사람들만의 조직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통해 조직을 회생시켰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12월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후 해방공간에서 강력한 반탁운동을 통해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말해 자유다”라고 했을 정도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김구에게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된 것은 1962년 박정희 정권 때였다. 1969년에는 서울 남산에 백범 동상이 세워졌다.
   
   보수는 1919년을 정신적 건국으로, 1948년을 실질적 건국으로 이해하는 통합적 역사인식으로 이승만과 김구를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로 묶어내야 한다. 건국, 즉 나라 세우기(founding a nation)를 어느 특정 시점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상당 기간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완성된 일련의 연속적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역사를 토막 내서 자신에게 유리한 대목만 부각시키려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기억의 정치학’을 극복해야 한다. 토막이 아닌 ‘전체로서의 역사(history as a whole)’를 응시해야 한다. 보수의 목표는 소련의 꼭두각시 김일성의 사회주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선 대한민국 수립의 정당성 확보이지, 김구 노선에 대한 이승만 노선의 우월성 확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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