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 중인 민주당 박영선(왼쪽),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photo 뉴시스
유세 중인 민주당 박영선(왼쪽),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photo 뉴시스

4·7 보궐선거에서 야권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이후 판세가 야당 쪽으로 기울고 부산시장 선거도 여당의 열세가 지속되자 더불어민주당은 “여론조사를 못 믿겠다”며 파상 공세에 나섰다. 포문은 이해찬 전 대표가 열었다. 지난 3월 17일 친(親)조국 성향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이 전 대표는 “여론조사가 가진 기술적인 방법으로 장난을 많이 친다”고 했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여론조사 결과와 바닥 민심은 다르다”고 했다.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는 “현장은 여론조사와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했고, 노웅래 공동선대위원장은 “여론조사와 다르게 샤이(shy) 진보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부산에서도 ‘원조 친노(親盧)’ 이광재 의원이 지난 3월 28일 구포시장 유세에서 “지금 숨어 있는 표가 상당히 많다”고 했다. ‘샤이 진보’, 즉 여론조사에서 포착되지 않는 ‘숨은 진보표(票)’가 적지 않다는 주장이다. 민주당 측은 “각 언론 여론조사에서 20%포인트가량 격차가 있지만 숨은 표를 내부적으로 분석해보면 10%포인트 차이”라며 “이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샤이 유권자(숨은 표)’ 논란은 2002년 12월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갤럽의 11월 16일 조사에선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를 42.3% 대 38.3%로 앞섰지만, 11월 25일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직후엔 37.0% 대 43.5%로 지지율이 뒤집혔다. 그래도 한나라당은 승리를 자신했다. “숨어 있는 지지표가 5%에 달한다”는 게 근거였다. 하지만 결국 2.3%포인트 차로 패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선 전국 여론조사에서 뒤지던 도널드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승리한 것이 ‘샤이 트럼프’ 덕분이란 해석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전국적으로 300여만표(2.1%포인트) 뒤지고도 핵심 경합주 6곳의 우세에 힘입어 최종 승자가 됐다. 전국적 여론조사는 맞았지만 일부 경합주에서 오류가 있었던 셈이다. 선거 후 미국 학계의 연구에선 ‘샤이 트럼프’ 가설이 기각되고 주(州) 단위 조사에서 표본 구성 등 조사 방식의 보완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래도 요즘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당에선 과거에 여론조사가 빗나간 두 가지 사례를 내세우며 ‘샤이 진보’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한명숙 후보와 오세훈 후보가 맞붙은 2010년 서울시장 선거, 정세균 후보와 오세훈 후보가 대결한 2016년 총선 종로 선거다. 2010년의 경우 여론조사에선 오 후보가 선거 기간에 10%포인트 이상 앞섰지만 실제 개표 결과는 0.6%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2016년에는 선거 전 여론조사에선 접전이었지만 개표함 뚜껑을 열자 정 후보가 12.9%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와 2016년 총선은 모두 휴대전화 없이 집 전화로만 여론조사를 했던 시기였다. 2017년 2월 선거법 개정 이후엔 언론사 여론조사도 휴대전화 안심번호 활용이 가능해지면서 민심 흐름을 비교적 정확히 읽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년 4월 총선에선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최근 여당과 똑같은 논리로 ‘숨은 표’를 주장했다. 당시 황교안 대표는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숨어 있는 표가 많다”고 했고, 이진복 선대위 총괄본부장도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와 내부 판단에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총합에서 통합당은 41.5%로 49.9%인 민주당에 243만표 차로 패했다. 선거 결과는 총선 직전 한국갤럽 조사에서 ‘정부 지원을 위해 여당 후보 당선을 원한다’(51%)와 ‘정부 견제를 위해 야당 후보 당선을 원한다’(40%)는 응답 비율과 비슷했다.

스마트폰 시대 숨은 표 줄어

지난 3월 23~25일 한국갤럽 조사에선 4·7 보궐선거와 관련해 ‘정부 지원을 위해 여당 후보 당선을 원한다’(33%)보다 ‘정부 견제를 위해 야당 후보 당선을 원한다’(57%)가 크게 앞섰다. 1년 만에 민심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작년 총선처럼 이번에도 여론조사에서 측정된 정부 지원론과 정부 견제론에 대한 민심이 선거 결과와 비슷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재 서울·부산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후보들이 우세한 판세가 뒤집히긴 쉽지 않을 것이란 예측이다.

최근 각 여론조사의 응답률이 예전보다 높아져서 특정 성향층의 조사 참여율이 현저히 낮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칸타코리아 조사의 응답률 추세를 보면, 탄핵 정국이던 2016년 12월엔 8.7%에 그쳤지만 2017년 5월 대선에선 13.6%였고, 최근인 3월 27일 조사에선 25.5%로 높아졌다.

요즘 여론조사에서 파악되는 응답자의 정치 성향 분포를 봐도 진보층이 여론조사에 덜 잡힌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3월 한 달간 실시한 조사(총표본 4000명)에서 응답자의 정치 성향 분포는 보수층 31%, 중도층 37%, 진보층 32% 등이었다. 21대 총선을 앞둔 2020년 3월 조사(총표본 4000명)에선 보수와 중도, 진보층이 모두 33%로 같았다. 1년 전에 비해 여론조사 표본에 진보층이 1%포인트 줄었지만 보수층도 2%포인트 줄었다. 다만 보수층과 진보층은 결집력이 달라졌다. 작년 총선 직전과 최근 조사를 비교하면, 보수층은 ‘정부 견제론’에 대한 동의(70→83%)가 상승한 반면 진보층의 ‘정부 지원론’에 대한 동의(81→68%)는 하락했다. 진보층이 여론조사에 안 잡히는 게 아니라 진보층도 정부·여당에 대한 민심이 나빠졌다는 의미다.

최근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선 지난 2월까지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양자대결에서 뒤지던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야권 단일화 이후 20%포인트 안팎 차이로 앞서 있다. 부산시장 선거도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가 민주당 김영춘 후보에게 20%포인트가량 앞선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여당의 주장대로 샤이 진보가 많다면 최종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 전문가 중에는 “‘숨은 표가 있다’ ‘바닥 민심은 다르다’는 주장은 선거 때마다 열세인 쪽에서 제기하는 단골 메뉴”라며 “지지층을 자극해서 투표장으로 끌어내려는 전략”이란 견해가 많다.

장덕현 한국갤럽 연구위원은 “휴대전화 조사 보급으로 숨은 표가 이전보다 크게 줄었다”며 “진보층이 갑자기 여론조사를 회피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고 했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LH 사태 등 여권으로선 각종 악재의 회오리가 몰아치는 분위기라서 샤이 진보가 있을 가능성은 있다”며 “여당을 지지한다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투표장에는 적극적으로 나오는 진보층이 어느 정도일지가 승부의 관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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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림 조선일보 여론조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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