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겨울, 스포츠조선 특파원 시절 도미니카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LA공항을 출발해 마이애미공항에서 약식 비자를 받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갔다. 산토도밍고의 비행장은 정글의 한쪽을 대충 깎아 놓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초라했다. 당시 LA 다저스의 유망주이던 박찬호가 도미니카에서 열린 윈터리그에 참가했고, 그 취재를 위해 갔다가 그 먼 섬나라의 야구 열기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카리브해 복판에 있는 히스파니올라섬의 절반을 차지한 이 섬나라의 국기(國技)는 물론 야구다. 섬의 왼쪽은 아이티다. 도미니카공화국은 당시 공장 직원의 일급이 4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야구장마다 넘쳐나던 관중과, 한창 뜨거울 때 부산 사직구장을 연상시키던 야구장의 흥겨움과 열기는 잊을 수 없다. 도미니카 윈터리그에는 박찬호 같은 외국인 선수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미니카 출신 선수가 주축을 이뤘고, 그중에는 눈에 띄는 메이저리그(MLB)의 스타도 꽤 있었다. 수도 산토도밍고를 둘러보니 길거리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야구를 즐겼다. 나무막대기와 끈이나 비닐을 뭉쳐서 만든 공, 그리고 우유갑이나 이삿짐 상자를 잘라서 만든 글러브를 대충 손에 끼고도 그들은 어디서든 야구를 했다. 좁은 뒷골목이든 빈 주차장이든 건물 옥상이든 도미니카 소년들의 야구 사랑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단순한 야구 사랑만이 아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섬나라에 야구를 보급한 것은 미국 군대였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도미니카공화국에 야구를 전수한 것은 쿠바였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조사에 의해 확인됐다. 미국 동남부 끝 플로리다주의 바로 아래에 있는 섬나라 쿠바에서는 1860년대 초에 이미 야구가 인기였다. 그런데 1868년부터 쿠바에서 ‘1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야구선수와 팬들이 인근 섬나라로 피란을 갔고, 이때 야구가 도미니카에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그래서 야구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시작된 것은 1880년대 후반 혹은 1890년대 초반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야구가 전파되면서 인기를 끌자 수많은 팀이 생기고 지역마다 각종 토너먼트도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현재 도미니카 프로야구 리그의 원조로 꼽히는 타이거즈, 이스턴 스타스, 이글스, 라이온즈가 자리를 잡으며 프로야구의 틀이 잡혀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193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는 야구팬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야구를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부의 상징인 극소수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 야구팀을 만들 것을 권장해 수많은 지역 팀이 탄생했으며, 미국 니그로리그의 스타들이 시즌이 끝나면 대거 도미니카 프로팀에서 고액 봉급을 받고 뛰기도 했다. 이렇게 도미니카의 야구 인기와 저변이 갈수록 굳건히 자리를 잡아갔다. 1940년대 경제난에 처하면서 프로리그가 한때 사라지기도 했지만 도미니카 야구는 국가대표 등 아마추어 팀과 뿌리내린 지역 팀의 인기로 명맥을 꾸준히 이어갔다. 1948년에는 처음으로 중남미 국제대회에 출전했는데 팀의 절반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비극 속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전국을 야구 열풍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결국 그 인기의 기세가 이어져 1951년 프로 4팀이 재건돼 도미니카 윈터리그를 열게 됐고, 현재는 총 6개 팀으로 구성된 도미니카 윈터리그가 전통을 당당히 이어가고 있다. 도미니카 리그의 우승팀은 베네수엘라,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등 중남미 지역에 퍼져 있는 윈터리그 우승팀들이 대결하는 캐리비안 시리즈에 진출해 겨울 내내 야구 축제를 이어간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야구는 쿠바 야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다. 야구가 훨씬 먼저 정착한 쿠바는 뛰어난 야구선수를 많이 배출했고 MLB의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다. 미국과의 활발한 야구 교류도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결국 MLB 관계자들은 비교적 저렴한 값에 스타급 잠재력의 선수들을 찾는 새로운 돌파구로 뛰어난 선수들이 숨어있던 도미니카 야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페드로 마르티네즈. 매니 라미레즈 photo 연합. 에스밀 로저스(한화) photo 연합.
(왼쪽부터) 페드로 마르티네즈. 매니 라미레즈 photo 연합. 에스밀 로저스(한화) photo 연합.

1950년대 후반기부터 MLB 스카우터들은 쿠바가 아닌 또 다른 섬나라 도미니카를 부지런히 드나들게 된다. 1958년 펠리페 알루가 MLB 사상 두 번째 도미니카 선수가 되면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다. (1956년에 오지 버질 주니어가 MLB에 진출했지만 후보로 주로 뛰었고 은퇴 후 코치로 오래 활동했다.) 의사가 돼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알루는 야구를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집안 사정이 워낙 안 좋아지자 결국은 뉴욕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인다. 당시 그가 받은 계약금은 200달러. 하찮게 보이는 그 적은 액수의 계약금이 알루 가족에게는 얼마나 소중하고 큰돈이었는지 모른다. 1루수와 외야수를 본 알루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외야를 책임지며 1962년에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첫 도미니카 출신 스타로 이름을 날렸고 고국에서는 최고의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1960년에는 펠리페의 동생 마티 알루가, 그리고 1963년에는 막내 호세 알루까지 MLB에 데뷔하면서 도미니카 스타들의 본격적인 MLB 진출이 시작됐다. 이들 3형제는 1963년 9월 25일 MLB 사상 최초이자 지금도 유일하게 형제가 함께 자이언츠의 외야를 책임지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들의 성공과 함께 부와 명예를 향한 도미니카 소년들의 ‘MLB 바라기’가 운명처럼 이 섬나라를 뒤덮게 된다.

그리고 그 현상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2년에 나온 자료를 보면 도미니카공화국의 1000만 주민 중에 34.4%가 빈곤층으로 집계됐고 실업률은 14.7%에 달했다. 그런 와중에 야구 스타들의 MLB에서의 성공은 청소년들에게 빈곤 탈출과 함께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신앙처럼 자리 잡고 있다. 소년들은 5~6세부터 야구를 시작하고 도미니카의 거리에는 ‘MLB 워너비’가 넘쳐난다.

2013년 전승으로 WBC 우승을 차지한 도미니카공화국 대표팀에는 20명의 MLB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이들의 총 연봉은 1억달러가 조금 넘었다. 평균 500만달러, 우리 돈으로 60억원쯤 되는 이 액수는 빈곤층 도미니카 청소년들에겐 야구가 아니면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상상으로도 가늠이 안 되는 엄청난 액수다. 그리고 이들 MLB 스타들은 대부분 모국의 윈터리그에 참가하고 모국에서 은퇴 후의 삶을 보내면서 사회봉사에 앞장서는 등 롤모델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꿈을 꾸는 야구 소년들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공 확률이 극히 희박한데 어려서부터 야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들 중에는 좌절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이제 MLB 30개 팀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도미니카공화국에 야구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MLB 스카우터들은 젊고 어린 유망주 발굴을 위해 오늘도 스피드 건을 들고 섬나라 야구장 전역을 누비고 다닌다.

(왼쪽부터) 앤디 마르테(kt). 야마이코 나바로(삼성). 헨리 소사(LG) photo 연합
(왼쪽부터) 앤디 마르테(kt). 야마이코 나바로(삼성). 헨리 소사(LG) photo 연합

현재까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태어나 MLB에 진출한 선수는 총 568명이나 된다. 그중에 투수는 298명이고, 펠리페 알루를 비롯해 빅리그 감독도 5명이나 배출했으며, 오마 미나야는 도미니카 출신 최초로 MLB 단장이 됐다. 올해 MLB 명예의전당에 들어간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투수 후안 마리칼에 이어 두 번째 도미니카 출신 명예의전당 멤버다. 알버트 푸홀스(3차례)와 블라디미르 게레로, 미겔 테하다, 새미 소사 등은 매 시즌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리그 MVP를 수상했다. 바톨로 콜론과 페드로 마르티네즈(3차례)는 투수 최고 영예인 사이영상을 차지했다. 도미니카는 1994년 다저스의 라울 몬데시를 비롯해 신인왕도 7명이나 배출했다. 또한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비롯해 어빈 산타나, 프란시스코 리라아노, 우발도 히메네즈, 라몬 마르티네즈, 호세 히메네즈, 후안 마리칼 등 7명의 도미니카 투수들이 MLB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이렇듯 스타들을 대거 배출했을 뿐 아니라 올해도 개막전 로스터에 총 83명이 이름을 올려 전체 MLB 선수의 10.2%를 차지했다. 1995년 이래 매 시즌 최소 78명에서 최고 146명까지, 이 작은 섬나라 선수들이 세계 최강 리그인 MLB에서 평균 10% 정도를 늘 차지하며 활약하고 있다. MLB 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들, 매니 라미레즈, 아드리안 벨트레, 호세 바티스타, 넬슨 크루즈, 라파엘 퍼칼, 데이비드 오티즈, 조니 페랄타, 헨리 라미레즈, 알폰소 소리아노, 호세 밸버데이 등으로 이어지는 스타 열전이 모두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강인한 야구선수를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선천적으로 체격이 좋은 타고난 하드웨어에, 전반적으로 유연성이 뛰어난 점이 큰 역할을 한다고 평가된다. 또한 어려서부터 조직적인 야구를 하면서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어려서부터 강한 무기들을 갖추게 되는 점도 분명히 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또래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력 투구와 전력 스윙이 몸에 배어 있고 자연스럽게 강한 어깨와 팔과 근육이 만들어진다. 이들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극소수만이 야구선수로 생존하게 되는 적자생존이 작동한다.

어느덧 도미니카 소년들이 꾸는 야구의 꿈은 수년 전부터 태평양을 건너 한국의 KBO리그와 일본의 NPB리그, 그리고 대만리그까지 펼쳐지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의 야마이코 나바로, LG 트윈스의 헨리 소사 같은 선수는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야구를 시작했고 그래서 한국까지 야구를 하러 왔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최근 한화 이글스에서 완투승·완봉승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에스밀 로저스 역시 카리브해의 이 작은 섬나라 출신이다. kt의 중심 타자 앤디 마르테, 삼성의 에이스 알프레도 피가로, LG 야수 루이스 히메네스, 두산 야수 데이빈슨 로메로 등을 합쳐 KBO리그의 외국인 선수 20%가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선수들이다. 빅리그에 오르지 못할 바에야 마이너리그에서 적은 연봉에 고생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과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으니 앞으로도 KBO리그를 선호할 도미니카공화국 선수는 계속 나올 것이다.

민훈기

Spotv 야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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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훈기 Spotv 야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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