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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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는 전통적인 올림픽 효자 종목이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대회부터 2012년 런던 대회까지 총 1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은메달과 동메달도 각각 14개와 15개나 된다. 한국은 역대 올림픽에서 일본(금 34·은 18·동 18), 프랑스(금 12·은 8·동 24) 다음으로 많은 메달을 땄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도 ‘금빛 메치기’는 유효할 전망이다. 남자 대표팀은 세계 랭킹 1위가 3명이나 포진해 있다. 역대 최고라는 평가다. 여자 대표팀도 2004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원희 코치를 앞세워 기량이 급상승했다. 서정복 대표팀 총감독은 “20년 동안 금메달이 없던 여자 유도가 이번에 기적을 노린다”며 “남자 대표팀은 7개 체급에서 모두 메달을 노리고 이 중 금메달 최대 4개가 목표”라고 했다.

그중 안창림(22·수원시청)에 대한 기대가 크다. 73㎏급 세계 랭킹 1위이자 재일동포 3세다. 이제는 ‘방송인’이자 ‘격투기 선수’로 더 친숙한 추성훈(41)이 떠오른다. 추성훈도 재일동포 4세로 1998년부터 한국의 실업팀에서 뛰었다.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하지만 안창림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추성훈에 대한 것이다. 그는 “추성훈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른다. 나는 나다”라면서 “재일동포가 아닌 한국 유도선수 안창림으로 주목받고 싶다”고 늘 말한다. 그래서 그가 즐겨 하는 말이 바로 “나는 한국인 안창림이다”이다.

가라테가 싫어 시작한 유도

안창림은 와세다대로 유학을 왔던 할아버지가 정착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태범(52)씨는 가라테 사범이었다. 자연스럽게 가라테부터 배웠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가 너무 엄하게 가르친 탓도 있었다. 결국 유도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 가라테를 잘하기 위해 배운 유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는 “솔직히 아버지 도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악착같이 훈련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타고난 투지와 남다른 습득력이 안창림의 최고 무기였다. 고교 시절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지만 지독한 연습벌레로 불렸다. 한국인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 차별을 견디며 수천 번 도복 깃을 잡았다. 새벽부터 밧줄을 타며 힘을 길렀다. 그러자 일본 유도계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도 명문 쓰쿠바대학에서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는 “토인대부속고 시절 후보였다”며 “당시 신입생 테스트에서는 신입생 10명 중 꼴찌였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고교 시절 100㎏이 넘는 토인대 형님들을 찾아가 뒹굴면서 실력이 늘었다”고 했다. 그렇게 고된 훈련을 소화하고 대학에 들어가니 또래보다 힘과 스피드에서 앞섰다. 그때부터 성적이 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국 사람이라며 함께하기를 꺼리는 이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들과 더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다.

안창림은 대학 2학년 때인 2013년 10월 꿈의 무대인 전일본학생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11월 열린 단체전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2관왕이 됐다. 하지만 이런 일본 남자 유도 73㎏급 최고 선수 안창림은 경기 출전에 제한을 받았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발전이나 중요한 대회는 나갈 수 없었다. 안창림은 “뛸 수 있는 대회는 모조리 우승했다”고 했다.

안창림의 아버지가 “차라리 귀화하는 게 어떠냐”고 안타까워했을 정도다. 경기에 못 나가는 안타까움, 분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생 귀화하지 않고 살아온 안창림의 아버지도 스포츠인이었다. 하지만 귀화 권유에 안창림이 고개를 저었다. 귀화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화 얘기를 들었을 땐 오히려 한국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주변에선 만류했다. 쓰쿠바대학 감독은 물론 일본 대표팀 감독까지 나서서 그를 잡았다. 그들은 “한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며 “체력 위주의 한국 훈련은 힘들다. 너도 익히 알지 않느냐. 차라리 귀화해 일본 국가대표가 되는 게 맞다”고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안창림은 한국에 가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으로 할아버지 나라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데 일본 국가대표가 되는 선수들을 많이 봤다”며 “태극마크를 달고 반드시 그들을 꺾고 싶었다”고 했다.

태극마크 달기 위해 한국행

그렇게 2014년 2월 홀로 한국에 왔다. 1984년 LA올림픽 71㎏급에서 금메달리스트인 안병근 용인대 교수의 도움으로 용인대 3학년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듣던 대로 한국 유도의 훈련은 고됐다. 산을 타고, 줄을 타고, 또 산을 탔다. 일본식 기술 훈련에 익숙한 안창림은 힘이 들었고 매일 밤 가족과 집이 생각났다.

그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았다. 2014년 3월 처음 나간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3위를 했고, 6월 최종 선발전에서 1위를 했다. 당시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던 73㎏급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서정복 대표팀 총감독은 “발전 속도가 빠르다”며 “기술이 좋은 일본식 유도에 체력이 탄탄한 한국식 유도가 더해진 선수로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유도를 시작하고 처음 출전한 2014년 8월 러시아 첼랴빈스크 세계선수권대회,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나간 이 대회에서 2회전 탈락의 아픔을 맛봤다. 세계 랭킹 2위인 사기 무키(이스라엘)에게 졌다. 악착같이 훈련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해 10월 미국 마이애미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두 달 뒤 제주 그랑프리 국제유도대회 73㎏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결승 상대가 바로 러시아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사기 무키였다.

안창림의 주특기는 업어치기다. 원래는 다리 기술로 상대를 공략했지만 이제는 힘과 순발력을 앞세운 큰 기술로 한판승에 능하다. 하지만 ‘동갑내기’ 오노 쇼헤이(일본)만 만나면 힘을 쓰지 못한다. 그동안 4번 만나 모두 패했다. 2014년 12월 도쿄 그랜드슬램에서 지도패, 2015년 뒤셀도르프 그랑프리 준결승에서는 절반패였다. 또 2015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세계선수권 준결승에서 한판패, 올 2월 뒤셀도르프 그랑프리 준결승에서는 절반패였다.

오노는 2013년과 2015년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낸 일본 유도의 간판스타다. 밭다리후리기와 허벅다리걸기가 주특기로 안창림을 넘어뜨린 기술 모두 발기술이었다. 안창림은 “오노는 힘이 좋아 양손으로 도복을 잡히면 승산이 없다”며 “오른쪽 업어치기와 오른쪽 안뒤축걸기로 공략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강하지만 지기는 싫다”고도 했다.

안창림이 출전하는 유도 73㎏급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이원희가 금메달을 딴 체급이다. 역대 최강이라 불리는 남자 유도대표팀, 그중 에이스로 꼽히는 안창림이 다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오노 징크스’를 깨야 한다. 안창림은 “올림픽이 다가올수록 오노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했다”며 “리우에 가기 위해 한국에 왔고, 한국인 유도선수 안창림으로 주목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함태수 스포츠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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