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0일 1100원대 후반에 휘발유를 팔고 있는 서울 은평구의 한 주유소. ⓒphoto 뉴시스
지난 5월 10일 1100원대 후반에 휘발유를 팔고 있는 서울 은평구의 한 주유소. ⓒphoto 뉴시스

2020년 1분기 적게는 5600억원대에서 많게는 1조8000억원에 육박하는 영업적자가 확인되고 있을 만큼 정유사들의 상황이 심각하다. 한국 시장에서 메이저 정유사로 불리는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S-oil(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까지 4개 정유사의 1분기 영업적자를 합치면 무려 4조3775억원에 이른다.

문제는 2분기와 3분기로 갈수록 정유사들의 실적 추락과 시장 악화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분석과 전망도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유사들의 1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정유업계 1위 SK이노베이션부터 보자. 올해 1분기 실적이 이전보다 좋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지난해부터 업계는 물론 투자시장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5월 6일 SK이노베이션이 밝힌 1분기 (잠정)실적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훨씬 뛰어넘는 말 그대로 쇼크 상태다.

SK이노베이션 적자 1조7752억

2019년 1분기 12조7774억5200만원에 이르던 매출이 2020년 11조1629억9600만원으로 1년 만에 1조6000억원 이상 사라졌다. 매출액 감소보다 영업적자와 순적자 추락은 더 심각하다. 지난해 1분기 3281억4900만원의 흑자이던 영업이익이, 올 1분기 1조7751억8600만원 적자로 추락했다. 순이익 역시 지난해 1분기 2088억500만원 흑자에서 올해 1분기 1조5521억5800만원 순적자로 폭락했다. 1년 전인 지난해 1분기와 비교해 무려 1조8000억원 가까운 순이익이 사라진 것이다.

단 3개월 영업으로 나타난 SK이노베이션의 순이익 축소 폭이 30대 그룹 소속 웬만한 대기업 계열사들의 1년 총매출보다 큰 상황이다. 2020년 1분기 적자 규모는 SK이노베이션의 58년 역사상 분기(3개월) 기준 최대 규모다.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기업 아람코가 소유하고 있는 S-oil도 상황이 같다. 잠정 실적이긴 하지만 지난해 1분기 5조4261억5600만원에 이르던 매출이 올해 1분기 5조1984억100만원으로 줄어든 것이다. 지난해 1분기 2703억6600만원 정도 흑자를 냈던 영업이익도 올해 1분기 무려 1조72억5900만원 적자로 무너졌다. 순이익 역시 지난해 1분기 1135억9100만원 흑자에서 올 1분기 8806억4200만원대 적자로 추락했다. 순적자 확대 폭이 불과 1년 만에 1조원에 육박할 만큼 말 그대로 실적이 엉망이 됐다. S-oil 역시 1976년 창사 이후 분기 기준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다.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인 현대오일뱅크도 2020년 1분기 매출(잠정)이 4조4166억원으로 2019년 1분기와 비교해 무려 7245억원이나 쪼그라들었다. 1년 전 같은 기간 1008억원과 584억원 흑자를 냈던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불과 1년 만에 5632억원과 4622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적자로 추락했다.

정유업계 2위로, 메이저 정유사들 중 가장 늦게까지 실적이 알려지지 않았던 GS칼텍스의 성적표(잠정)도 지난 5월 11일 드러났다. 역시 참담하다. 지난해 1분기 7조9526억원에 이르던 매출은 올 1분기 7조715억원으로, 1년 만에 무려 8800억원 넘게 축소됐다. 2019년 1분기 3295억원 흑자였던 영업이익 역시 1조318억원에 이르는 적자로 폭락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그나마 873억원 흑자였던 순이익마저 올해 1분기에는 1조153억원으로 무너졌다.

1분기 1조7000억원이 넘는 영업적자가 발생한 SK이노베이션의 울산 공장 전경. ⓒphoto 뉴시스
1분기 1조7000억원이 넘는 영업적자가 발생한 SK이노베이션의 울산 공장 전경. ⓒphoto 뉴시스

팔지 못해 쌓이기만 하는 석유

‘올해 1분기 정유사들의 실적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은 사실 지난해 말부터 업계와 시장에서 떠돌았다. 중국의 재고 확대 등 성장률 급락이 꾸준히 불안 요인으로 꼽혔다. 또 최근 몇 년 확대된 유동성의 힘으로 달아올랐던 미국의 주요 산업계와 경제 역시 숨고르기가 불가피하다는 시각이 컸다. 미국과 중국 경제의 동반 하강이 세계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 상황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게 하면서 정유사들의 해외시장 축소와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일찍부터 시장에 떠돌았다.

화학과 자동차, 조선, 기계, 건설 등 한국 주요 기업들의 실적 악화세가 짙어지며 국내 수요 감소세도 확대 추세였다. 여기에 정제 마진까지 꾸준히 나빠지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5월 확인된 것처럼 적게는 5630억원, 많게는 1조8000억원에 육박하는 충격적인 적자를 내놓을 만큼 정유사들의 실적이 깊고 빠르게 추락할 것이라는 예측은 사실 많지 않았다.

정유사들의 실적 폭락 요인은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중국 우한발 코로나19 사태를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19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예측 범위에 없던 악재다. 그런 코로나19가 1월부터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의 경제를 사실상 멈춰 세웠다. 2월부터 세계 12위 규모의 한국 경제도 강타했다. 3월부터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까지 유럽 주요국을, 또 미국 경제까지 멈춰 세우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

전 세계 경제가 1분기 일시 마비상태에 빠지며 석유 수요가 급감했다. 여기에 세계 각국의 국경 폐쇄와 입경 금지 조치는 핵심 고객인 항공·해운 등 물류산업을 강타했고, 그 충격이 정유 시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또 유럽과 미국 등 주요 경제국들이 ‘록다운’으로 부르는 도시 폐쇄를 단행하며, 개인의 석유 소비마저 급감했다. 기업과 개인 등 경제활동 주체들이 석유 소비를 일시에 줄이며 판매 시장이 냉각됐고, 이것이 영업손실 확대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요 감소와 영업 악화는 고스란히 재고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정유사들이 석유를 넣어둘 저장고 부족을 호소할 만큼 석유가 쌓여가고 있다. 취재에 응한 한 시장 전문가는 “현재 정유사들 거의 모두 생산한 석유 제품의 재고를 보관하기 위해 저장시설을 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한 정유사 관계자도 “재고가 늘어나며 정유사들이 석유 제품을 넣어 둘 곳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실정”이라고 했다.

팔리지 않은 석유가 재고 악화를 불러오고, 이것이 적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유사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 판매 부문의 손실보다 재고 확대와 관련한 손실들이 더 심각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정유 공장이 들어선 대표적인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 야경. ⓒphoto 뉴시스·여수시청
정유 공장이 들어선 대표적인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 야경. ⓒphoto 뉴시스·여수시청

재고 비용으로 인한 손실 확대

이런 상황에서 정유사 수익성의 핵심인 정제 마진까지 추락하고 있다. 사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인 지난해부터 정제 마진 문제가 정유사들을 긴장시켰다. 지난해 중순 이후 세계 경기 둔화 전망세가 강해지며 이미 석유 소비 축소 전망이 나왔는데, 국제 유가보다 더 직접적으로 정유사들의 수익에 영향을 미치는 정제 마진의 급락 문제도 이때부터 제기됐다. 실제 지난해 말 일시적으로 정제 마진이 ‘마이너스’ 상태가 돼 1차로 정유사들을 강타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이 국제 유가 하락이다. 국제 유가가 빠르게 하락하며 지난해부터 산유국들의 경제 상황이 급락했다. 이렇게 되자 사우디아라비아 중심의 중동 지역 산유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뭉친 또 다른 산유국들 사이에서 감산 논의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제 유가는 물론, 자국의 이해를 달리하는 산유국 간 갈등이 더 격화됐다. 사우디 진영과 러시아 진영이 평행선을 달렸고, 일시적이었지만 결국 지난해 말 감산이 아닌 증산 현상까지 벌어졌다. 이것이 국제 유가를 더 가파르게 추락시키면서 정제 마진에 결정타를 날렸다.

대규모 적자 개선 올해 힘들 것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1배럴당 정제 마진이 최소 4달러는 돼야만 적자를 면할 수 있다”며 “이 선이 무너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정유사들이 말하는 4달러는 고사하고 역마진 상황이 벌어지며, 공장을 가동할수록 영업적자와 순적자 등 손실만 커지는 구조가 1분기 실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정유사 관계자들도 기자에게 “현재 드러난 대규모 적자는 국제 유가보다 정제 마진과 재고 비용으로 인한 손실의 영향이 더 크다”라며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문제는 ‘1분기 이후 반전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현재 분위기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뒤덮은 상태다. 일단 전 세계에 코로나19 공포가 여전하다. 오히려 2차, 3차 유행이 언급되고 있을 만큼 다시 감염자 수가 증가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록다운 상태가 이른 시간 내에 풀리기 힘든 게 현실이다. 국가 간 이동제한 해제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다. 또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걸쳐 코로나19로 인해 각종 공장과 작업장의 가동 중단 사태 역시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생산과 소비 활동 정상화 시기를 점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이 ‘석유 수요 회복이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싣고 있다.

산유국 사이 의미 있는 수준의 감산이 현실화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결국 국제 유가가 급락한 상황에서 적자를 이유로 정제 마진을 끌어올리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국제 유가 급락으로 정유사가 재고로 갖고 있는 석유 제품의 상품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여기에 수요까지 급감하며 2~3분기에도 또다시 재고가 늘어나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2분기와 3분기의 상황 개선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라며 “우호적인 요인들이 없다”라고 했다. 다른 정유사 관계자 역시 “급격한 반등이 어렵다는 게 우리 시각”이라고 했다. 한 시장 관계자는 “코로나19 여파로 생산 축소와 지출 최소화가 본격화하면 석유 소비가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며 “수요 감소로 재고는 늘고 있는데 의미 있는 감산이 사실상 힘든 상황에서 수익성 회복을 말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했다. 정유 시장의 침체가 악재 가득한 한국 경제의 답답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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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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