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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58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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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혁명의 서막]초인플레가 부른 로마제국 몰락의 교훈

▲ 로마제국의 기축통화였던 데나리온. photo 셔터스톡
고대에는 정복전쟁이 곧 경제행위였다. 정복을 통한 부의 수탈과 전쟁포로로 유지되는 노예경제가 국가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전쟁포로 외에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흑해 북쪽 연안과 러시아 지역에서 슬라브족 노예가 많이 수입되었다. 오죽하면 노예 ‘slave’의 어원이 라틴어 sclavus(슬라브)에서 유래되었을까. 당시 노예는 가장 중요한 생산기반이었다. 노예경제를 기반으로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민주정 사회가, 동방에서는 봉건주의 전제국가가 출현했다.
   
   그리스·로마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은 동방과는 다른 기후조건으로 대규모 경작이나 목축이 불가능했다.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지역을 정복하여 토지와 식량을 얻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경제사는 곧 전쟁사를 뜻한다. 이러한 정복전쟁 와중에도 가나안 사람들, 곧 페니키아인들과 유대인들은 해상무역에 종사하며 거래를 통해 교환하는 상업행위를 했다. 약탈경제에서 거래경제로 진화한 것이다.
   
   
   노예경제의 붕괴
   
   그 무렵 로마제국의 경제관은 오로지 농업이었다. 고대에 상업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직업으로 여겨져 경제가 제대로 싹을 못 피웠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은 노예나 상인처럼 천박하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 농업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리스의 영향으로 로마인들도 상업을 이방인이나 하층민이 하는 하찮은 것으로 경시했다.
   
   고대에 부국강병책은 ‘농업과 전쟁’이었다. 자국 농경지를 넓히는 것이 부국이요, 정복지에서 물자와 노예를 가져오는 것이 강병책이었다. 농업의 기본 노동력은 노예였다. 따라서 전쟁이 매우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다. 그런데 빈번한 전쟁으로 그때마다 보병으로 출정한 자영 농민들의 피해는 커져간 반면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과 귀족들은 새로운 영지를 늘려가며 더욱 부유해졌다. 결국 농민층은 점차 몰락해갔고 봉건영주 세력은 점점 더 커져 부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이로써 중산층 농민들이 붕괴되면서 농업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경제는 타격이 더 심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예 부족이었다. 2세기 들어 트라야누스 시대부터는 더 이상 정복전쟁이 없어 노예 공급이 끊겼다. 그 뒤 로마는 극심한 인력난에 빠져 농업 생산체제가 쇠퇴했다. 나중에는 아예 노예를 해방시켜 그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수확의 일부를 상납게 하는 소작농제도가 출현했다. 게다가 2~3세기에는 전염병이 창궐해 인구가 3분의 1가량 줄어들어 농업노동력은 물론 외적과 싸울 병력조차 부족했다. 패배라곤 모르던 로마군대가 번번이 패하게 된 이유였다.
   
   
   인플레이션에도 통화 발행을 늘리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사후 그리스제국이 4개로 분열되면서 시장이 나누어졌고 교역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발행했던 경화 드라크마는 그대로 유통되어 상품이 줄어들자 물가가 뛰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리스 통화 붕괴의 경험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주노(Juno) 신전에 ‘모네타(moneta)’라는 조폐소를 차려 돈을 많이 찍어냈다. 이 이름에서 영어 단어 ‘money’가 유래했다.
   
   로마제국은 새 정복지가 생길 때마다 군대 주둔 유지비가 크게 증가해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였다. 이를 충당할 목적으로 로마 황제들은 여러 정복지로부터 금은 등 귀금속을 세금으로 거둬들여 조폐소에서 돈을 찍어냈다. 스페인 지역에서만 기원전 206년부터 10년 동안 거둬들인 금이 1.8t, 은이 60t이나 되었다.
   
   기원전 3세기 로마제국의 기축통화는 데나리온 은화였다. 포도농장 일꾼의 일당이 데나리온 은화 한 개였다. 기원전 211년 제2차 포에니전쟁 중 로마 원로원에 의해 발행되기 시작한 데나리온은 로마 외에도 각지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지중해 지역의 중요한 통화가 되어 활발한 무역을 가능케 했다.
   
   
   카이사르의 혁명적 경제개혁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천재였다. 그는 정치와 전쟁에서의 천재적인 재능뿐 아니라 경제의 본질도 꿰뚫어보았다. 그가 기원전 59년 수석집정관으로 취임할 당시 로마는 극심한 빈부 격차를 겪고 있었다. 특히 토지의 양극화가 매우 심했다. 카이사르는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집정관에 당선된다.
   
   카이사르 농지개혁법의 골자는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 곧 중산층 양성이 목적이었다. 그는 어려운 농지개혁작업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 뒤 8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을 마치고 돌아와 내전 승리 후 종신집정관이 되자 그는 그간 마음먹었던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정치개혁과 사법개혁을 단행한 후 경제개혁을 밀어붙였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연 48%라는 고율의 이자를 받는 걸 보고 분노했다. 당시 원로원 의원들 대부분이 그런 식의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원로원 의원들이 하는 고리대금업 이자를 대폭 낮추었다. 그는 이자율 상한선을 12%로 제한했으며, 6% 이자율을 권고했다.
   
   또한 일정금액 이상의 현금 보유도 금했다. 장롱예금을 금지해 돈이 바깥으로 돌도록 한 것이다. 이자율 인하와 장롱예금 금지는 돈 흐름을 촉진해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더 나아가 카이사르는 서민의 빚을 4분의 3으로 탕감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탕감된 채권의 회수도 활발해져서 돈의 흐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원로원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카이사르는 조세정책에서도 파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세율을 절반으로 낮추고, 정복지에 대해서도 관대한 세금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오히려 더 많은 세금이 걷혔다. 세금을 피해 도망 다니던 피정복민들의 자진납세가 확산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폐제도에도 손을 댔다. 그 무렵 로마에는 금과 은이 많지 않았다. 전쟁 군비로 바닥난 것이다. 카이사르는 로마 전역 신전들의 봉납물을 공출하여 그것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로마인들은 화폐를 신성한 것이라고 여겼다. 특히 금은 태양, 은은 달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전에서 화폐를 주조했던 것이다. 당시 로마에는 오랫동안 은화와 동전밖에 없었다. 이때 최초로 금화를 찍어내 통화로 편입시킨 것이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로마 화폐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금화와 은화의 교환가치가 고정되어야 했다. 당시 그가 정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은 1 대 12였다. 1년 중 태양과 달의 관계였다. 초기 화폐는 여러 신들의 모습과 같은 종교적 문양이었으나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황제의 모습이 동전에 등장했다. 날마다 보고 만지는 화폐를 선전매체로 활용한 최초의 황제였다.
   
   
▲ 로마의 화폐가치를 결정적으로 하락시킨 네로 황제 동상. photo 셔터스톡

   암살로 이어진 화폐주조권 다툼
   
   그 밖에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에 그간 사용하던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꾼 ‘율리우스 역법’을 시행했다.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윤년을 두어 1년을 365일로 맞춘 것이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화폐주조권을 국가로 귀속시킨 것이다. 국립조폐창을 만들어 원로원의 주조권을 가져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은 기득권의 거센 반발을 무릅쓴 혁명적 조치였다. 화폐주조 차익을 빼앗기고 고리대금업의 수익이 낮아진 귀족들의 불만은 독재자로부터 공화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결국 카이사르 암살로 이어졌다.
   
   카이사르 시대까지만 해도 로마의 금화와 은화는 세계 어디에서든 기꺼이 환영받는 기축통화였다. 하지만 로마 황제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금 광산을 24시간 채굴토록 해 돈을 단기간에 너무 많이 찍어냈다. 당연히 화폐 유통량이 급속히 많아져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이로 인해 주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로마 화폐는 순도 100%의 금화와 은화였다.
   
   로마제국의 화폐가치가 본격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1세기 네로 황제 시절부터였다. 네로는 세금징수 규칙을 공표하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시민에 대한 징수권을 1년이 지나면 소멸시켜 세금을 탕감해 주었다.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일종의 포퓰리즘 정치를 한 것이다.
   
   세수가 줄어들어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64년 네로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된다. 곧 로마 대화재 재건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금화와 은화에 약간의 구리를 섞어 유통시켰다. 처음에는 구리 함량이 적어 시민들이 눈치채지 못했다. 로마재정이 고갈되자 네로는 금화와 은화 순도를 이번에는 각각 4%와 10%씩 낮춰버렸다. 얼마 안 가 그는 금 함유량을 4.5%, 은 함유량을 11% 줄였다. 화폐공급량이 늘자 화폐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올랐다. 당시 로마제국의 은 부족은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원인이었다. 기원전부터 로마제국은 유대인에 의해 중국과의 무역이 발달해 있었다. 로마인들은 중국 비단이나 인도 향신료 등을 구입하면서 주로 은을 지불했다. 중국이 은본위제였기 때문이다. 무역적자가 계속되면서 유럽에서 은이 고갈되어갔다.
   
   
   은화에 구리 섞다 초인플레이션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