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기축통화였던 데나리온. ⓒphoto 셔터스톡
로마제국의 기축통화였던 데나리온. ⓒphoto 셔터스톡

고대에는 정복전쟁이 곧 경제행위였다. 정복을 통한 부의 수탈과 전쟁포로로 유지되는 노예경제가 국가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전쟁포로 외에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흑해 북쪽 연안과 러시아 지역에서 슬라브족 노예가 많이 수입되었다. 오죽하면 노예 ‘slave’의 어원이 라틴어 sclavus(슬라브)에서 유래되었을까. 당시 노예는 가장 중요한 생산기반이었다. 노예경제를 기반으로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민주정 사회가, 동방에서는 봉건주의 전제국가가 출현했다.

그리스·로마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은 동방과는 다른 기후조건으로 대규모 경작이나 목축이 불가능했다.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지역을 정복하여 토지와 식량을 얻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경제사는 곧 전쟁사를 뜻한다. 이러한 정복전쟁 와중에도 가나안 사람들, 곧 페니키아인들과 유대인들은 해상무역에 종사하며 거래를 통해 교환하는 상업행위를 했다. 약탈경제에서 거래경제로 진화한 것이다.

노예경제의 붕괴

그 무렵 로마제국의 경제관은 오로지 농업이었다. 고대에 상업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직업으로 여겨져 경제가 제대로 싹을 못 피웠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은 노예나 상인처럼 천박하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 농업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리스의 영향으로 로마인들도 상업을 이방인이나 하층민이 하는 하찮은 것으로 경시했다.

고대에 부국강병책은 ‘농업과 전쟁’이었다. 자국 농경지를 넓히는 것이 부국이요, 정복지에서 물자와 노예를 가져오는 것이 강병책이었다. 농업의 기본 노동력은 노예였다. 따라서 전쟁이 매우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다. 그런데 빈번한 전쟁으로 그때마다 보병으로 출정한 자영 농민들의 피해는 커져간 반면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과 귀족들은 새로운 영지를 늘려가며 더욱 부유해졌다. 결국 농민층은 점차 몰락해갔고 봉건영주 세력은 점점 더 커져 부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이로써 중산층 농민들이 붕괴되면서 농업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경제는 타격이 더 심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예 부족이었다. 2세기 들어 트라야누스 시대부터는 더 이상 정복전쟁이 없어 노예 공급이 끊겼다. 그 뒤 로마는 극심한 인력난에 빠져 농업 생산체제가 쇠퇴했다. 나중에는 아예 노예를 해방시켜 그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수확의 일부를 상납게 하는 소작농제도가 출현했다. 게다가 2~3세기에는 전염병이 창궐해 인구가 3분의 1가량 줄어들어 농업노동력은 물론 외적과 싸울 병력조차 부족했다. 패배라곤 모르던 로마군대가 번번이 패하게 된 이유였다.

인플레이션에도 통화 발행을 늘리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사후 그리스제국이 4개로 분열되면서 시장이 나누어졌고 교역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발행했던 경화 드라크마는 그대로 유통되어 상품이 줄어들자 물가가 뛰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리스 통화 붕괴의 경험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주노(Juno) 신전에 ‘모네타(moneta)’라는 조폐소를 차려 돈을 많이 찍어냈다. 이 이름에서 영어 단어 ‘money’가 유래했다.

로마제국은 새 정복지가 생길 때마다 군대 주둔 유지비가 크게 증가해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였다. 이를 충당할 목적으로 로마 황제들은 여러 정복지로부터 금은 등 귀금속을 세금으로 거둬들여 조폐소에서 돈을 찍어냈다. 스페인 지역에서만 기원전 206년부터 10년 동안 거둬들인 금이 1.8t, 은이 60t이나 되었다.

기원전 3세기 로마제국의 기축통화는 데나리온 은화였다. 포도농장 일꾼의 일당이 데나리온 은화 한 개였다. 기원전 211년 제2차 포에니전쟁 중 로마 원로원에 의해 발행되기 시작한 데나리온은 로마 외에도 각지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지중해 지역의 중요한 통화가 되어 활발한 무역을 가능케 했다.

카이사르의 혁명적 경제개혁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천재였다. 그는 정치와 전쟁에서의 천재적인 재능뿐 아니라 경제의 본질도 꿰뚫어보았다. 그가 기원전 59년 수석집정관으로 취임할 당시 로마는 극심한 빈부 격차를 겪고 있었다. 특히 토지의 양극화가 매우 심했다. 카이사르는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집정관에 당선된다.

카이사르 농지개혁법의 골자는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 곧 중산층 양성이 목적이었다. 그는 어려운 농지개혁작업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 뒤 8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을 마치고 돌아와 내전 승리 후 종신집정관이 되자 그는 그간 마음먹었던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정치개혁과 사법개혁을 단행한 후 경제개혁을 밀어붙였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연 48%라는 고율의 이자를 받는 걸 보고 분노했다. 당시 원로원 의원들 대부분이 그런 식의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원로원 의원들이 하는 고리대금업 이자를 대폭 낮추었다. 그는 이자율 상한선을 12%로 제한했으며, 6% 이자율을 권고했다.

또한 일정금액 이상의 현금 보유도 금했다. 장롱예금을 금지해 돈이 바깥으로 돌도록 한 것이다. 이자율 인하와 장롱예금 금지는 돈 흐름을 촉진해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더 나아가 카이사르는 서민의 빚을 4분의 3으로 탕감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탕감된 채권의 회수도 활발해져서 돈의 흐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원로원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카이사르는 조세정책에서도 파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세율을 절반으로 낮추고, 정복지에 대해서도 관대한 세금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오히려 더 많은 세금이 걷혔다. 세금을 피해 도망 다니던 피정복민들의 자진납세가 확산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폐제도에도 손을 댔다. 그 무렵 로마에는 금과 은이 많지 않았다. 전쟁 군비로 바닥난 것이다. 카이사르는 로마 전역 신전들의 봉납물을 공출하여 그것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로마인들은 화폐를 신성한 것이라고 여겼다. 특히 금은 태양, 은은 달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전에서 화폐를 주조했던 것이다. 당시 로마에는 오랫동안 은화와 동전밖에 없었다. 이때 최초로 금화를 찍어내 통화로 편입시킨 것이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로마 화폐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금화와 은화의 교환가치가 고정되어야 했다. 당시 그가 정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은 1 대 12였다. 1년 중 태양과 달의 관계였다. 초기 화폐는 여러 신들의 모습과 같은 종교적 문양이었으나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황제의 모습이 동전에 등장했다. 날마다 보고 만지는 화폐를 선전매체로 활용한 최초의 황제였다.

로마의 화폐가치를 결정적으로 하락시킨 네로 황제 동상. ⓒphoto 셔터스톡
로마의 화폐가치를 결정적으로 하락시킨 네로 황제 동상. ⓒphoto 셔터스톡

암살로 이어진 화폐주조권 다툼

그 밖에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에 그간 사용하던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꾼 ‘율리우스 역법’을 시행했다.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윤년을 두어 1년을 365일로 맞춘 것이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화폐주조권을 국가로 귀속시킨 것이다. 국립조폐창을 만들어 원로원의 주조권을 가져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은 기득권의 거센 반발을 무릅쓴 혁명적 조치였다. 화폐주조 차익을 빼앗기고 고리대금업의 수익이 낮아진 귀족들의 불만은 독재자로부터 공화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결국 카이사르 암살로 이어졌다.

카이사르 시대까지만 해도 로마의 금화와 은화는 세계 어디에서든 기꺼이 환영받는 기축통화였다. 하지만 로마 황제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금 광산을 24시간 채굴토록 해 돈을 단기간에 너무 많이 찍어냈다. 당연히 화폐 유통량이 급속히 많아져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이로 인해 주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로마 화폐는 순도 100%의 금화와 은화였다.

로마제국의 화폐가치가 본격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1세기 네로 황제 시절부터였다. 네로는 세금징수 규칙을 공표하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시민에 대한 징수권을 1년이 지나면 소멸시켜 세금을 탕감해 주었다.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일종의 포퓰리즘 정치를 한 것이다.

세수가 줄어들어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64년 네로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된다. 곧 로마 대화재 재건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금화와 은화에 약간의 구리를 섞어 유통시켰다. 처음에는 구리 함량이 적어 시민들이 눈치채지 못했다. 로마재정이 고갈되자 네로는 금화와 은화 순도를 이번에는 각각 4%와 10%씩 낮춰버렸다. 얼마 안 가 그는 금 함유량을 4.5%, 은 함유량을 11% 줄였다. 화폐공급량이 늘자 화폐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올랐다. 당시 로마제국의 은 부족은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원인이었다. 기원전부터 로마제국은 유대인에 의해 중국과의 무역이 발달해 있었다. 로마인들은 중국 비단이나 인도 향신료 등을 구입하면서 주로 은을 지불했다. 중국이 은본위제였기 때문이다. 무역적자가 계속되면서 유럽에서 은이 고갈되어갔다.

은화에 구리 섞다 초인플레이션 발생

117년 로마 역사상 가장 대규모 군사활동을 이끌었던 트라야누스 황제는 은화의 은 함유량을 15% 줄였다. 이후 180년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25%가 줄었다. 그 뒤 셉티미우스 황제 때는 45%, 카라칼라 황제 때는 50%까지 줄였다. 로마 은화의 구리 함량은 점점 늘어나 가치의 3분의 2를 잃어버렸다. 그 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재위 때 데나리온 은화의 은 함유량은 25% 정도였다. 이런 악순환은 지속되어 고티쿠스 황제 시절인 244년에는 데나리온에 함유된 은의 양이 20분의 1에 불과했다. 그 뒤에도 계속 내려가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물건 값이 두 배, 세 배로 뛰다가 나중에는 열 배, 스무 배씩 뛰었다. 220년 무렵 밀 1부셸(약 27㎏)이 200데나리온이었는데 344년에는 200만데나리온이 되었다. 무려 1만배나 되는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이방인들은 상품대금으로 데나리온을 받지 않았다. 로마군대조차 주둔경비로 데나리온을 받지 않았다. 데나리온은 돈으로 인정받지 못해 교역이 줄어들었다.

수입이 막히자 로마가 시도한 첫 번째 조치는 사치품 수입 제한과 귀금속 소장 금지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패한다. 260년 갈리에누스 재위 시 환전상들은 로마 은화를 거절해 사실상 은행이 기능을 상실하고 문을 닫았다. 이로써 경제에 가장 중요한 피가 돌지 않아 화폐 순환이 멈추고 경제가 마비되었다. 데나리온은 가치가 너무 떨어져 심지어 발행한 정부마저 이를 세금으로 받지 않고 순은을 요구했다. 정부가 거둔 은은 다시 가치 없는 데나리온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나중엔 은의 함유량이 5000분의 1까지 떨어졌다.

네로를 로마제국 몰락의 원흉으로 꼽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화폐가치 하락에 불을 댕겨 로마 경제를 돌이킬 수 없는 늪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이다. ‘경화주조의 가치 저하’는 통치자의 공적 부패행위이자 도덕적 타락의 전형이었다.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시민들이 화폐를 불신하고 물물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화폐거래 대신 물물거래를 하자 화폐가 완전히 기능을 잃었다. 겉으로는 태평성대라 불리던 200여년간 지속된 팍스 로마나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로마 데나리온 통화의 몰락은 달러의 교훈이 될 수 있다. 100달러 뭉치. ⓒphoto 셔터스톡
로마 데나리온 통화의 몰락은 달러의 교훈이 될 수 있다. 100달러 뭉치. ⓒphoto 셔터스톡

인류 최초의 가격통제

3세기 말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기축통화인 데나리온 은화를 폐지하고 새로운 은화와 동화를 발행했으나 제국에 만연한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없었다. 301년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인류 최초의 가격통제를 실시했다. 그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최고가격을 정하고 그 가격 이상으로 거래하는 사람들은 엄벌에 처했다. 물론 시민을 보호하려는 ‘선한 의지’였지만 혼란에 빠지면서 시장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로써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고 화폐가 기능을 잃자 군인들의 급여도 소금 등 현물로 지급했다.

그 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화폐조세에서 물납조세로 바꿨다. 가치 없는 화폐를 세금으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제체제는 성격이 바뀌어 각 지역마다 장원제 자급자족 폐쇄경제가 형성되었다. 5년 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새 금화 솔리두스를 주조해 사실상 유통에서 사라진 아우레우스를 대체했다. 그러나 솔리두스는 아우레우스보다 더 빠르게 로마를 빠져나갔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겼고 솔리두스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통화 붕괴가 서로마제국 멸망으로 이어져

이와 함께 서로마제국의 불행한 운명은 시작되었다. 이국땅에 주둔한 로마군대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서로마제국의 영향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금과 은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걸 사용하는 것을 꺼려 사실상 화폐공급이 중단되어 통화시스템이 붕괴되었다.

교역이 위축되면서 유통 상품이 줄어들자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졌다. 해적들이 다시 등장했고 상업이 쇠퇴하자 거래가 중단되면서 시장은 사라졌다. 더 이상 군인들에게 봉급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마지막에는 용병이었던 바바리안들이 로마의 도시를 침략해 약탈했다. 결국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했다. 그리스처럼 서로마제국의 멸망도 전적으로 잘못된 통화정책 때문이었다.

해적의 출현으로 그나마 존재했던 무역활동도 쇠퇴했다. 도시 인구가 시골로 빠져나가 줄어들었고 시골의 대규모 영지는 이들을 농노로 받아들여 자급자족 원시시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로마문명의 상징이었던 도시는 시장의 붕괴와 함께 황폐화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로써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로마 도시문명이 끝나고 암흑의 중세 장원제도가 시작되었다.

로마의 경제적 몰락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진 것은 17세기경 서기 439년에 제정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로마제국 말기의 경제적 취약성, 과중한 과세부담, 중간계층의 몰락, 산업의 파탄, 경작지의 황폐 등 몰락을 가져온 요인들이 자세히 밝혀졌다. 훗날 막스 베버는 로마제국의 멸망은 물물교환 경제를 이루고 있는 경제적 하부구조에 화폐경제로 이루어진 정치적 상부구조가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한 결과 붕괴됐다고 보았다. 곧 시장경제의 파탄이 정치적 붕괴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

로마의 몰락은 현대인에게도 몇 가지 교훈을 알려준다. 첫째,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이다. 불량화폐의 대량주조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화폐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실물 선호도를 높임으로써 통화경제가 몰락해 경제에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거대한 제국도 순식간에 몰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을 알아야 할 이유이다.

둘째, 어떤 국가나 정부도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정치도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역사가 확실히 보여 주었다. 로마제국 몰락 이후 제국이 다른 나라로 대체되지 않고 한동안 무정부 상태의 암흑세계에서 지낸 중세의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셋째, 로마제국의 붕괴를 과거 이야기로 치부하고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동일한 사태가 우리가 사는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다. 달러가 바로 그것이다. 로마 데나리온은 그 가치가 95% 떨어지는 데 200년이 걸렸지만 달러는 50년 만에 그 가치가 98% 이상 하락했다. 1970년 금 1온스당 35달러였던 달러 가치가 2021년에는 금 1온스당 1800달러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대규모 양적완화와 코로나19로 인한 대규모 재정정책,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환율전쟁으로 인해 달러는 앞으로도 그 가치를 얼마를 더 잃어버릴지 모른다. 인플레이션은 시차를 두고 오며 ‘어어’ 하는 사이에 하루아침에 올 수 있다. 우리가 달러의 행보를 유의해서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홍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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