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런던에서 촬영된 소련 스파이 킴 필비 사진. 영국 정보기관 MI6에서 해임돼 1963년 베이루트를 거쳐 소련으로 망명했다. ⓒphoto 뉴시스
1955년 런던에서 촬영된 소련 스파이 킴 필비 사진. 영국 정보기관 MI6에서 해임돼 1963년 베이루트를 거쳐 소련으로 망명했다. ⓒphoto 뉴시스

순수한 선의의, 그러나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개인의 행위가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수많은 사람에게 너무나 큰 폐해를 끼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종종 본다. 일을 저지른 당사자는 자신의 잘못으로 누가 얼마나 큰 피해를 당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창졸간에 하늘이 무너지는 횡액을 당한 사람들은 연유도 모르는 채 통곡한다. 영국 희대의 스파이 킴 필비(Kim Philby·1912~1988)가 한반도 분단 고착의 원흉이 되어 한국인 수천만의 가슴에 한을 심어준 일도 그런 예에 속한다.

한반도 분단 고착에 영향을 준 스파이

킴 필비는 소련 KGB를 위해 일한 일명 ‘케임브리지 스파이 일당(Cambridge Spy Ring)’ 5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냉전 시절 영국 비밀정보국(SIS·Secret Intelligent Service·일명 MI6)의 대(對)소련 방첩작전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영국은 물론 미국 정보까지 소련으로 빼돌렸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었다. 특히 미국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대미 정보 관련 수석연락관으로 근무할 때는 한반도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정보를 소련에 넘겨주었다. 그가 소련에 넘겨준 정보는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해도 미국은 원자탄을 투하하지 않고 압록강 넘어 중국 본토로 확전하지 않는다’는 백악관 정책회의 결정이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기점으로 대동강 이북으로 진군하면서 중공과 소련이 중공군의 참전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필비가 넘겨준 정보 덕분에 소련과 중국은 안심하고 중공군의 압록강 도강을 명령했다.

최근 영국 언론에 킴 필비 관련 기사가 나서 다시 한 번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영국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잉글리시 헤리티지 재단’이 2차대전 중 영국 정보기관 MI6의 수장이던 스튜어트 맨지 경의 재직 당시 관사 벽에 청색원형판(blue plaque)을 달아주는 것을 거절했다는 뉴스가 계기였다. 런던 시내 곳곳의 건물 벽에서 볼 수 있는 청색원형판은 유명인이 살던 집을 기념하기 위해 부착하는 표지판이다. 재단의 공식적인 거절 이유는 ‘역사적인 중요성 정도에 미달해서’였다. 인기 ‘007’ 영화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근무해서 유명한 영국 정보부의 수장이 같은 날 관련 건물에 청색원형판 부착 승인이 난 ‘영국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와 ‘인도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들’보다 역사적 중요성이 적다는 말이었다. 진짜 거절 이유를 밝히라는 기자들의 닦달에 결국 재단 회장은 “맨지가 필비를 대소(對蘇)방첩작전국장으로 승진시킨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맨지 경이 독일군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해서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간첩 필비로 인한 죄과가 크다는 말이었다.

필비는 현대 영국인 중에서 총리를 지낸 처칠보다 관련 책이 더 많은 인물이다. 미국의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 ‘필비’라는 이름을 치면 영어로 된 책만 100권이 넘게 올라 있다.(한국에는 필비 관련 책이 딱 한 권 번역되어 있다. 필비 일당을 런던에서 관리하던 KGB 요원 유리 모딘이 쓴 자서전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이 유일한 번역서다. 재미있는 점은 번역자 조성우씨가 ‘소련 한국대사관 참사관’이라는 약력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사실 KOTRA 직원 명목으로 소련에 파견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최초 요원이었다는 점이다. 조성우 참사관은 1998년 8월 소련의 추방 조치로 뉴스의 초점이 된 적도 있었다.)

왜 영국인들은 아직도 필비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는 의문에는 두 가지 답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필비 이야기는 세인의 관심을 끌 만한 스파이 이야기인 데다가 그가 영국 상류계급에 가까운 중산층 출신의 배반자였다는 점이다. 필비의 아버지 존 필비는 고위 외교관이자 고위 정보요원이었다. 외교관과 정보요원은 전통적으로 영국 상위 중산층의 직업이다. 필비는 영국 최고 기숙사립학교인 웨스트민스터스쿨과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나왔다. 이런 영국 최고 엘리트가 소련을 위한 이중스파이가 된 일을 영국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이해한다’고 하지만 일반 국민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저히 잊을 수 없어한다. 특히 영국인이 항상 강조하는 ‘기득권인 상류층’ 출신이 소련을 위해 조국을 배반한 일이기에 더욱 분개한다.

킴 필비는 영국인 중 처칠보다 관련 서적이 더 많은 인물이다. 벤 메킨타이어가 쓴 ‘친구들 사이의 스파이(A spy among friends)’도 킴 필비 스토리를 다룬 책이다.
킴 필비는 영국인 중 처칠보다 관련 서적이 더 많은 인물이다. 벤 메킨타이어가 쓴 ‘친구들 사이의 스파이(A spy among friends)’도 킴 필비 스토리를 다룬 책이다.

처칠보다 관련 책이 더 많은 영국인

그러나 일부 영국인들은 영국은 필비에게 조국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분석도 한다. 이런 설은 아버지 존 필비의 일생과 아들 필비의 일생이 정확하게 닮은꼴이라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부자의 학교가 완전히 똑같다. 런던 시내 웨스트민스터사원 옆 웨스트민스터스쿨과 케임브리지대학교, 그것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라는 점마저 같다. 더욱이 부자 모두 정보원이었다. 아버지 존 필비는 영국 정보원으로 일하다가 여자 문제로 해직당하자 앙심을 품고 영국 반대편에 서서 중동 국가들의 독립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일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영국의 영향을 벗어나 미국 우산 밑으로 들어간 데는 존 필비의 역할이 컸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은 T.E 로렌스라는 실제 인물이지만 존 필비가 한 일을 영화에서 로렌스가 한 일처럼 포장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아니라 ‘아리비아의 필비’였어야 했는데 아들 필비 때문에 아버지가 영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존 필비는 결국 인도에서 체포되어 영국으로 압송돼 수형생활도 한다. 공산주의 신봉자인 아들은 조국을 등지고 소련을 위해 일하다가 모스크바에서 죽고, 아버지는 무슬림 교도가 되어 영국을 등지고 중동을 위해 일하다가 베이루트에서 죽는다. 해서 아버지의 일생을 본 아들 필비가 영국을 자신의 조국이라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사실 필비 부자가 나온 학교 웨스트민스터스쿨과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좌파 성향의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는 학교였다. 반면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학교는 역사적으로 우파 정치인 졸업생이 많았다. 찰스 1세와 올리버 크롬웰의 시민전쟁 때도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는 왕당파의 본부였고, 크롬웰이 졸업한 케임브리지가 시민군의 본부였다. 지난번 보수당-자민당 연합정부 때도 총리였던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은 이튼과 옥스퍼드를 나왔고, 부총리였던 진보 성향의 자민당 당수 닉 클레그는 웨스트민스터와 케임브리지를 나왔다.

필비에 대한 관심이 꺼지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케임브리지 일당의 배반 동기가 돈이나 혜택 같은 물질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신념이었다는 점이다. 케임브리지 5인은 대학을 다닐 때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1933년 소련정보부(KGB)의 포섭으로 정식 스파이가 되었다. 별다른 동기 도 없었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1917년 군주봉건제도를 파괴하고 인민과 노동자 천국을 세웠다는 소련을 당시 유럽 지식인들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간전기(間戰期)였던 당시의 시대 상황은 유럽을 삼킬 듯이 번져가는 파시즘과 대공황의 여파 등으로 자본주의의 종말을 곧 볼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구할 방법은 공산주의밖에 없다고 케임브리지 일당은 믿었다. 새로운 질서만이 인류의 미래를 더 밝게 한다고 확신한 것이다.

공산주의와 소련을 믿은 확신범

이들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라는 이유로 소련을 위한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노동자와 서민을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련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래서 케임브리지 5인은 어떤 금전과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일편단심으로 봉사했다. 오로지 자신들의 행동으로 썩어가고 있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하루라도 더 빨리 당길 수 있다고 자기 확신을 더욱 다졌다.

소련은 전혀 물질적인 보상을 요구한 적도 받은 적도 없는 이들을 신뢰했다. 한때 소련이 금전적인 보상을 권했지만 이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세상은 이들을 ‘마지막 낭만 공산주의자들(Last Romantic Communists)’이라고 미화한다. 영국인 중에는 필비 일당을 악의적으로만 보지 않는 사람도 많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럴 이유가 없는 집안의 잘 배운 젊은이들이 생애를 바쳐 가시밭길로 매진한 점을 높게 사기도 한다. 그들이 매진한 길이 결코 옳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 ‘순수하고 선의로 가득한 확신범들의 열정’은 인정해 줘야 한다는 역설이다.

그런 인사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필비의 절친이었던 영국 소설가 그레엄 그린이다. ‘권력과 영광’ ‘조용한 미국인’ ‘제3의 사나이’ 등의 작품을 남긴 그린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번 올랐으나 필비를 옹호하는 바람에 탈락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필비는 그린의 MI6 상관이기도 했다. 그린은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의 문호가 열리자 수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으로 탈출한 필비를 만났다. 그리고는 필비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끝까지 필비를 변호했다. 필비의 자필 자서전 ‘나의 조용한 전쟁(My Silent War)’에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그린은 필비의 다음과 같은 궤변을 전달하기도 했다. “전쟁은 서로가 침공하리라는 공포로부터 시작된다. 서로의 깊은 생각을 알게 되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두 나라의 심중을 서로에게 전해주어 전쟁을 피하게 했다.” 자신이 영국과 미국의 기밀을 소련에 전해준 건 단순히 전쟁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이루려는 충정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궤변이 영국인 사이에서는 아직도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필비 관련 기사는 지금도 인기가 있다.

문제는 이들 필비 일당이 소련이 자신들이 찾고 추구하던 이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계속해서 소련에 충성을 바쳤는가 하는 점이다. 왜 그들이 소련에 봉사를 자원했는지와 함께 필비 일당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 의문이다. 이들이 KGB에 봉사를 맹세하던 1933년은 이미 10월혁명이 일어난 지 16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소련 사회제도의 모순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스탈린의 피의 통치가 절정에 이르던 때였다. 혁명 수행을 위해 인민의 적 수백만 명을 처형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1939년 소련이 나치 독일과 폴란드를 양분 점령하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독·소 불가침 평화조약을 자신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히틀러의 독일 파쇼정권과 맺는 걸 보고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조국을 배반할 정도로 지적이고 정의감 있던 젊은이라면 소련이 이미 자신들이 추구하던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터인데 왜 계속 충성했는지 의문이 많다. 소련을 위해 봉사할 이유인 사상적 동기가 이미 사라져버렸는데도 말이다.

소련의 실상 보고도 미망에서 못 벗어나

필비 일당은 영국을 중세 봉건 왕정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국주의를 유지하려는 국가로 보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자신들이 이상향이라고 숭배해 마지 않던 소련이 제국주의의 마각을 드러내는 조약을 독일 파쇼 정권과 맺으며 제국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도 이들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세상을 구하려고 자신의 평생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총명한 젊은이들이 왜 미망(迷妄)에서 헤어나지 못했는지에 대한 논란을 필비 관련 책마다 거론한다. 그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한번 밀교의 독이 든 성배를 마시고 나면(drunk from the poisoned chalice of that secret church) 사고의 사망(death of mind) 상태가 되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공산주의 이론에 한번 빠지면 확신 편향의 시선으로 모든 걸 보게 되어 다른 것이 눈에 안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 사람들 눈에는 다 보이는 소련의 실상이 어찌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긴 필비의 눈에도 뭔가가 보이긴 보였나 보다. 물론 이미 모든 일이 끝난 시점에서 나온 뒤늦은 후회였지만 말이다. 그의 네 번째 부인인 소련인 루피나 필비가 쓴 자서전 ‘킴 필비의 개인사’(The Private Life of Kim Philby·1999년간)에 보면 “필비가 자신의 이상향으로 여기던 소련의 실상을 보고 실망한 듯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특히 모스크바 거리의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들을 보고 “저들이 결국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들인데”라면서 울었다고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가 만들겠다던 노동자의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필비는 죽을 때까지 “나는 조국을 배반한 일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다. 내가 일을 하기 위해 했던 일 중 실수에 대한 것 말고는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가 없다”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내게 만일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다시 그 일을 할 것이다. 아주 똑같은 방법으로 말이다(If I had a chance I would do it all again. I would do it exactly the same way)”라는 주장을 폈다고 한다.

부인 루피나의 말과는 달리 아들 토미 필비는 아버지가 끝에 가서는 자신이 한 행동이 오류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도 했다. 공산주의가 망해가는 걸을 보면서 “그는 끝에 가서는 결국 자신이 틀렸었음을 알았다(He thought, at the end, that it was wrong)”고 말했다는 것이 아들의 전언이다. 결국 필비도 나중에는 자신이 평생을 좇은 무지개가 신기루였음을 안 듯하다. 필비는 모스크바에서 영웅의 귀환 대접을 받고 25년간 살다가 1988년 사망한다. 자신에게 중요한 자리를 맡길 줄 알았으나 끝까지 한직에서 소일하게 만들자 ‘주로 술로 위안을 삼았다(The bottles provided the solace)’고 필비 전기 작가들은 묘사한다.

사람은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일을 부정하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한다. 인간은 그래서 한번 길을 잘못 들면 다시 돌아오기가 참 어렵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가끔 자신이 오랫동안 믿었던 것이 틀렸다는 걸 알고 과감하게 돌아서는 용기 있는 사람도 있다. 그중 하나가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1869~1951)다.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었던 지드는 1936년 소련을 다녀와서 ‘소련 방문기 1936’을 써서 당시 유럽을 발칵 뒤집었다. 지드는 책에서 “소련이 결코 농민의 천국이 아니고 새로운 지배계급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봉건제도”라고 갈파했다. 자신이 받았던 환대를 엄청나게 불편해하면서 소련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지드의 책은 출간 3개월 만에 150쇄를 찍는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당시 소련에 대한 비판은 유럽 지식인 사이에서는 절대 금기사항이었다. 소련의 치부를 번연히 알면서도 눈을 감고 애지중지 다칠까 보호해야 하는 게 지식인들의 무언의 합의이자 미덕처럼 받아들여졌다. 지드는 그걸 용감히 깬 거인이었다.

필자는 환상을 갖고 소련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사실 킴 필비에 대해서는 대학생 때부터 관심이 많았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일생을 어둠 속에서 매진할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이후 필비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읽었고 우연찮게 킴 필비가 살던 영국과 러시아 두 나라에서도 살아봤다. 또 영국 언론에 나오는 필비 기사를 지금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본다. 결국 필비의 일생을 보고 느낀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무서운 인물은 어리석으면서 용감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어리석고 용감하고 거기다가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어리석고 용감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앞의 모든 사람보다 더 최고로 무서운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신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믿는 이다.”

세계 각 곳에서 테러를 벌이는 테러리스트들이 바로 마지막 그룹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젊었을 때 한때 믿었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잘못된 길에 덜미가 잡혀 있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어리석고 용감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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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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