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photo 셔터스톡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photo 셔터스톡

영국 정치 환경을 보면 ‘지도자는 태어나지 않고 길러진다(Leader is not born but made)’는 말이 그냥 구호만은 아닌 듯한 생각이 든다. 그만큼 젊은 정치인을 길러내는 제도가 잘 정비돼 있어서다. 그래서인지 영국 하원은 ‘의외로’ 젊다. 통계로 보자.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선출된 영국 하원의원 650명의 평균연령은 50세이다. 1979년 이후 ‘평균연령 50세’는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렇게 보면 영국 하원이 굉장히 늙은 의회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이다. 나이 많은 하원의원들이 있어서 그렇지 하원의원의 과반수인 332명(51%)이 20대 20명을 비롯해 30~40대이다. 하원의원 두 명 중 한 명이 청장년층이라는 말이니 젊은 의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선 대패에서 시작된 보수당 청년 조직

이렇게 영국 정계가 젊어진 것은 각 당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한 결과이다. 영국 각 당은 모두 청년층을 상대로 한 별도 조직을 갖추고 있다. 보수당은 ‘젊은 보수당(Young Conservative ·YC)’, 노동당은 ‘젊은 노동당(Young Labour)’, 자민당은 ‘젊은 자민당(Young Liberal)’ 등 청년 조직이 다 있다. 거기다가 영국의 모든 대학에는 각 당의 대학생 조직이 있다. 여기를 거친 젊은 당원들이 사회로 나오면서 계속 정당활동을 하고 정계로 진출한다. 현 총리인 보리스 존슨은 옥스퍼드대학교 때부터 보수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거의 모든 영국의 총리나 고위직 정치인은 대학교 때부터 이미 당 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사람들이다. 영국의 젊은이들은 정당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정치활동하는 것을 절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영국인들도 정치를 ‘더러운 단어(dirty word)’라고 비하하기는 한다. 또 정치인을 ‘가장 신임할 수 없는 직업’이라고 꼽는 유권자가 78.1%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만큼 정치와 정치인을 기피 대상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 정치를 기피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많은 젊은이가 정당에 가입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국 모든 정당의 지역당 하부 조직의 가장 큰 힘 역시 청년 당원들이다. 특히 보수당 청년 조직 YC는 1945년 보수당의 총선 대패(大敗)가 계기가 되어 만들어진 전통의 조직이다. 당시 총선에서 윈스턴 처칠이 이끌던 보수당은 의회 의석 197석을 차지하는 데 그쳐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끌던 노동당 393석의 딱 절반 의석을 얻는 충격적인 패배를 했다. 보수당은 대패의 원인을 청년층의 지지를 얻지 못한 데 있다고 보고 젊은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때 두 개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하나가 6~16세까지의 학생 그룹과 17~25세까지의 청년 그룹이었다. 이 중 청년 그룹은 1955년에 15만 회원을 거느릴 정도로 거대 인기 조직으로 커갔다. 당시 수많은 중산층 젊은 부부들이 바로 YC 모임에서 장래 상대를 만났을 정도였다. 보수당 청년 조직은 정치 결사 단체라기보다 일종의 사회활동을 하는 사교클럽 성격으로 세를 불려 나갔다. 정치적인 모임에 활동이 국한되지 않고 댄스파티, 자선공연, 봉사활동 등을 통해 젊은이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 조직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보수당은 환골탈태해서 6년 뒤인 1951년 총선에서 321석을 얻어 295석을 얻은 노동당으로부터 바로 정권을 뺏어왔다. 이 청년 조직은 한때 ‘보수의 미래(Conservative Future)’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지금은 다시 YC로 이름을 바꿔 존재한다. 역대 YC 전국조직 회장들은 거의 하원에 진출했다.

영국 보리스 존슨 현 총리(왼쪽)는 옥스퍼드대학 시절부터 보수당원 활동을 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운데)는 30세에 하원의원, 40세에 당수, 43세에 총리가 됐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34세에 하원의원, 39세에 당수, 역시 43세에 총리가 됐다. ⓒphoto 뉴시스
영국 보리스 존슨 현 총리(왼쪽)는 옥스퍼드대학 시절부터 보수당원 활동을 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운데)는 30세에 하원의원, 40세에 당수, 43세에 총리가 됐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34세에 하원의원, 39세에 당수, 역시 43세에 총리가 됐다. ⓒphoto 뉴시스

정치 신인이 도전하는 시의원 코스

영국 젊은 세대들은 정당에 들어와 각 지구당에 소속되면서 정치를 하나하나 배워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선출직에 도전한다. 아주 드물게 바로 하원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 풀뿌리 정치인인 구의원이나 시의원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영국의 구의원과 시의원 둘 다 ‘카운슬러(councilor)’라고 부른다. 큰 도시에서는 카운슬러가 구의원 개념이고, 작은 도시에서는 시의원의 개념이다. 영국 전체에는 현재 2만224명의 카운슬러가 있는데 이들은 하원의원만큼이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 영국은 런던을 비롯한 일부 대도시를 빼고는 선출직 시장이 없다. 해서 지방의회 다수당 지도자가 의회 의장이 되어 시정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시정 업무의 정점에는 시의원이 있다. 시의원이 심의결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시정을 끌고 간다. 영국 여당 하원의원이 정부에서 우리의 장·차관 심지어 국장 일까지 하는 것과 같다.

사실 알고 보면 영국 하원의원은 국가적인 업무만 할 뿐이어서 자신의 지역구 일에는 전혀 실권이 없다. 그래서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의원의 손을 빌려야 한다. 거기다가 선거를 할 때는 시의원들이 선거운동원이 된다. 시의원이 말단조직의 책임자가 되어 일일이 유권자 가정을 방문해 실시하는 정치 성향조사(canvassing)를 비롯해 홍보 유인물 배부, 각종 토론 모임 등을 주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군 의원 공천권을 국회의원이 쥐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거꾸로 시의원이 갑인 셈이다. 하원의원은 어찌 보면 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의원은 하원의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의원은 실제 업무가 엄청나게 많다. 시정을 하나하나 챙겨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들의 실생활에 가장 밀접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자리가 시의원이라 할 수 있다. 영국에서 정치 신인들이 맡는 카운슬러는 시민들의 일상을 책임지는 자리로 여겨진다. 자신의 지역구 내의 도로 아스팔트 포장, 가로등 설치 순서 같은 일을 시의원들이 정한다. 시민들은 동네 길의 아스팔트 포장 문제를 구청보다는 시의원에게 전화해서 항의하거나 처리를 부탁한다. 건축 허가, 주류취급 허가, 쓰레기통이나 가로등 설치 등 자잘한 문제도 시의원들이 민원을 받아 처리해 준다. 바로 문자 그대로 ‘기초의원’인 셈이다.

영국에서 정치 신인들이 도전하는 시의원은 겸직이 정상이다. 자신의 생업이 따로 있고 시의원은 부업이다. 대개의 회의가 퇴근 후인 저녁 시간에 열리지만 민원은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엄청난 업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시의원의 평균 주당 업무시간은 20시간에 육박한다. 자신의 생업 이외에 추가로 주당 20시간을 일하는 셈이다. 거기에 비해 세비는 엄청나게 박봉이다. 시나 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연간 6000파운드(900만원)부터 1만파운드(1500만원)에 불과하다. 거의 봉사직으로 봐야 마땅하다. 한국의 광역의원 세비 5375만원, 기초의원 세비 3800만원에 비해도 엄청난 박봉이다. 도저히 시의원 세비로만은 생활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거의 자원봉사이거나 열정을 착취당하는 열정페이 수준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영국 시의원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하기 마련이다. 장래의 정치적 야망이 분명하게 있어 경제와 시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야망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각오가 있는 젊은이거나, 은퇴해서 시간 여유가 많은 동네를 잘 아는 은퇴자가 하는 걸로 정해져 있다. 만일 기혼의 청년 시의원이라면 가정·직장·정치라는 3개의 공을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굴리는 요술사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세비는 적고 업무는 많고 겸업이라 자기 시간 내기도 힘들다. 동네의 온갖 업무와 민원이 쏟아져 들어와서 휴대전화 2개로도 모자랄 정도이다. 그래서 청년층에서는 시의원 하려는 후보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입신영달 노리는 사람은 지역구서 걸러져

그러나 영국에서 정치인으로 크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시의원으로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시의원이 아무리 힘들어도 정치적 장래를 위해서라면 견디고 참아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사실 시의원은 현실 정치를 배우고 경험을 쌓기에는 너무나 좋은 자리이다. 시정 업무를 통해 중앙정부의 일도 배울 수 있고, 민원인인 유권자들과 소통하는 방법과 기법을 익히기에도 최고다. 그렇게 해서 경험을 쌓고 경력이 누적되면 중앙무대 하원의원으로 진출하는 길이 열린다. 그러고 보면 영국의 사회제도는 아직도 중세 도제제도를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영국의 인턴은 일반 기업도 일부 부자 회사를 빼고는 모두 무급이다. 병원 의사 인턴도 박봉에 엄청난 근무시간을 견뎌야 한다. 변호사는 시험 합격 후에 개업 자격증을 받기 위해 로펌에서 박봉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렇게 사회생활 시작 단계의 영국 젊은이들은 일정 수준의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고난을 참고 견뎌야 영광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중세의 도제제도를 연상케 하는 시스템이다.

하긴 하원의원도 시의원보다 조건이 조금 낫긴 하지만 업무의 양이나 중요성에 비하면 거의 봉사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아직도 영국 하원의원에게는 겸직이 허용된다. 원래 영국의 하원의원은 명문가의 자제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명예로운 봉사나, 가문이 종사하는 업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대표로 나오는 자리였다. 그래서 세비는 하원의원이 되는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하긴 영국의 사회를 지탱하는 거의 모든 직위들이 무보수의 자원봉사자들로 채워진다는 사실에도 이를 비춰 볼 수 있다. 영국박물관, 내셔널갤러리, 테이트미술관, 로열아카데미를 비롯한 각종 거대 공기관들과 공사립 학교, 종합병원, 자선단체 운영위원들이 모두 무보수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무보수 자원봉사 시스템을 두고 한 하원의원은 “그건 열정의 세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이 거기에 던져진 뒤에 만일 헌신을 각오하면 뭔가를 해낼 수 있다. 그걸 위해서는 나중에 의회에 들어가서도 단단한 결의와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라고까지 했다.

영국의 정치인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현실 세계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순수한 이유에서 정치에 뛰어든다. 물론 자신의 입신영달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없진 않다. 그러나 그런 정치인은 드물다. 이유는 정치 신인 때 이미 걸러지기 때문이다. 영국 정당, 특히 지구당은 정당이라기보다는 사교클럽 같다. 각 지구당의 인원이라 해봤자 200~500명 정도이다 보니 당원들은 모두 서로를 자신의 식구만큼 잘 알게 된다. 시의원이든 하원의원이든 자리를 차지하려면 일단 동료 당원들의 동의부터 반드시 받아야 한다. 영국 하원의원이 되기 위한 불문율이 있다. 갑자기 당의 홍보 목적 등으로 정치를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신인을 하원의원 후보로 영입하는 경우가 절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지구당에서 시작해서 잔뼈가 굵어야 후보 자격이 주어진다.

만일 어떤 당원이 순전히 자신의 입신양명과 출세를 목적으로 당 활동을 한다면 당연히 주위 동료 당원들은 알아채기 마련이다. 워낙 가깝게 활동을 하고 자주 만나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대다수의 동료 당원들은 그런 당원이 선출직 후보가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거기다 거의 모든 지구당에는 활동을 오래한 평당원 원로들이나 산전수전 다 겪은 은퇴 정치인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필자도 자민당 당원으로 겪어봤지만 그들의 당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은 놀랍고 감동적이다. 그들은 이제 막 정치를 시작하려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거의 정확하게 자질과 품성의 옥석(玉石)을 가려낸다. 그런 뒤 그들은 일종의 후견인이 되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당원을 옆에서 훈련시키고 조언과 후원도 해준다. 그래서 영국 정치에서는 자신의 야망만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말도 있다. 당에 대한 충성은 물론 봉사정신과 인간성까지도 갖추어야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얘기다.

영국 보수당 맨체스터 지역의 ‘청년 보수(YC)’ 홈페이지.
영국 보수당 맨체스터 지역의 ‘청년 보수(YC)’ 홈페이지.

각 당이 운영하는 ‘차세대 프로그램’

이렇게 지구당에서 시의원을 통해서나 평당원 활동을 통해 지구당 동료들의 인정을 받으면 각 당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차세대 프로그램’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를 보수당은 ‘하원의원 후보 승인 명단(Approved List of Parliamentary Candidates)’이라고 부른다. 총선이 끝나 새 의회가 구성되면 보수당은 바로 새로운 후보 승인 명단 작성을 시작한다. 대개 지구당 추천에 의해 중앙당이 과거의 당 활동, 각종 능력, 경력 등을 감안해서 인터뷰를 통해 명단을 선정한다. 후보 선정팀(candidate team)에 의해 후보 승인 명단에 포함되면 그때부터 중앙당 차원에서 각종 훈련과 교육을 시행한다.

그리고 승인 명단은 바로 현장팀(field team)에 넘겨진다. 이후 현장 팀의 인도하에 후보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의원 후보가 되기를 원하는 지역에서 당 활동을 시작한다. 지구당의 현역의원이 다음 총선에서 은퇴하거나 유고가 생겼는데 특별한 후보가 없는 지역구에서는 이 명단 후보들에게 인터뷰 통보를 한다. 여기에 응하면 지역구 당원들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후보로 선정되는 절차를 거친다. 일단 이 명단에 올라야 하원의원이 되는 첫 관문에 들어서는 셈이다.

명단에 오른 후보는 어느 지역구에라도 응모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지역구만을 원한다면 굳이 승인 명단에 포함될 필요 없이 해당 지구당에서 공천하면 되지만 만만치가 않다. 지구당 공천을 받기 위해서는 지구당 내의 거의 모든 당원과 접촉해야 한다. 이 과정을 ‘허스팅(hursting)’이라고 한다. 보통 ‘캠페인(campaign)’이라고 부르는 총선 유세 과정에서 유권자들과 접촉해 표를 얻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구당원들 거의 전체 표를 얻어야 공식 후보가 되는데 이런 후보 선출의 깐깐함이 영국 정치의 자산이자 미래다. 특히 보수당은 이런 엄격한 후보 선출 절차를 통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차세대 정치인을 키워왔다.

예컨대 2006년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 지도부에 의해 채택된 ‘A-리스트(list)’는 미래 후보를 보다 다양한 배경에서 뽑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유권자들과의 소통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지역구와 연관도 있고 당 활동도 활발한 인재를 뽑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다양한 인종, 성별, 사회계층 후보를 찾으려고 했다. 변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노동계급, 여성, BAME(흑인·아시안(여기서는 인도계를 뜻함)·소수민족), 소수성애자(LGBT), 신체장애 후보들을 발굴하기 위한 시도였다. 당시 첫 시도에서 150명을 선정했는데 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원래 의도와는 달리 보수당 일반 당원들로부터는 좋은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결과는 훌륭했다. 명단에 포함되었던 후보 중 51명의 하원의원, 5명의 유럽의회 의원, 2명의 런던시 의회의원이 배출되었다.

영국 하원 풍경. 총선이 끝나고 새 의회가 구성되면 영국의 각 당은 지구당 추천을 받아 새 하원의원 후보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photo 뉴시스
영국 하원 풍경. 총선이 끝나고 새 의회가 구성되면 영국의 각 당은 지구당 추천을 받아 새 하원의원 후보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photo 뉴시스

양지에만 보낸 여성 정책지구당 제도

당시 노동당도 ‘미래후보계획’이란 비슷한 프로그램을 통해 신인 정치인 훈련과 후원을 해서 성공적으로 젊은 정치인들을 배출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자민당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중앙당이 모집해서 승인된 후보는 어느 지역 선거구에도 응모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중앙당의 후보평가단이 평가해 공인한 후보 명단이 있는데, 매년 이 명단을 갱신한다. 그런 후보 중에서 지구당이 선정해 후보로 지명한다.

영국 각 정당이 하원의원 후보에 다양한 사회계층을 대표하려는 선출방식을 도입한 결과 과거에 비해 영국 정치는 큰 변화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여성 하원의원이 현격하게 늘었다. 현재 650명의 하원의원 중 여성 의원은 220명(34%)이다. 1979년에는 19명(3%)이었으니 40여년 만에 10배가 는 셈이다. 노동당은 여성 의원 비율이 더 많다. 여성 의원이 104명(51%)으로 남성 의원(99) 숫자를 넘어섰다. 자민당은 64%가 여성 의원이나, 보수당은 아직도 24%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당 여성 의원이 이렇게 많아진 결정적 이유는 지금은 양성지위법에 위반이 되어 폐지된 여성 정책지구당 제도(AWS·All-Women-Shortlists) 덕분이다. AWS 지역구는 안정적으로 노동당 의원을 배출한 지역구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여성 의원 후보를 정책적으로 보내 지원하는 제도이다. 여성 의원 후보를 이른바 ‘험지’로 보내지 않고 분명히 당선되는 지역에 보낸다는 뜻이다. 이번 총선에서 한국의 보수당이 젊은 후보들을 험지에 보내 논란을 일으킨 것과는 분명히 대비된다.

신체장애자 선출직을 위한 지원책도 있다. 선출직에 출마하려는 사람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도 있다. 250파운드(37만5000원)부터 4만파운드(6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이 경비는 신체장애자가 선출직을 위해 활동할 때 생기는 불편을 해소해 주려는 목적이다. 예를 들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힘든 경우 교통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수화통역비, 원거리 출장 경비와 보조인원의 숙소 경비 등에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영국 정치계는 다양한 사회 배경의 젊은 정치인을 기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은 젊은 피를 과감하게 수용한 정도를 지나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 정치계 총수의 자리까지 오르게 만들어 영국 정치의 황금기를 장식했다. 노동당 역사에서 유일하게 3번의 총선 승리를 이끈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30세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40세에 당수가 된 지 3년 뒤인 43세 때 총리가 되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34세에 하원의원이 된 후 5년 뒤인 39세에 보수당 당수가 되고 4년 뒤인 43세에 총리가 되었다.

영국 전당대회는 형식적인 잔치 분위기에서 일사천리로 사안이 처리되는 곳이 아니다. 실질적인 정책을 논하는 자리여서 후보들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해서 당원들로부터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축제 분위기이면서도 실질적인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제전이다. 지구당의 추천으로 전당대회에 참석한 평당원도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평당원과 이름 없는 하원의원이 하룻밤 사이에 신데렐라로 떠오르는 기회가 생기는 곳이 바로 영국의 전당대회이다. 블레어나 캐머런이 전국적인 인사로 떠오른 곳도 전당대회였다. 특히 캐머런은 인상적인 전당대회 연설로 대회 당일부터 당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다음 날 영국 신문에 ‘보수당을 구할 차세대 영웅’으로 바로 떠올랐다. 현 영국 야당인 노동당의 경우, 차세대 선두를 달리는 현 런던 시장 사딕 칸도는 2세대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으로, 노동당 의회 후보 공개 모집을 통해 31년 경력의 현역의원을 제치고 공천을 따내 하원의원이 됐다. 이렇게 영국 정치는 한편으로 오래된 전통에 얽매여 아주 고루해 보이지만 사실은 항상 새 피를 수혈하기 위해 노력하는 ‘열린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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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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