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출연한 한국전 참전군인 콜린 태커리. ⓒphoto 유튜브
지난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출연한 한국전 참전군인 콜린 태커리. ⓒphoto 유튜브

인간이든 국가든 신세를 지면 기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인간과 국가의 자격을 갖는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그 전쟁에서 스러진 영국 군인들을 기억하면서 든 생각이다. 영국과 한국이 외교관계를 맺은 1883년 이후 137년 동안 양국이 역사에서 직접 조우한 것은 딱 두 번이다.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영국 해군의 거문도 무단 점령이 첫 번째다. 다음이 1950년 6·25전쟁 때 영국군이 유엔군의 일환으로 한국에 파병된 일이다. 영국군은 3년간의 파병 동안 연 9만여명이 참전, 1078명이 전사하고 2600여명이 부상했다. 이는 미군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영국군이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영국에서도 한국전(Korean War)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다. 영국 교과서에도 언급이 없다. 1차대전에 희생된 말(馬) 기념물을 비롯해 별별 전쟁기념비를 다 세우면서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2014년, 그것도 한국 측 주동으로 런던 템스 강변 국방부 옆 정원에 겨우 세워졌다.

그만큼 영국에 한국은 그냥 먼 나라일 뿐이다. 그런 영국인 중에서 한국을 아주 가깝게 느끼는 사람들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이다. 대부분 90세에 가까운 그들은 아직도 한국 이야기를 하면 밤을 새울 듯이 열성을 보인다. 현재 3000여명이 생존해 있다. 한국 재향군인회 영국지부(회장 장희관)가 매년 경비를 대서 6·25전쟁 기념일을 전후해 주최하는 참전용사 초청 축제에는 전국에서 약 300여명이 참석해 안부를 나누고 한인들과 교류하면서 한식을 즐긴다. 그런 참전용사 중 한 명이 지난해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콜린 태커리(Colin Thackery)가 한국에도 잘 알려진 노래 경연대회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BGT)’ 최종결선에서 우승해 상금 25만파운드(약 3억7500만원)를 받았다. 태커리는 1930년생으로 현재 90세다. 태커리는 1차전부터 영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우승 당시 89세로 대회 역사상 최고령 출연자였다. 태커리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단 세 곡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영국에서 부산으로

태커리와 대면 인터뷰를 하기로 했으나 워낙 고령인 데다 코로나19 때문에 전화 인터뷰로 만족하기로 했다. 영국 육군 왕립 포병부대(Royal Artillery) 포병이었던 태커리는 한국전 출정 명령을 받고 1950년 9월 20일 수송선에 실려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를 떠나 6주 뒤 부산항에 도착했다. 태커리는 그 뒤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2년간 한반도 전체를 누비며 전투를 했다. 그중에도 유명한 임진강전투에 참여한 글로스터 연대를 지원했다. 글로스터 연대 600명은 중공군 3만명을 맞아 영웅적인 공성전을 벌이고 서울을 지켰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여명이 전사한 반면 글로스터 연대는 단 59명이 전사했다. 나머지는 전부 포로가 되었고 겨우 39명만이 탈출했다. 연대 전체가 사라진 셈이다. 다음은 태커리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사우샘프턴을 떠나 한국으로 가는 항해는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배 안에서 공연단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원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해서 노래에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우리 포병대는 모든 병사에게 악기를 배우게 해서 나는 드럼을 쳤다. 이 경험이 결국 나를 살아서 영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태커리는 전투 중 포탄이 바로 옆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청력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지만 전화 인터뷰는 문제가 없었다.

“부산 항구에 도착했을 때 미군 흑인 밴드가 환영해 주었다. 부산에 대한 인상은 별로 없다. 기차를 타고 임시 주둔지 수원으로 가는 도중 북쪽에서 내려오던 피란민을 만났다. 남루한 옷을 입고 짐을 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 게릴라들이 피란민처럼 위장하고 우리를 수차례 공격해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가 첫 전투 경험이었다. 적이 총을 쏘니 자동으로 응사를 하게 되더라. 신기한 경험이었다.”

태커리는 15살에 군에 입대했다. 19살에 부대 내 댄스파티에서 부인 조안을 만나 66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한국전 출정 명령을 받고서 결혼식을 서둘러 치르고 2주 뒤 한국행 배를 탔다.

“내 결혼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나를 ‘못된 놈(naughty boy)’이라고들 하는데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말이면 댄스파티에 다니면서 보내다가 갑자기 명령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조안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도 돌리지 않고 청혼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로맨틱한 청혼이 아니어서 유감이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 청혼을 받은 조안은 ‘예스! 예스! 예스!’라고 대답했다.”

당시 여성들은 대부분 직업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 사귄 애인과 출정 전 결혼하는 것이 하나의 선물이었다. 월급이 부인에게 지급되고 전사하면 연금도 지급되기 때문이었다.

“우리 800명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배를 탔다. 한국이라고 목적지는 들었으나 한국을 아는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중공과 미국 사이에 한국이라는 곳에서 전쟁이 벌어져 미군을 도우러 간다고 들었다. 사랑하는 조안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군인으로서 첫 전투를 간다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전 참전 당시 위문공연단에서 근무할 때의 콜린 태커리씨.
한국전 참전 당시 위문공연단에서 근무할 때의 콜린 태커리씨.

적보다 한국의 겨울 추위와 전쟁

당시 영국인들은 한국전쟁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되었고 2차대전 중에 시행되던 모든 생필품 배급이 계속되던 시절이어서 또 하나의 전쟁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휴전으로 한국에서 철수한 군인이나 귀환포로들이 돌아올 때도 환영행사조차 없었다.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영국 정부는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의 노동당 정부였다. 애틀리는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고도 승자의 저주로 국민들로부터 내침을 당한 윈스턴 처칠에게 이겨 집권을 했다. 하원에서 영국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멀고도 먼 한국으로의 출정 이유를 묻는 야당 보수당 의원 질문에 애틀리가 한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맞다. 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건 하나의 의무이다.(Distant, yes, but nonetheless an obligation.)” 영국군의 한국전 참전은 전혀 내키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2차대전 중 신세를 진 미국의 종용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모든 참전용사들이 하나같이 한국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꼽는 것은 추위였다. 태커리도 마찬가지였다.

“영하 40도의 추위는 정신을 못 차리게 하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의무부대가 동상에 걸리지 않는 교육을 했지만 나도 그때 다리에 동상이 걸려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한국의 겨울은 정말 살인적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추위를 정말 싫어한다.”

영국 날씨는 영어로 표현하면 ‘부드럽다(mild)’이다. 여름에도 20도를 잘 넘지 않고 습기도 없다. 한겨울에도 영하 5도 이하로는 안 내려간다. 무섭게 추운 한국의 겨울에 야전 참호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간다.

“추위 때문에 나는 ‘털모자 하나와 바꿔진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휴전 협상으로 좀 조용해지자 사령부에서는 위문공연단을 조직하려고 했다. 한국으로 오던 항해 공연 때의 악단장이 공연단을 맡아 나를 데려가려고 했다. 부대장은 군수품 담당 장교인 악단장에게 자신이 원하는 털모자를 구해주면 나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공연단에 합류하게 되었고 모자 하나에 바꿔진 사나이가 되었다. 공연단은 코미디언을 포함해 10명이었다. 나는 드럼을 치고 노래도 했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 중에도 우리가 가면 장병들은 너무 좋아했다. 미군 부대에 가서도 공연했다. 공연단에는 나중에 ‘본 프리(Born Free)’ ‘워크어웨이(Walkaway)’로 세계적인 가수가 된 매트 먼로(Matt Monro)도 있었다. 그와 같이 노래한 기억이 너무나 영광이다.”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다고 한다.

“공연을 다니다가 자대 귀임 명령을 받았다. 서울 함락을 위해 중공군이 공세를 취해 글로스터 연대가 방어를 하게 되었다. 20㎞ 길이의 임진강을 방어해야 했다. 우리 부대는 보병을 도와주는 포병이었다. 내 임무는 일종의 관측병이었다. 가능하면 적에게 더 가까이 기어가서 무전기로 적의 정확한 위치를 관측장교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전장 한가운데 있기도 했다. 한번은 동료가 ‘너 뒤에 있는 저 친구는 누구냐?’고 묻길래 돌아보니 얼어붙은 중공군 시체였다. 밤새 옆에 적군 시체를 두고 지낸 셈이다. 그러다 본부로 가서 배터리를 받아 오는 사이 글로스터 연대가 궤멸했다. 전원이 부상하고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조금 전 같이 있었던 그들 모두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중공군은 4월 22일 한밤중에 공격을 시작했다. 서울을 점령해서 마오쩌둥에게 메이데이 선물로 주겠다는 목적이었다. 3만여명의 중공군을 맞아 수에 밀린 유엔군은 후퇴를 했는데 글로스터 연대는 포위되어 버틸 수밖에 없었다. 결사적인 저항 덕분에 중공군은 병력의 3분의 1을 잃고 서울 공략을 포기했다. 글로스터 연대가 영웅적인 전투를 한 235 고지(235 Hill)는 이제 글로스터 고지라고 불린다.”

중공군 포로의 기억

태커리는 전투 중에 자신이 겪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중공군 포로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부대 안을 지나는데 아주 심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보니 중공군 병사를 개머리판으로 치고 있었다. 어느 국가 군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권총을 꺼내 중단하지 않으면 고문하는 너희들을 쏘겠다고 하고 그 중공군을 데리고 나왔다. 중공군은 무릎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영국군은 절대 포로를 고문하지 않는다. 그 중공군이 완벽한 영어로 ‘나를 구해 줘서 고맙다. 나는 영국군 손에 들어와서 너무 행복하다’라고 했다.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후송했다. 그 중공군은 베이징대학교 학생이었다. 그는 가면서 고맙다고 은화를 하나 주고 갔는데 한강을 건너다가 잃어버렸다.”

이 에피소드는 태커리의 자서전 ‘내 이야기, 어떻게 사랑이 모든 걸 바꾸는지(My Story, How Love Change Everything)’에도 나온다. 한국에서의 가장 즐거운 기억을 하나 들라고 하니 태커리는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일반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선에서 전선으로만 다녔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이 근처에 많이 왔다.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면 아주 좋아했다. 한국에 대한 다른 인상은 냄새다. 아마 밭에 비료로 인분을 뿌려서인지 들판에 나가면 맑은 공기가 아니라 코를 쥐어야 할 정도의 악취가 났다.”

태커리는 현재 영국 퇴역군인들이 거처하는 국영 첼시 은퇴자 병원에서 기숙하고 있다. 퇴역군인들이 배우자를 잃고 동료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노후를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은퇴군인 양로원이다. 12년 이상 복무했고 65세 이상이면서 배우자가 없는 300명의 제대군인들이 최상의 대우를 받으면서 지낸다. 이들은 ‘스칼렛(Scarlet)’으로 불리는 진홍색 금단추의 반코트 정복으로 유명하다. 영국에서 열리는 각종 군인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태커리는 노래 경연 동안 이 제복을 입고 나와 특별히 인기를 끌었다.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국민들이 워낙 이들을 존경하고 대접해서이다. 태커리는 2016년 12월 부인 조안을 잃고 혼자 남았다.

“그녀가 가고 나서 노래가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조안이 죽은 후 집을 팔고 첼시 병원에 신청을 했는데 운이 좋게 허락이 떨어졌다. 첼시 병원 합창단에 합류해 자선공연도 하고 소일을 했다. 우리 병원에는 매달 한 번씩 인도 커리를 먹는 날이 있다. 나는 거기서 동료 군인들을 위해 평생 하던 대로 노래를 불렀다. 한번은 동료 한 명이 나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자네 목소리가 영원하지 않을 건데 더 늦기 전에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한번 나가 보면 어떠냐’고 했다. 나는 ‘자네 도대체 몇 잔을 마셨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곧 ‘못 할 일도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에 와서 바로 컴퓨터로 신청서를 다운로드받아 신청했다. 그렇게 내 운명이 또 한 번 완전히 뒤집어졌다. 나는 가장 나이 많은 우승자이며 레코드 출반 계약 가수가 됐다.”

태커리가 우승한 ‘브리튼스 갓 탤런트(BGT)’는 노래 경연만 하는 대회가 아니다. 프로그램 이름 그대로 출연자가 가진 각종 재능을 겨룬다. 2007년 1회에는 휴대전화 판매원 폴 포츠, 2009년 3회 때는 수잔 보일이 혜성같이 나타나 우승을 해 세계적인 가수가 됐다. 나서기 싫어하고 아메리칸드림을 믿지 않는 영국인의 특성답게 영국에는 한국과 달리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지 않다. BGT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콜린 태커리씨와 부인 조안.
콜린 태커리씨와 부인 조안.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태커리 때문에 BGT가 다시 부활했다고 할 정도로 영국민들에게 태커리는 충격을 주었다. 태커리가 처음 무대에 올라왔을 때 심사위원이나 시청자들은 89세라는 나이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커리가 노래를 하기 전 “이 노래는 고인이 된 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라고 말하자 홀을 매운 관중들은 감동을 받았다. 태커리가 ‘내 날개 밑의 바람(Wind Beneath My Wings)’의 첫 소절을 불렀을 때 청중들과 심사위원의 반응은 태커리의 다음 무대 진출이 결정된 듯했다. 태커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노래 가사에 청중들은 울음바다가 됐다.

‘내 그림자 안은 추웠을 터이다. 네 얼굴에 전혀 햇빛이 비치지 않았으니까. 너는 나를 빛나게 하기로 작정했고, 언제나 내 한 발자국 뒤에서 걸었다. 그래서 영광을 받는 건 항상 나였다. 나의 모든 힘의 근원이 당신일 때 아주 오랫동안 당신은 이름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픔을 숨긴 아름다운 미소였다.’

사회자를 포함해 방송 관계자들도 모두 울었다. 심사위원 전원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독설과 악평으로 유명한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마저도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다. 결과는 상관없이 모든 순간을 즐기는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태커리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준결승전부터는 부인 사진이 배경 화면으로 나오기도 했다. 첼시 동료들도 같이 출연해서 합창을 할 때 화면에는 영국 현충일의 상징인 개양귀비 꽃잎이 날렸다. 흡사 로열앨버트홀에서 매년 여름에 하는 ‘BBC프롬스’ 음악회의 마지막 날, 영국 국가만큼의 상징성을 갖는 ‘룰 브리타니아(Rule Britannia)’ 같은 노래를 관객 모두가 합창하는 분위기였다. 준결승전의 노래 ‘우리는 다시 만난다(We’ll Meet Again)’는 지난 6월 18일 운명을 달리한 영국 국민가수 베라 린이 2차대전 중 부른 노래로 유명하다. 마지막 결승곡은 ‘사랑이 모든 걸 바꾼다(Love Changes Everything)’였다.

89살 노인은 무대에서 퇴장하면서 관객들에게 윙크까지 하고 나갈 정도로 멋진 매너를 보였다. 사실 준결승전에서 그는 심사위원 표를 하나도 못 얻었지만 시청자 투표로 1등을 했다. BGT는 실력만을 보는 무대가 아니다. 시청자 인기도에 따라 우승이 가려지는 준결승전부터는 태커리가 절대 유리했다. 결승전은 820만명이 시청했고 시청률은 40%를 기록했다. 영국에서는 정말 드문 일이다.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더라도 내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 부른다. 조안과 같이 활동을 했었기에 같이 노래 부르던 기억이 항상 떠오른다. 내 삶에서 음악이 없었다면 뭐가 남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우승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The age is only number.)”

누구도 이기지 못한 전쟁

태커리는 한국에서 철수한 이후 한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에서는 “가보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여의치 않았다”고 했지만 자서전에는 다른 이유를 들었다.

“그때 내가 본 한국은 행복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폐허였다. 수많은 전우들이 전쟁 후 한국을 다녀왔지만 나는 한국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너무 많은 기억이 있어서다. 다시 그런 기억을 대할 자신이 없다. 전쟁은 모두 흉측하다. 거기서는 생명은 너무 싸구려이다. 특히 중공군의 생명은 너무 쌌다. 수천 명이 쳐들어오면 누구를 겨냥해서 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들을 향해 무작정 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을 쓸데없이 희생시켰다. 결국 누구도 이기지 못할 전쟁을 벌여 휴전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북한을 보라. 악의 제국을 만들지 않았는가? 반대로 휴전선 남쪽에는 발달하고 풍부한 한국이 세워졌지 않나? 내 생각에 한국인은 참 좋은 사람들 같다.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듯하다. 남한을 보면 싸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 봐라, 지금 그들이 어떤가.(South Korea was worth fighting for-look at them today.)”

필자가 그동안 만난 참전용사들도 한국을 방문하려는 용기를 못 내는 것에 대해 비슷한 이유를 댔다. 수많은 포로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북한군의 횡포로 죽었다고 증언한다. 무려 70년이 다 된 기억을 되살리면서도 진저리를 치는 참전용사를 보면서 필자는 죄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참전용사 초청 축제에 가면 수많은 한국인이 와서 우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한식으로 우리를 대접한다.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한국 정부로부터 평화메달도 받았다. 잊지 않고 챙겨 주고 관심 가져 주어서 고맙다.”

수년 전 영국 친구 둘을 데리고 한국 투어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은 판문점과 부산 유엔군 묘지를 보고 싶어 했다. 둘 중 한 명이 영국 육군 예비역 중령이었다. 이 친구가 영국인 묘역에서 눈물을 흘렸다. 미군은 유해를 모두 본국으로 이송해 가지만 영국군의 전통은 현지에 둔다. 이역만리에 누운 16살 소년병의 묘비를 보고 뭉클했던 모양이다.

‘당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건가?’라는 물음에 태커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와 함께한 내 삶은 축복받은 삶이었다. 노래와 춤으로 만들어진 내 일생은 그 이상 행복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오랜 결혼 생활의 비밀은 바로 관용이다.” 한 노인의 황홀한 황혼을 본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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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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