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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7호]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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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통신]‘영국판 세월호’ 힐스버러 참사의 26년 진실 찾기

런던=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johankwon@gmail.com 2021-05-09 오후 2:51:06

▲ 1989년 4월 벌어진 힐스버러 참사는 축구장에 한꺼번에 몰려든 팬들로 인해 경기장과 관람석을 가른 철조망에 팬들이 눌리면서 압사당해 벌어졌다. 당시 사고로 96명이 사망했다. photo rarehistoricalphotos.com
4월은 잔인한 달이라지만 영국인들, 특히 리버풀 축구 팬들에게는 무척 가슴 아픈 달이다. 1989년 4월 15일 영국 축구클럽들의 잔치인 축구협회컵(FA Cup) 준결승전 경기장에서 리버풀 팬 96명이 압사 사고로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참사 9개월 뒤 나온 조사보고서는 사고 원인을 ‘술 취해 입장권 없이 경기장 안으로 밀고 들어온 리버풀 팬들의 폭거 때문’이라고 밝혔다. 희생자의 사망 원인을 ‘사고사(accidental death)’로 결론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장 경찰이 책임을 피하려고 은폐 조작한 증거와 강압에 회유된 증언이 담긴 경찰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보고서가 나온 이후 망연자실하고 분노했던 유족들과 리버풀 팬들은 주저앉지 않고 진실 규명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 1차 조사보고서가 나온 지 22년이 지난 2012년,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재판이 열렸고, 그 결과 2016년 당시 참사가 ‘중대한 직무유기(grossly negligent failures)로 인한 과실치사(unlawfully killed)’라는 판결이 나왔다. 억울한 죽음들이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26년 만에 안식을 찾게 된 것이다.
   
   
   축구장서 30분 만에 96명 압사
   
   이 사건을 영국인들은 간단하게 ‘힐스버러 참사(Hillsborough Disaster)’라고 부르는데 세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진 과정은 이랬다. 당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클럽 간 ‘1988~1989년 시즌’ 준결승전이 영국 중부 셰필드 웬즈데이 힐스버러 축구장에서 열렸다. 오후 3시 경기 시작이 임박했는데도 미처 입장하지 못한 리버풀 클럽 응원단은 경기장 밖에서 소란을 부리기 시작했다. 현장 관리를 하던 남요크셔 경찰 서장이 한 명씩 들어가는 회전 출입구로는 리버풀 팬들을 제 시간에 입장시키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시합 후 나가는 문을 열어버리는 오판을 했다. 문이 열리자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입석 관객석으로 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축구장들은 팬들의 경기장 난입을 막기 위해 관객석과 경기장 사이에 철사로 된 강한 망이 쳐져 있었다. 결국 밀려들어온 팬들로 인해 망 가까이에 있던 앞자리 팬들부터 압사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고는 경기 시작 15분 전 출구 개방을 한 직후부터 철망이 무너지기까지 단 30분간 일어났다. 그 짧은 시간, 희생은 너무 컸다. 96명 사망과 766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사고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겹친 것이었다. 경기장 밖에서 현장을 지휘하던 경찰서장은 군중 관리 경험이 전혀 없었고 전근 온 지 2주밖에 안 되어 경기장 안을 본 적도 없었다. 거기다가 입장권을 판매하는 축구협회와 경기장 측은 입장권에 ‘경기 15분 전에 오라’고 안내하는 실수까지 했다. 경기장을 소유하고 있던 셰필드 웬즈데이 축구클럽은 이미 1981년 FA컵 준결승 때도 사고가 나서 토트넘 팬 38명이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경기장 구조 자체가 안전에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았음에도 개선하지 않은 클럽과, 문제의 경기장을 다시 준결승 장소로 선정한 축구협회 모두 안이한 판단을 한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사고 이후였다. 사고가 나자 앰뷸런스 40대가 달려왔지만 1대만 경기장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현장 경찰이 진입을 막은 탓이다. 경찰은 경기장에 누운 의식 없는 팬들이 이미 사망했다고 판단해 앰뷸런스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면 추가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여겼다. 결국 팬들이 광고판을 들것 삼아 환자를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해서 병원으로 실려 간 사람은 12명뿐이었다. 2012년 재조사에서는 빨리 손을 썼으면 무려 41명의 희생자를 살릴 수 있었다는, 유족들로서는 땅을 칠 결론이 내려졌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는 사령탑이 없어 각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희생자의 반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결국 경찰, 축구협회, 클럽, 앰뷸런스 등의 총체적 부실이 참사를 만들어낸 셈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96명의 희생자 중 10대가 38명, 20대가 40명, 30대가 12명이라는 사실이었다. 90명 중 94%가 꽃다운 청춘들이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잘못으로 희생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체 부상은 안 입었지만 참사 현장을 목격한 관중을 포함해서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외상증후군 환자가 생겼다. 부상 생존자 중 3명이 자살했고 정신병원 입원, 약물중독, 음주, 충격으로 실직 후 이혼하는 가정 등 후유증이 엄청나게 발생했다. 심지어 목격자 중에서도 외상증후군 환자가 수도 없이 생겼다.
   
   
▲ 힐스버러 참사 직후 앰뷸런스를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축구팬들이 광고판을 들 것 삼아 환자를 나르는 일이 벌어졌다. photo leacherreport.com

   사태 주범으로 지목된 극성 리버풀 팬들
   
   사고가 난 4일 뒤인 4월 19일 영국의 우익 언론이자 가장 부수가 많은 대중지 ‘더선(The Sun)’은 영국 역사에 길이 남는 초대형 오보를 낸다. 전면 표지에 ‘진실(Truth)’이라는 큰 제목의 기사를 냈는데, 지금도 힐스버러를 구글링하면 제일 먼저 뜨는 사진이다. 기사에는 ‘만취된 리버풀 팬들의 횡포로 참사가 일어났고 그들은 심지어 시체에서 지갑을 빼내고 인공호흡 등 구조 작업을 하는 경찰에게 방뇨를 하고 폭행까지 했다’는 헛소문이 담겼다. 심지어 리버풀 팬들이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시체를) 이리 던져라. 우리가 강간하겠다고 아우성쳤다’라고까지 극단적 보도를 했다. 이는 경찰이 제공해준 거짓 정보를 사실 확인도 안 하고 기사화한 탓이었다.
   
   
   사고 후 8개월이 조금 지난 1990년
   
   1월, 영국 사건 조사보고서치고는 드물게도 빨리 나온 ‘테일러 보고서’도 사고에 특별히 책임질 사람이나 기관은 없고 ‘음주를 한 리버풀 팬들의 횡포가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인 단순 사고사’라는 결론을 냈다. 후속 재판에서도 테일러 보고서와 경찰이 제출한 증거가 가장 중요한 판결 근거로 작용했다. 유족 측의 주장은 전혀 채택되지 않았다. 판결은 ‘사건은 불가피한 사고였고 일부 경찰의 판단착오도 있었지만 처벌받을 정도는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결국 아무도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이나 기관이 없이 사태가 묻히는 듯했다.
   
   물론 유족들은 이 같은 결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참사 현장 생존자인 리버풀 팬들도 조사 결론을 보고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족들은 대다수의 희생자들이 음주할 나이도 아니고 그날 입장권을 모두 소지하고 갔음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이지만 알코올이 일부 채취된 사망자의 경우도 만취는커녕 ‘가벼운 즐거움(modest for a leisure)’ 정도의 음주량에 불과했다. 조작되기 전 초급 경관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희생자 모두는 입장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퍼진 헛소문과 이를 다룬 영국 언론들에 의해 진상은 오도됐고 이것이 오랫동안 영국을 지배했다. 정론지 ‘더타임스’마저도 경찰과 테일러 보고서를 믿고 리버풀 팬들의 만행을 나무랐다. ‘데일리익스프레스’도 술취한 팬들의 행위라고 비난했고, ‘선데이피플’은 광란의 팬들이 도망가느라 시신을 밟고 지나갔다는 보도까지 했다. ‘데일리스타’ ‘데일리메일’ ‘더이브닝스탠더드’도 그런 논조를 따랐고 공영방송 BBC 인기 드라마 ‘이스트엔더스’에서마저 리버풀 팬을 비난하는 대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결국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들도 동조해 희생자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유족들은 처음에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사회 분위기가 희생자들을 죄인(vilified) 취급 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리버풀 팬들의 과격성은 워낙 잘 알려져 있기도 해서 경찰의 조작이 쉽게 먹혀들어 갔다. 성적이 좋았던 리버풀에 대한 다른 클럽 팬들의 질투도 합쳐져서 리버풀 팬과 시민들 말고는 모두가 ‘리버풀 축구 난동꾼(hooligan)’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사실 ‘콥(Kop)’으로 불리는 리버풀 팬들은 격렬한 응원으로 원정팀과 응원단을 기죽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입석인 관중석에 1시간30분 동안 서서 열광적으로 팔을 흔들며 발을 굴러댄다. 리버풀 팬들이 일으킨 사고도 많았다. 1985년 벨기에에서 벌어진 유럽컵 결승전 이탈리아 유벤투스와 리버풀 간의 시합에서도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리버풀 팬들이 담장을 무너뜨려 39명이 희생되고 600명이 부상을 입은 사고가 났었다.
   
   
   조작과 위증으로 만들어진 조사보고서
   
   당시 더선 편집국장은 극우 성향의 보수당 열렬 지지자였다. 나중에 리버풀이 전통적으로 노동당 지지의 야도(野都)여서 더선이 그런 식으로 진실을 오도했다는 말도 돌았다. 당시 더선의 기자로 있던 한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이미 다 만들어진 기사에 내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으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썼다. 당시는 편집장에게 기자가 대드는 일은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유족들이 끈질긴 진실 찾기에 나섰지만 세상은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사고 후 23년이 지난 2012년, 조사위원회가 진실을 밝혀내기 전까지 세상은 희생자들의 결백이 유족들의 집착에 가까운 환상이라고 치부했다. “이제 그만하고 희생자를 보내주고 유족들도 갈 길을 가라”고 권했다. 사정을 모르는 지식인들은 “이제 끝도 없는 재조사, 재재판, 재검사를 그만하고 참사를 뒤로하고 희생자를 그만 보내주자”라고 간곡하게 애원도 했다.
   
   그러나 확신에 찬 유족들은 폭도로 매도된 희생자들의 명예를 찾아주고 자신들의 신원(伸寃)도 풀기 위해 ‘힐스버러 정의 찾기 캠페인(The Hillsborough Justice Campaign)’을 시작한다. 1989년 5월에는 유족과 생존자 팬들이 합심해 힐스버러 유족 후원 협회(HFSG·Hillsborough Family Support Group)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다. 이런 조직적인 활동 말고도 유족들은 지역구 하원의원을 비롯해 유관기관에 편지를 쓰고 언론 기고와 인터뷰도 하면서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행동을 줄기차게 이어 나갔다.
   
   그런 활동이 결실을 맺어 1차 보고서 7년 후인 1997년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후 한 저명한 고등법원 판사가 재조사를 위한 사전 법적 검토를 시작한다. 그러나 결론은 조사를 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 바뀌면서 한껏 기대를 걸던 유족들은 다시 한번 하늘이 무너진 듯 실망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재판을 이어갔다. 이제 국가가 안 도와주니 유족 개인이 검사가 되어 책임자인 경찰서장과 차석을 형사 기소하는 사인기소(私人起訴·Private Prosecution)도 여러 건 시도했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 없이 경찰 증거와 보고서만으로 이뤄진 판결은 역시 그대로였다.
   
   그런데 참사 20주년인 2009년, 한 정치인에 의해 진실 찾기는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노동당 고든 브라운 총리 정부에서 문화언론체육부 장관이자 의원이었던, 현 맨체스터 시장인 앤디 번햄이 리버풀 구장에서 매년 열리던 추모식에 연설을 하기 위해 참석했다. 당초 그는 추모식에 초대받았을 때 상당히 망설였다고 했다. 정부가 유족들에게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연설을 하다가 울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리버풀의 라이벌인 에버턴 클럽 팬이던 자신은 사고 당시 19살이었다. 참사 당일 그는 버밍엄 클럽에서 열리는 에버턴과 노리치 간의 또 다른 FA컵 준결승전을 아버지와 같이 보러갔다가 참사 소식을 들었다. 자신에게도 아픈 그 기억 때문에 연설 중 우는 사태가 벌어질까 염려한 것이다.
   
   결국 그가 연설하는 중간에 리버풀 팬 3만여명이 ‘96명을 위한 정의(Justice for the 96)’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는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장관이 군중의 고함 소리에 할 말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온 나라로 중계되었다. 6분의 연설이 10여차례의 고함과 박수로 중단된 그날, 번햄은 누가 뭐래도 다음 내각 회의에서는 이 문제를 반드시 끝장내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 리버풀의 성조지홀 밖에서 힐스버러 참사 유족들과 축구팬들이 진실과 정의를 외치고 있다. photo theconversation.com

   ‘정치’가 배제된 최종 조사단 구성
   
   번햄의 필사적 노력으로 결국 고든 브라운 내각은 법 검토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힐스버러 독립조사위원회(Hillsborough Independent Panel)를 구성한다. 위원장으로 리버풀 성공회 주교가 지명되고 인권변호사, 정보추적조사 전문가, 탐사보도 전문기자, 의사, 경찰 간부, 범죄학 전문가, 방송인, 전직 국가문서기록관장이 조사위원으로 임명된다. 리버풀 시민들은 참사 후 자신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진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이때 처음 만난 듯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유족들은 “결론이 어떻게 나든 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진실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조사위원회는 ‘관련 서류 공개 시한 30년’이라는 정부 조례를 ‘20년’으로 바꾸면서까지 80개 기관으로부터 45만쪽의 서류를 제출받았다. 놀라운 일은 관계기관들이 20년도 넘게 자신들에게 불리한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가 훼손 없이 선선히 제출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사는 영국에서 사고 조사와 관련해 두 가지의 신기원을 세웠다. 위원회가 정부 서류 공개 시한을 당긴 점과 함께 20개씩 열거된 서류 목록만으로도 1296쪽인 45만쪽의 모든 서류를 공개·비공개 따지지 않고 위원회 웹사이트에 올렸다는 점이다.
   
   위원회가 서류를 공개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조사를 밀실에서 하지 않고 관련 서류들에서 진실을 찾겠다는 공개 선언이 첫 번째 이유이다. 국민들로 하여금 의도를 가진 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공개된 자료를 보고 국민 누구나 서류 조작이나 오류, 혹은 서류가 포함하지 않은 진실이나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알려주기를 바란다는 희망이 다음 이유였다. 웹사이트에 올려진 모든 서류를 보고, 각계의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제한된 경험을 가진 위원들이 놓치는 진실을 국민들이 같이 찾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소위 말하는 집단지성을 통한 대중조사(Cloud Investigation)의 첫 시도였다.
   
   서류 공개는 희망했던 결과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이루었다. 우선 국민들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선명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뢰를 보낸 점이다. 그다음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제보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위원회는 이를 통해 위원들이라면 도저히 찾아내지 못할 경찰 조작 증거의 모순점과 오류는 물론 현장에서 빠진 폐쇄 카메라의 존재, 방송기자들의 촬영분 같은 중요한 증거들을 찾아냈다.
   
   
   모든 서류 온라인에 띄우고 ‘대중조사’
   
   진실 규명에 가장 중요한 증거는 회유된 증인들의 참여에서 나왔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위증 서류가 만천하에 공개되자 증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비록 자신이 경찰 조사에서 회유와 강요로 위증을 했지만 그동안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동안 선뜻 나서지 못하다가 서류가 공개되니 수치감에서 벗어나려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모인 새로운 증거와 증언으로 위원회는 2년9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2012년 9월 최종 보고서를 내놓았다. 조사보고서는 현장 초급 경관 164명이 작성한 현장 사고 보고서 중 116군데가 고위 경찰에 의해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만취한 폭도라고 몰아가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시신을 대상으로 알코올 검사를 했고, 경찰 기록과 전과 기록도 조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희생자를 전과자로 발표하기 위함이었다.
   
   395쪽의 보고서는 153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많은 요인에 의해 일어난 참사의 책임을 결백한 팬들에게 돌리려고 거짓말을 퍼뜨리고, 증거를 조작하고, 증인들을 겁박하고 회유하는 범죄집단 수준(industrial scale)의 진실 은폐와 공작을 경찰이 자행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참사는 사고사가 아니라 현장 경찰들을 비롯한 축구협회, 셰필드 구단, 앰뷸런스 서비스 같은 관계기관과 단체의 ‘중대한 직무유기로 인한 과실치사’로 결론 지었다.
   
   보고서는 해당 책임자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기소 의견을 냈고, 영국 축구장의 안전에 대한 권고도 했다. 영국 정부는 조사보고서가 나오자 바로 독립기관인 경찰고충처리위원회 주도로 런던, 맨체스터, 더럼 경찰 총경급 3명을 수뇌부로 하는 ‘해결 작전(Operation Resolve)’ 특별 수사팀을 구성해 정식으로 관련 책임자와 기관들에 대한 형사 처벌과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서의 권고대로 영국 축구경기장 중 톱 2개 리그의 경기장 관중석 전체를 입석이 아닌 좌석으로 바꾸었다. 관중석과 경기장을 막는 철책도 없애는 등 각종 안전조치도 이루어졌다. 조사보고서가 철저한 대책까지 주문한 덕분에 힐스버러 이후 더 이상의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족들로서는 자신들이 23년간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모든 내용이 보고서 안에 들어 있음을 보고 너무 기뻤다. 유족 2명은 너무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기절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정의가 이루어졌다(Justice Is Done)’는 구호가 적힌 깃발을 흔들며 흐느꼈다. 이렇게 해서 유족들은 22년에 걸친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사단이 성공한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정치색이 전혀 끼지 않은 순수한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유족들로 하여금 신뢰를 가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 기한을 정하지 않은 채 충분한 시간을 조사단에 허용했고, 조사단이 쓸 자금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서류를 공개함으로써 집단지성에 의한 대중조사라는 기발한 방법까지 동원했다. 영국 공기관들도 관련 서류들을 장기간 의무 보관하다가 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자신들에게 오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제출했다.
   
   힐스버러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까지 혈세 지출도 있었다. 2012년 조사보고서 이후 2016년까지 경찰의 변호사 비용을 비롯해 재판 비용으로만 2510만파운드를 내무부가 지급했다. 경찰 업무 수행 중 일어난 사고로 소송을 당했다는 이유에서다. 유족 법정 비용 6360만파운드도 내무부가 지급했다. 경찰이 책임져야 할 사건이니 피해자 정의 실현을 위한 비용이라는 뜻에서 지급됐다. 결국 8870만파운드(1330억원)라는 천문학적 혈세가 지출되었다.
   
   
   ‘가장 큰 적은 무사안일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를 허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영국인이 리버풀 희생자와 유족들을 죄책감 없이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힐스버러 참사는 영국인들로서는 정말 더 이상 돌이키기 싫은 비극이다. 그러나 리버풀 팬들을 비롯한 전 국민들은 자신들이 잘못해 그런 비극이 일어난 듯 매년 4월 15일이면 ‘힐스버러를 잊지 말자’는 행사를 진행한다. 연도는 다르지만 한국의 세월호 참사가 딱 하루 뒤의 일인 점도 참 공교롭다.
   
   유족들은 대처, 메이저, 블레어, 브라운, 캐머런 정권까지 5개 정권, 22년에 거쳐 결국 정의를 이루어내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영국인들은 참 무서운 민족이다. 결코 냄비 끓듯이 파르르 하다가 금방 식는 민족이 아니다. 뭔가에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글로스터 연대는 임진강전투 4일간 750명이 2만7000명의 중공군을 맞아 전사 59명, 행방불명 98명, 포로 526명의 처참한 전과를 남겼다. 겨우 67명만 전장에서 탈출했을 정도로 지구전에 강한 끈질긴 민족이다. 비록 첫 번째 조사보고서는 결론을 잘못 냈지만 최종 조사를 주도한 테일러 법관의 말은 우리도 귀 기울일 만하다.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무사안일이다(the greatest enemy of safety is complac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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