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긴축을 통해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잡은 폴 볼커 전 연준 의장. ⓒphoto 뉴시스
1980년대 긴축을 통해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잡은 폴 볼커 전 연준 의장. ⓒphoto 뉴시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이는 밀턴 프리드먼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을 ‘상품과 서비스에 비해 돈이 너무 많은 현상’이라 했다. 경제 전체의 생산량은 고정되어 있는데 화폐공급이 계속해서 늘어나면 물가는 상승한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이 화폐적 현상이란 명제를 거듭거듭 강조했다. 교과서에는 보통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수요 견인(demand-pull)과 비용 인상(cost-push)으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이는 단기적 원인이고, 대부분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은 화폐량이라는 데 동의한다.

화폐 발행량 최근 14년간 10배 넘어

세계 통화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달러의 경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본원통화 발행액이 8000억달러 내외였다. 그러던 것이 금융위기와 팬데믹 사태를 거치면서 2022년 4월 초 기준 9조달러에 육박해 그 발행량이 10배 이상으로 많아졌다. 미국이 이렇게 많은 달러를 찍어내자 경쟁 관계에 있는 유럽연합(EU)과 일본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달러에 버금가는 유로화와 엔화 공급이 뒤따랐다. 2020년 초 팬데믹 사태가 터지자 달러는 물론 유로화와 엔화도 통화 공급량을 늘리면서 3개 기축통화의 총발행액이 21조달러를 넘어섰다.

미국보다 더 많은 돈을 찍어내어 유통시키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위안화 유통 규모가 달러보다 약 70% 이상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 원화도 6위에 랭크되어 영국 파운드화 다음으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팬데믹 사태 이후 통화주도권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에서 재무부로 바뀌고 있다. 연준의 통화정책에 의한 유동성 공급보다는 재무부의 재정부양책에 의한 통화 공급량이 월등히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또 연준이 시행하는 통화정책의 하나인 양적완화는 월스트리트 금융권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유동성을 살포하는 반면, 팬데믹 사태 이후 미국 재무부가 주도하는 재정부양책은 주로 서민들을 대상으로 개개인에게 필요한 양만큼을 직접 쏘아주는 것이 특징이다.

팬데믹 사태를 맞이하여 개인에게 직접 지불된 미국의 2021년 재정 집행액은 다른 모든 재정 집행액을 합한 것보다도 두 배 이상 많았다. 재정부양책 지급 대상자는 주로 하위 50% 소득 계층으로, 재정의 3대 기능의 하나인 부의 재분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플레이션과 직결되어 있다. 양적완화는 금융권을 통해 유동성이 공급되기 때문에 대출 담보 능력이 있는 상위 10% 소득 계층이 주로 활용하여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투자한다. 상위 10% 소득 계층의 부를 늘리는 데 주로 쓰여 자산 가격은 폭등하나 소비자물가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반면 재정부양책으로 풀리는 돈은 주로 서민들에게 직접 지급되다 보니 저축 여력이 미약한 서민들의 지출은 곧바로 소비자물가, 곧 인플레이션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4월 12일 발표된 미국의 3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상승폭이 8.5%에 이르렀다. 1981년 12월 이후 약 41년 만에 가장 큰 상승폭이다. 자칫 잘못하면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 사실 연준은 1년 전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더라도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시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평균 인플레이션’ 개념을 도입해 대응하겠다고 했다. 또 설사 인플레이션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수단들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연준은 말을 바꾸어 인플레이션의 불확실성이 커져 총력을 다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한다. 인플레이션 대응에 실기한 것이다.

지난 3월 중국 생산자물가지수(PPI)도 전년 대비 8.3% 올랐다. 이는 미국의 수입물가지수와 직결되어 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수출과 관련하여 우려되는 점은 코로나19로 인한 상하이 봉쇄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물류대란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가중 가능성과 경기 부진 우려가 있다는 사실이다. G2의 인플레이션은 곧 세계의 인플레이션으로 퍼져 나갈 공산이 크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서운 기대인플레이션

그런데 인플레이션보다 무서운 게 있다. 바로 ‘기대인플레이션’이다. 특히 물가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는 기대인플레이션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소비자가 상품 또는 서비스 가격이 평소보다 빨리 오를 것이라 생각되면 소비행태가 빨라진다. 곧 통화의 유통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월급이나 주급을 받으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마트로 달려가 상품과 바꾸어 놓는 식이다. 이것이 심하게 빨라지는 것이 곧 초인플레이션이다.

경제 주체들이 품고 있는 물가에 대한 전망을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또는 ‘기대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기대인플레이션 측정은 설문조사를 통해 이뤄진다. 최근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미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향후 1년간 기대인플레이션 중앙값이 6.6%로 집계되어 201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은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제국들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첫 희생양은 그리스였다. 그리스는 세계 최초의 기축통화 탄생지였다. 기원전 6세기 민의로 선출된 아테네 최초의 집정관 솔론이 당시 최대의 무역국 페르시아와의 교역 확대를 위해 아테네 드라크마 은화의 중량을 페르시아 은화의 중량과 맞추었다. 이로써 두 나라 은화가 자유롭게 교환되면서부터 아테네의 드라크마 은화가 지중해 교역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이렇게 기축통화로 통상의 번영을, 솔론의 개혁으로 민주정치의 토대를 이루어낸 아테네는 그리스의 맹주가 된다.

하지만 패권에 대한 집착과 팽창정책의 유혹에 빠져들면서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스파르타와의 패권전쟁이 시작되면서 용병들에게 지급하는 금화에 구리를 섞는, 도덕적 해이가 뚜렷한 통화주조 방법으로 세입보다 세출을 늘린 것이다. 이른바 역사상 최초의 재정적자 정책이었다. 그 끝은 통화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었다. 통화시장이 붕괴되자 아테네도 수명을 같이했다.

인간은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그리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제국도 아테네와 똑같은 우를 범했다. 로마제국의 기축통화는 데나리온 은화였다. 네로 황제는 늘어나는 조세 저항과 로마 대(大)화재로 재정적자가 발생하자 데나리온 은화에 구리를 섞어 통화를 늘리기 시작했다. 이후 역대 황제들이 구리의 양을 늘려가자 시민들이 동전 및 은화를 불신해 통화시장이 붕괴되었다.

통화시장의 붕괴는 시장 기능을 마비시켜 물물교환의 시대를 불러왔다. 도시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도시민들은 시골로 내려가 영주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농노가 되었다. 이른바 중세 장원제도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찬란했던 그리스·로마의 도시 문명이 암흑에 묻히는 이른바 ‘암흑의 중세’가 시작되었다.

13세기 중국과 이슬람 지역을 정복한 원나라도 결국 인플레이션으로 멸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는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며 1260년 은과 비단에 기반을 둔 교초 지폐를 발행했다. 원나라는 모든 금과 은을 몰수한 뒤 지폐로 바꿔주며 교초만을 유통시켰다. 교초는 고려부터 지금의 시리아에 이르는 원나라 영향력하의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는 동양 최초의 기축통화였다.

문제는 거액의 재정지출이 필요하면 지폐를 마구 발행했다는 점이다. 1380년만 해도 지폐 한 장당 가치가 동전 1000개였는데 1535년에는 지폐 한 장당 동전 0.28개로 교초 가치가 4000배 가까이 폭락했다. 그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통화시장이 붕괴되면서 물물교환 시대로 되돌아갔다. 이후 농민봉기와 주원장의 발흥으로 제국은 무너졌다.

독일의 초인플레, 히틀러를 부르다

16세기 스페인은 세계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해 세계 금·은 총생산량의 83%를 차지하는 최고 부국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은화는 세계 기축통화였다. 문제는 식민지로부터 금은보화가 쏟아져 들어와도 과도한 팽창주의와 방만한 재정으로 적자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점이다. 1543년 경상수입의 65%가 이자상환에 지출되었다. 결국 1557년 부도가 났고 이는 현대적 의미의 첫 국가 파산이었다. 이후 1560년, 1575년, 1596년 연이은 파산으로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599년 화폐 주조 때는 모든 주화에서 은을 빼버렸다. 시중의 구화도 강제로 신화와 교환케 해 여기서 뽑아낸 은으로 빚을 갚으려 했다. 이로써 저질 주화만 시중에 유통되어 화폐에 대한 불신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그 뒤 스페인제국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해 세계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인플레이션의 흑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히틀러의 등장을 부른 전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1월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케인스가 영국 대표단으로 참가해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물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것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인스의 주장은 젊은 경제학자의 치기로 여겨져 묵살되었다. 그는 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치인들이 이기적인 자국 정치논리를 앞세워 경제를 무시하는 무지한 행태에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그는 독일에 물린 혹독한 배상금이 전무후무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킬 것이며, 이는 독일 국민들을 빈곤으로 내몰아 ‘극단적 혁명’을 발생시킬 것이라고 여겼다. 전제주의 정권의 등장과 새로운 전쟁을 예감한 것이다. 케인스는 독일 경제 조직을 완전히 초토화하는 내용을 담은 평화조약 초안을 수정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이후 분노에 차서 2개월 만에 쓴 책이 ‘평화의 경제적 결과’이다. 그는 이 책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금융과 경제라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흐름을 이로운 쪽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케인스가 생각하는 평화조약의 정신은 ‘관용’으로, 독일에 대한 배상금은 100억달러를 넘지 말아야 하고, 미국이 유럽 부흥을 돕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책은 출간 6개월 만에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10만권이나 팔렸는데도, 케인스의 제안은 묵살되었고 그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결국 그의 경고대로 독일에 대한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화를 불렀다. 독일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수출을 늘리는 과정에서 엄청난 화폐를 발행했다. 이러한 화폐 발행량 증가는 결국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와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 틈을 타고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고 이는 2차 대전을 불러왔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인플레이션이었다. 2차 대전이라는 참화는 케인스의 선견지명이 거부된 결과였다.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정부의 화폐 발행량 증가와 은행들의 과도한 신용창출의 결과물이었다. 독일 정부는 과도한 전쟁배상금 지급과 경기 진작을 위해 수출을 늘려야 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마르크화 평가절하로 수출상품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게 유리해 결국 화폐 발행량 증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들의 과도한 신용창출이 유동성을 급속도로 늘려 2억배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생활비를 아껴가며 평생 저축한 돈이 휴지조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참담함을 겪었다. 시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화폐를 길거리에 버리거나 불쏘시개로 썼다. 독일 초인플레이션의 진정한 막후 조종자는 거대한 신용창출을 일으킨 금융자본 세력들과 그들에 의해 움직여진 민간 중앙은행이었다.

기준금리 20%까지 올린 폴 볼커

인류는 인플레이션에 당하지만은 않았다. 인플레이션을 극복한 승리의 역사도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승전보는 1980년 미국에서 있었다. 닉슨의 재선을 돕기 위해 통화팽창이라는 역주행 정책을 편 아서 번스 연준 의장 재임기간(1970~1978년) 미국의 평균 물가상승률은 9%였다. 당시 물가 통제로 기업의 수익성은 악화되고 실업자는 늘어났다. 1979년의 미국 경제는 최악이었다. 그해 인플레이션율은 13.3%나 되었다. 베트남전쟁 패배의 후유증도 컸지만, 연준 스스로가 인플레이션보다는 성장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준의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폴 볼커였다. 1979년 8월에 취임한 폴 볼커는 긴축을 통한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볼커는 앞뒤 안 가리고 인플레이션과 싸웠다. 1979년 10월 6일 토요일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로 4%포인트나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모기지 금리는 18%, 은행 금리는 20% 가까이 뛰어올랐다. 주식과 집값이 폭락했고 기업들의 파산이 잇따랐다. 실업자는 폭증했다. 이후에도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자 볼커는 더욱 독하게 밀어붙였다. 1981년 6월 인플레이션이 14.8%까지 치솟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은행 금리가 21.5%까지 치솟는 과정에서 경기침체로 많은 회사들이 파산하며 실업률이 10%로 치솟아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빚더미에 앉게 된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이들은 도심 한복판을 행진하고 연준 건물을 봉쇄하며 볼커의 퇴진을 요구했다. 키가 2m가 넘는 볼커는 권총을 차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온갖 시위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고금리로 인한 고통은 1981년까지 3년이나 지속되었다.

하지만 1981년 중반 들어 볼커의 정책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금이자가 높으니 돈들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은행 우대금리 21.5%와 그 무렵 인플레이션 14.5% 차이만 해도 7%였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다. 1980년 6월 14.8%까지 올라갔던 인플레이션율이 1981년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목표치 4%에 도달하여, 볼커가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살아났다. 이듬해에는 경제가 살아나면서도 인플레이션은 2.36%까지 떨어졌다. 이후 미국 경제는 새롭게 태어났다. 볼커는 1987년까지 8년 동안 연준 의장을 지냈다. 그의 후임자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볼커가 이루어 놓은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토대로 경쟁력 있게 미국 경제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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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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