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정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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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鄭芝溶)은 ‘향수’ ‘고향’ ‘백록담’ 등 한국인이 읊어온 애송시를 쓴 국민 시인이다. 그는 ‘천재 시인’ 이상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박목월·박두진을 추천으로 등단시키기도 했다. 지용과 함께 우리 문단을 풍미했던 김기림은 지용이 “조선 신시사상(新詩史上)에 새로운 시기를 그은 선구자이며,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꽃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나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머언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바로 이 ‘고향’은 지용이 1932년 7월 동방평론 4호에 발표한 시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채동선이 이 시로 작곡해 더욱 널리 애송되었으나, 6·25전쟁 후 ‘고향’은 사라졌다. 대신 노산 이은상의 ‘그리워’로, 혹은 박화목의 ‘망향’이란 가사로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지용이 오랜 기간 월북작가로 누명을 써왔던 때문이었다.

정지용은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대상을 선명히 묘사하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소월과 지용은 동갑이지만, 그들의 시를 보면 100년의 차이가 난다”고 했다. “소월이 한국의 한(恨)의 정서를 바탕으로 전통적이고 잠재적인 모국어를 구사했다면, 지용은 시적 대상의 적확한 묘사력과 언어조탁, 시적 기법의 혁신으로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최초의 모더니스트요,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 시의 성좌(星座)”라고 극찬한다.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연일 정씨 정태국(鄭泰國)과 하동 정씨 정미하(鄭美河) 사이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지용(池龍)이었다. 모친이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어, 본명도 이 음을 따서 지용으로 지었다. 그뒤 지용(芝溶)은 그의 아호이자 필명이 되었다.

부친은 한때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 한의원을 개업하여 재산을 꽤 모았으나, 어느 해 홍수의 피해를 크게 입어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졌다. 원래 연일 정씨들이 집단촌을 이뤄 살던 곳은 충북 수북리 꾀꼴마을이었으나,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하계리 개천가로 이사했다. 그때 부친은 처가 친척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정지용은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회고한다. 4대 독자로서 느껴야 했던 숙명적 고독감과 부친의 방랑과 실패, 가난 등으로 어린 그는 불행했다.

휘문고보 시절부터 문재 발휘

고향에 복원된 정지용의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툇간 구조이다. 주거용의 ‘ㄱ’자 집은 부엌 뒤로 방 한 칸을 더 내어 ‘ㄱ’자를 이루는 특이한 구조이다. 옛날 반가에서는 옥상옥처럼 담장 안에 담을 만들어 내외벽을 쌓았는데, 그것은 여인들을 배려한 특별한 공간이었으며 안사람에 대한 예의를 중시했던 우리의 풍습이었다. 방과 방 사이의 소통로는 이러한 연유를 담고 있는 듯하다.

정지용은 9세 때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며, 3년 뒤 동갑인 은진 송(宋)씨 재숙(在淑)과 결혼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4년간 한문을 배우다가 17세 때 휘문고보에 입학한다. 성적이 우수하고 집안형편이 어려워 장학생이 되며, 졸업 후에도 유학비용을 받는다. 휘문고보 1학년 때부터 문예활동을 시작한 그는 동인지 ‘요람’의 산파역을 맡아 습작활동을 한다. 그는 ‘요람’에 정지용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의 절반 이상을 발표했으며, 2학년 때는 ‘서광(曙光)’지에 ‘3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하여 일찍부터 문재를 발휘한다.

정지용은 학생자치회와 동문회를 연합한 재학생과 졸업한 동문 모임인 ‘문우회’의 학예부장이 되어 휘문고보 교지 ‘휘문’ 창간호도 발간한다. 여기에 그의 최초의 번역물 ‘퍼스포니와 수선화’ ‘여명의 여신 오로아’ ‘기탄젤리’도 실었다. 당시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인도는 물론 전 세계가 신화적 인물로 주목한 타고르의 노벨상 수상작인 ‘기탄젤리’를 무명의 고보생이 번역을 시도한 사실에서 지용의 원대한 시적 포부를 읽게 된다. 당시 문단의 중진이었던 김억이 ‘기탄젤리’를 완역한 것이 1923년 4월인데, 지용은 이보다 조금 앞서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예활동도 이처럼 활발하게 하여 교사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가 2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으며, 학교마다 휴교 사태가 발생했다. 휘문고보생들도 많이 검거되었으며, 뒤어어 벌인 동맹휴학 사건을 지용은 이선근(문교부 장관 역임)과 함께 주동하여, 무기정학을 당하나 선배들이 구제에 나서 무사히 졸업한다.

“그 학교 문예부 ‘요람’지를 선후배들이랑 하구 그랬잖아요? 그 뭐 요람지가 전부 학생들한테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선생님한테도 다 가구 그러거든요. 그 교지를 보구 다들 ‘이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이다’, 그 칭찬이 대단한 거죠.… 5년제 졸업을 하고 교주한테 인사를 하러 가니까 ‘넌 그래 졸업을 했으니 어떡할 거냐’,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싶으나 가정형편이 도저히 용서를 안 하고, 어디 취직을 해서 돈벌이를 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아버지를 도와주는 수밖에 없죠’ 하니까 교주가 하는 말이 ‘내 말대로 하면 너 유학을 보내주마’. 귀가 번쩍 뜨일 거 아닙니까. 유학꺼정 보내준다는데. 그 조건이 뭐냐고 물으니까 ‘유학을 보내 줄 테니까 졸업하고 와서는 모교 교사로서 봉사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맏아들 구관씨, 생전의 ‘옥천신문’과의 인터뷰)

한국·일본 문단서 함께 데뷔

그는 졸업과 동시에 휘문 장학금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영문과에 다니면서 한국 문단과 일본 문단에 함께 데뷔한다. 1926년 6월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의 시와 시조 및 동요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어서 ‘조선지광(朝鮮之光)’ ‘신민(新民)’에 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일본의 ‘근대풍경(近代風景)’에 3년간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 등 시 13편, 수필 3편을 발표한다.

‘근대풍경’의 편집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는 유학 시절의 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끼친 일본 문단의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기타하라는 ‘근대풍경’을 창간하기 이전에 이미 10개의 잡지를 간행한 경험이 있으며, 1930년에 18권의 전집을 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용이 일찍부터 시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시어(詩語)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기타하라와의 만남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 당시 지용에게 영향을 준 시인으로 윌리엄 블레이크를 들 수 있다. 정지용의 졸업 논문 주제가 ‘윌리엄 블레이크 시 연구’였다.

정지용은 1929년 3월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9월에 모교 영어교사로 취임한다. 이때 분가하여 종로에 살림집을 차린다. 기나긴 타국에서의 타향살이 끝에 마침내 가정이라는 안정된 보금자리를 꾸민 것이다. 이듬해 ‘시문학’ 동인으로 가담하면서 문단의 중심권에 자리잡는다. ‘시문학’의 출발은 김영랑과 박용철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정지용은 용아(龍兒) 박용철이 ‘시문학’에 이어 발간한 잡지 ‘문예월간’과 ‘문학’에 계속 작품을 발표하며, 이런 인연으로 용아는 지용의 첫 시집 발간을 주선하여 시문학사에서 ‘정지용시집’이 발간된다. 1932년에는 신생, 동방평론, 문예월간지에 ‘고향’ ‘열차’ 등 10편의 시를 발표한다.

정지용은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으며, 여기에 많은 신앙시를 발표한다. 8월에는 반(反)카프카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표방하고 이종명·김유영이 발기한 ‘9인회’의 창립회원이 된다. 이태준·이무영·유치진·김기림·조용만 등이 함께했다. 정지용과 상허 이태준이 주도하면서 휘문 동문인 박필양과 김유정을 끌어들인다.

정지용은 1938년 동아일보·조선일보·삼천리문학·여성·조광·소년·삼천리·청색지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 우상’ ‘비로봉’, 평론 ‘시와 감상’, 그 외 수필 등 30여편을 발표하며, 블레이크와 휘트먼의 시를 번역하여 최재서 편의 ‘해외서정시집’에 수록한다. 한편 천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는 등 문필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이희승의 호 ‘일석’도 지용의 작품

이듬해 정지용은 ‘문장’지의 시부문 고선위원이 되면서 1930년대 시단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문장’지는 김연만이 출자하고 상허가 편집을 맡은 문예지였는데, 이 잡지를 시발로 한국 문단의 추천제가 정착된다. 엄격하고 권위가 있다는 정평이 난 추천분야는 셋으로, 지용이 시를, 상허가 소설을, 가람 이병기가 시조를 맡았다. 여기서 정지용은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청록파 시인을 비롯하여 이한직·김종한·김수돈·황민·박남수 등의 시인을 추천한다. 그는 추천을 하고 나서 꼭 추천사를 썼다. 이 추천사가 당시 추천을 받으려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으로 정지용의 아류가 양산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지용이 무명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을 발굴하여 그의 시집까지 내 준 사연은 매우 애틋하다. 명동의 어느 문둥이 거지가 지녔던 원고 뭉치를 잡지기자에게서 받아든 정지용은 그것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아, 이건 참 시인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클 수 있는 사람이다.” 지용은 당장 발문(跋文)을 써줬다. 당시에는 어떤 시인이 자기 시집을 내고 발문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시인 등단 여부가 결정났던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성은 뭐고 이름은 뭐냐고 하니까 원고를 주고 갈 때 당신 이름을 좀 밝히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니까 ‘한가요’ 하고 가더래요.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대요. 그래 지용이 ‘그 이름 없어도 좋아. 이름은 내가 지어주면 돼’ 그래서 어찌 하(何)자, 구름 운(雲)자, 어느 곳을 떠돌아댕기는 구름이냐. 그렇게 한하운이란 시인의 이름을 지용 시인이 지어준 거예요.”(구관씨)

그렇게 정지용이 아호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꽤 많다. 국문학자 이희승 교수의 아호도 정지용의 작품이다. 동년배에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이희승 선생님에게 ‘호가 무엇입니까?’ ‘나 호 없어요’ 해요. ‘그럼 선생님 내가 하나 지어드리죠, 하고 일석(一石)이라고 그 자리에서 붓으로 써 줬어요. 그래 그 양반 평생 그걸 호로 썼어요.”(구관씨)

한편 죽산 조봉암의 딸 호정에게는 이름을 턱 보더니 조봉암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호강(상하이에 있는 강 이름)에서 맺은 사랑이었구나”라고 호정이라는 이름을 애틋하게 풀어줬다고 한다. 지용이 이화여대 교수시절 학생들 이름을 친근하게 다루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는 시어(詩語)를 고르고 다듬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지 않는 고어(古語)나 방언을 시어로 폭넓게 활용하고,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시켜 자신만의 시어로 개발했다. 1920년대 소월(素月)이 자아표출을 통하여 자기 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한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다면, 정지용은 대상의 뒤에 자신을 숨기고 대상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명징한 모더니즘·이미지즘의 시세계를 보인 것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손자 운영씨.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손자 운영씨.

정지용은 서구의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답게 형태주의적 기법을 시도한 최초의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였다. 김우창은 정지용이 “감각과 언어를 거의 가톨릭적 금욕주의의 엄격함으로 단련하여 ‘백록담’에 이르면, 감각의 단련을 ‘무욕(無慾)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경지에 이른다”고 보았다. 최동호도 “서구 추구적인 아류의 이미지즘이나 유행적인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순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고 평가한다.

1940년에 정지용은 여성·태양·문장·동아일보·삼천리지에 기행문 ‘화문행각(畵文行脚)’과 서평 및 시선후평과 수필, 시 ‘천주당’ 등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문장 22호 특집으로 ‘조찬’ ‘진달래’ 등 10편의 시가 특집으로 실리며, 둘째 시집 ‘백록담’이 문장사에서 발간된다.

“그분은 주로 한복을 많이 입었어요. 겨울에는 명주 두루마기 까맣게 물들여서 입고, 구두 신고 출근하고 다녔지요. 제자들이나 아이들이 양복을 입으시라고 해도 꿈쩍을 안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최소한도로 조선 사람이라는 표시는 한복을 입는 것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학교 가면 가르칠 때 일본말을 해야 하고, 이거 아니고는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인정하겠느냐, 표시하겠느냐. 그래서 그렇게 입고 다녔다는 것이지요.”(구관씨)

정지용은 1944년에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나가 천주교성당 건축일을 도우면서 생계를 꾸려간다. 월급날 월급을 타가지고 서울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건네 주려고 기차에서 내렸을 때 대합실에서 어느 여인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그는 노잣돈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딱한 하소연을 듣고 월급 봉투를 그대로 내주면서 집에 돌아가는 대로 빨리 갚으라고 당부했다. 며칠째 기다리다 월급을 통째 떼인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순진한 시인의 아내임을 탄식했다고 한다.

1945년 광복 후 정지용은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교수가 되어 국어와 라틴어를 가르친다. 이듬해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노기남 주교의 천거로 주간직을 맡으며, 경향신문에 ‘청춘과 소년’ 등과 7편의 역시(휘트먼 원작) 등을 발표한다.

1980년대 문화계서 복권 운동

1948년 정지용은 이화여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서예를 하며 소일한다. 이때 어느 잡지에서 정지용이 월북했다는 허위기사를 보도한다. 정지용은 그 잡지를 가지고 당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를 찾아가 대책을 협의한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지용은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되며, 정인택·김기림·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전쟁 당시 납북이냐, 월북이냐에 대한 시각 차이로 인해 한국 현대시사에서 금지된 이름으로 남게 된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공인되어온 그의 시는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며, 학술논문에서조차 그를 언급해야 할 때는 ‘정용’으로 흉물스럽게 인용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급기야 한국 현대시에서 정지용을 살려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정지용의 장남인 정구관씨가 있었다. 그가 발로 뛰어 받은 문화계 인사들이 서명한 해금탄원서와 납북 당시의 증언들이 기재되어 있는 각종 문헌들의 조사 자료, 당국에 조사 의뢰하여 받은 납북 행적 자료 등이 제출되었다. 마침내 1988년 도서출판 깊은샘에서 발행한 ‘정지용의 시와 산문’ 작품집에 대해 납본필증이 교부되었다.

정지용은 송재숙과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정지용의 복권을 위해 눈물을 글썽이며 문단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던 장남 구관씨는 2004년에 작고했으며, 차남 구익씨는 6·25전쟁 때 작고했다. 3남 구인씨는 부친을 찾아 나섰다가 북한에 생존해 있으며, 외딸 구원(77)씨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구관씨는 2남2녀를 두었다. 지용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구관씨의 장남 운영(52·하이덱스스토리지 대표)씨와 차남 문영(49·운수업)씨와 장녀 수영(44·주부), 차녀 란영(41·주부)씨가 있다.

내가 본 정지용

유자효 시인·지용회 회장

정지용은 우리 현대시사 그 자체다. 1908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한국 현대시가 시작된 이래 1925년에 나온 소월의 ‘진달래꽃’과 만해의 ‘님의 침묵’이 율조와 깊이로서 기여했다고 한다면, 한국 현대시를 언어의 높이로서 지탱한 시인이 정지용이다. 그는 1930년대 모더니즘의 영향권 아래 출발했으나, 그 테두리를 벗어나 동양의 고전과 우리의 전통과 만난다. 그의 시의 청신한 이미지는 서양시의 단순한 역어적 차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보다 동양적인 흐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같은 성격이 한국 현대시 사상 그를 가장 탁월한 시인이게 하는 이유라고 본다.

정지용은 초기부터 시의 공간성을 확대시켜 나갔다. 탁월한 이미지가 도처에서 번뜩이고 있다. 눈에 선하게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언어감각으로 시를 썼다. 지용 이후의 시인 또는 동년배의 시인조차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시인이 없다는 사실은 그에 의해서 한국의 현대시가 비로소 한 장르를 형성하게 됐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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