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한국의 名家 <현대편>]  (48) 이필석
  • facebook네이버 밴드youtubekakao 플러스친구
  • 검색
  1. 문화/생활
[2187호] 2011.12.26
관련 연재물

[한국의 名家 <현대편>](48) 이필석

말단 은행원에서 산업은행 총재까지 자기앞수표 첫 도입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photo 이봉서
단암(丹菴) 이필석(李珌奭)은 말단 은행원에서 산업은행 총재까지 역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6·25전쟁 중에 일본에 유학한 후 ‘전후일본부흥상’이란 연구서를 내 한국 경제의 전후 재건 지침서로 삼게 한 금융인이다. 그는 광복 직후 평양 신탁은행 근무 중 소련군 헌병사령부에 맞섰다가 최초로 탈출, 월남한 금융인이기도 하다.
   
   그의 형 병석(炳奭)도 도쿄상대 졸업 후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근무하다 일본 행정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의 재무부 이재국장 등을 역임했다.
   
   단암의 장남 봉서(鳳瑞)는 상공부 장관과 동력자원부 장관을 지냈으며, 그의 장인이 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에다 동서가 조석래 전 전경련 회장(효성그룹 회장)으로 백부, 부친과 더불어 재계의 한 축을 형성한 셈이다. 그는 서울대 상대 재학 중 미국 위튼스쿨에 진학해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수석 졸업하며, 대학 졸업 성적에 따라 하버드대학에 무시험으로 입학하여 석·박사 학위를 받는 영예를 누린다. 하버드대 입학 동기로는 김경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서상철 전 동자부 장관, 백낙청 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1971년에 귀국하여 동자부 기획관리실장, 대통령경제비서관, 동자부 차관·장관, 상공부 장관 등을 지낸다.
   
   단암의 차남 경서(景瑞·서울대 공대, 미국 MIT대 졸업, 대학원 기계공학박사)는 1966년 미국음향진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비행기, 잠수함 등 무기의 소음을 없애는 일을 맡았다. 1969년 KIST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2년간 유체기구연구실장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기계공업육성방안을 성안했다. 이듬해 국방과학연구소로 옮겨 장거리유도탄개발팀장을 맡아 2년간 개발가능성을 검토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북이 사정거리 40~70㎞인 프로그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노동1호와 핵을 개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도탄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북이 서울을 때리면 우리도 평양을 때릴 수 있는 사정거리 200~250㎞ 정도의 중거리유도탄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한강에 아파트를 한 채 빌려 중앙정보부의 감시 아래 4~5명의 연구원들과 개발가능성을 검토하는 한편, 국내에 있는 미군 유도탄을 모두 살펴보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유도탄 개발상황도 시찰했다. ‘유도탄의 아버지 폰 브라운이 근무했던 미국 유도탄연구소 조지마샬센터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기도 했다.”(‘신 명가’ 조선일보 1995년 7월 24일)
   
   이경서 박사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전기계창’이라는 위장간판을 달고 연구에 몰입하여 1979년 태안반도 안흥에서 로켓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 중에 한국 제1호 원거리 로켓을 개발하는 실무책임자의 중책을 맡았었다. 그러나 이듬해 신군부의 등장으로 국보위가 발족하면서, 미국의 사후승인을 받을 필요를 느낀 신군부 주체들이 국방과학연구소를 사실상 해체하며 숙정 제1호로 이 박사는 해임된다.
   
   
   상공학교 시절 두 차례나 월반
   

   단암은 1914년 2월 4일 평남 강서군 신정면 연하리에서 이술배(李述培)와 임순애(林順愛) 사이의 2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관향은 교하(경기도 파주군)지만, 조상들은 대대로 평양과 진남포 중간에 자리잡은 강서군에서 거주하며 연간 수백 석의 농사를 짓는 부농이었다.
   
   “나는 남북한을 통하여 각 지방을 여행해 보았지만 내 고향 강서보다 살기 좋은 곳은 없는 것 같다. 남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을 경계로, 중심에는 그리 높지 않은 구릉이 뻗어 있으며, 서로는 황해를 끼고 있으므로 산과 육수, 해수의 모든 진미를 구비하고 있다.… 벽화로 유명한 강서 고분도 이곳에 있으며 일찍이 낙랑, 고구려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제는 다시 가보기 어려운 망향의 꿈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원래 풍토가 좋으니 인물도 역시 많았다. 민족적 지도자로서 숭앙받는 조만식 선생, 안창호 선생이 모두 강서군 태생이며, 일찍이 기독교의 교화를 받은 관계로 미국 유학이 성행하였으며, 신학문 교육열이 대단하여 개화가 빨랐던 곳이기도 하다.”(‘단암 이필석 회고’)
   
   단암은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며, 아홉 살까지 서당에서 맹자와 논어를 공부하다 열 살에 보통학교에 들어간다. 부친은 한학자였으며, 모친은 근검 절약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단암이 다니던 보통학교는 집에서 10㎞나 떨어진 곳에 있어서 어린 나이에 매일 40리를 걷는 것이 힘들었던 듯하다.
   
   “키가 3미터가량이나 자란 수수밭 사이를 혼자 지나갈 때는 혹시 승냥이가 나올까 몹시 두렵기도 했다. 하학길에서 소 먹이는 목동들이 작당하여 희롱하는 일이 많아 학교 다니기가 무서웠던 것이다.”(‘단암 이필석 회고’)
   
   단암은 그보다 네 살 위인 형이 진남포상공학교에 입학하게 됨을 계기로 120리 떨어진 진남포로 전학한다. 그는 5년 동안 자취생활을 하면서 두 차례나 월반하여 1927년에 진남포상공학교 상과에 입학한다. 이 학교 재학 시의 성적은 전 학년을 통하여 1, 2등을 다투나 2학년 때 2등에서 1등을 차지하는 단암의 승부근성이 돋보인다.
   
   
   김일성에 항의, 월남
   
   “나와 1~2등을 다투던 황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하숙을 하고 있었고 나는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2시간여가 취사에 소모되어 그 시간에는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어 그만큼 성적 다툼에 불리하였다.… 결국은 수면시간을 단축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나의 성적 적수인 황군이 투숙하는 하숙집을 혼자 엿보기 위해 야간과 새벽녘에 수차 찾아가 몇 시에 취침 소등하며 몇 시에 기상하여 불을 켜는가를 조사한 후 그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남으로써 자취에 소요되는 시간적 손해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 나이 열다섯에 있었던 일이지만 나는 모든 승부에서 남에게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단암 이필석 회고’)
   
   단암은 상업학교 졸업반 때 비로소 자취를 그만두고 하숙을 하며 상급학교 입시에 몰두한다. 그는 120명 정원에 한국인은 12명만 뽑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에 무난히 합격한다. 그는 하숙생활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으로 소문나 17세 때 15세의 진남포고녀 1년생 최응학과 약혼하며, 5년 후 결혼한다.
   
   단암은 1935년에 경성고상을 졸업하며, 이듬해 조선신탁 평양지점에 입사한다. 그는 광복 직전에는 조선신탁의 한국인 책임자 3명 중에 꼽힐 만큼 대표적인 금융인 반열에 오른다. 광복을 맞아 단암은 조선신탁 평양지점장이 되어 운영책임자가 된다. 그는 김일성에 항의하여 북조선 중앙은행 설립을 반대하고 월남하는 첫 번째 금융인이 된다.
   
   1946년 월남한 단암은 한국신탁은행 은행부장에 취임한다. 당시 좌익의 성토대회가 무서워 모든 은행이 문을 닫았으나, 단암만이 좌익 스트라이크에 맞서 금고문을 열고 은행 업무를 수행해 미 군정당국 재무부장의 칭찬을 받는다. 이때 그는 무용가 최승희에게 대부해 주어 예술활동을 돕기도 한다. 그는 최승희의 무용은 재생시켜야 한다는 확신으로 자신의 단독책임으로 30만원을 대부해 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북에서 최승희의 남편이 그녀가 미군위로공연을 하려는 것이 이북에서의 그의 활동에 방해가 된다면서 데려가 버렸다.
   
   “그녀는 두 남매의 어머니로서 남편을 따르느냐 아니면 예술을 살리기 위해 남편의 뜻을 거부하느냐의 갈등으로 연일간 울며 싸우다가 결국 안막을 따라 이북으로 도주했다. 최승희는 이 선생에게 대단히 미안하지만 그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단암 이필석 회고’)
   
   
   뚝심으로 위기 정면돌파
   
   1947년 단암은 한국신탁은행 대구지점장으로 전근한다. 바로 전해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이른바 10·1사건으로 알려진 좌익 난동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데다 전혀 연고도 없는 객지 발령이어서 단암은 가족을 서울에 둔 채 단신 부임을 한다. 1946년 10월 1일 경북 영천읍에서 발생한 좌익 난동사건으로 다수의 인명살상과 재산파괴를 가져왔으며, 이 불행한 사건은 대구 시내까지 파급되어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단암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이러한 역경을 뚫고 1년 안에 예금고를 10배로 올리는 전례없는 기록을 세워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질서의 존중’이라는 행훈을 자필로 써서 벽에 걸게 한다. 지금은 어느 직장을 막론하고 사훈에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정도로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당시 사정은 달랐다.
   
   “그때 나는 34세였는데 부지점장 및 지점장 대리가 모두 50세를 넘었고 또 서무 및 대부의 각 주임이 45세를 넘은 분들이었으므로 모두 나보다는 10년 이상 연상이었다. 그 당시는 종래의 장유유서의 서열감이 강했으며, 특히 그곳이 보수색 짙은 대구였기 때문에 연장자가 어른 행세 하는 것이 상례였으며, 그것도 10년 이상 차이면 세대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었다. 간혹 외래객이 인사차 지점장석까지 왔다가는 착각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부지점장석으로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므로 지점운영과 장차 업무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상명하종(上命下從)의 질서강요가 근본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질서의 존중을 행훈 제1로 하는 난센스를 연출했다.”(‘단암 이필석 회고’)
   
   당초 신탁은행은 다른 은행에 비해 예금량도 크게 적고 대구 사람들이 보수성이 강해 한번 거래한 은행을 바꾸려 하지 않는 데다, 지점장이 향토색 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청년이니 배타심이 강한 이곳에서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지역 원로와 유지들을 매일 심방을 거듭하여 감동시켜 부임 1년 만에 인계받은 예금고의 10배인 2억2000만원을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서울 본점 영업부장으로 개선한다.
   
   단암은 1950년 6·25전쟁 중에도 피란을 가지 않고 은행을 지킨다. 공산당의 무자비한 비판교육에 질린 데다 자기비판서를 쓰라는 강요를 받으면서, 그는 체포를 피해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피신하다가 9·28 서울 수복을 맞는다. 수복 후에 단암은 부역자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피란하지 못하고 적 치하에서 잔류하여 근무한 이른바 부역은행원 다수를 앞장서서 구제한다. 단암은 병자호란의 교훈에 따라 부역 동료 전원 구제에 성공한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으나 다수의 부녀자가 오랑캐군 점령하의 서울에 잔류하여 농락당했다. 왕이 수복하여 보니 잔류 부녀자들의 정절을 의심하며 욕설로 대하므로 왕명을 내려 전 부녀자에게 홍제원 연못가에서 목욕을 하게 하고 그후 일체의 의혹을 대사했다는 일화를 원용한 것이다.
   
   단암은 피란시절인 1951년 한국신탁은행 영업부장 겸 부산지점장이란 요직을 맡으며, 이듬해 이사로 승진한다. 하지만 단암은 단순한 금융인의 차원을 넘어 전쟁으로 피폐한 전후 국가의 재건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안락한 은행원의 일상을 접고 일본 유학을 결행한다. 우리와 가장 유사한 경제 구조를 지니고 있는 데다 2차 대전에서 막 일어난 일본의 부흥상을 우리의 경제재건 모델로 연구하고자 한 것이다.
   
   전쟁 중이어서 직장의 유학제도 자체가 전무한 데다 무급출장 형식으로 1953년 6월 10일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단암은 과거 8년간의 신문을 수집하여 일본 부흥의 발자취를 샅샅이 훑으며, 도쿄 간다 고서점가를 헤매면서 퇴적된 문서철을 뒤지기도 한다. 한국은행 도쿄지점을 비롯하여 일본은행 조사부, 미쓰비시 경제연구소, 동양경제신보 조사부 등을 탐방하여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알찬 자문을 받았다. 2개월쯤 후에는 연구 주제와 내용 목록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그후 약 6개월간 전후 ‘일본경제부흥상’이라는 주제로 원고지 2000장을 써내려갔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은 미국으로부터의 외자도입에 급급하면서 2차대전 이전의 경공업 국가에서 중화학공업 국가로 대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은행의 기업에 대한 지원도 대단히 적극적이어서 큰 상사는 거의 은행 관리하에 금융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중화학공업에 대해 중점적인 금융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모두가 당시 한국 경제계에는 새로운 자료여서 단암의 책은 경제 서적으로서는 드물게 곧 재판에 들어가기도 했다.
   
   
   단암장학회 설립
   
▲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남 봉서씨.
단암은 책을 낸 이듬해인 1955년에는 미국 워싱턴대학에 유학하여 미국 금융제도도 연구한다. 그는 당시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진열된 한국인 거지 모형에 분개하여 항의하고 비단옷 한복을 입은 한국인 모형으로 바꾸게 한다.
   
   “일본은 사무라이 귀족의 살림, 중국은 궁정복식의 귀인 살림이 전시돼 있었는데 한국은 어찌된 일인지 아이누족, 티베트족을 좌우로 그 중간방에 긴 담뱃대를 물고 더러운 옷을 입은 거지 모양의 남녀가 진열하여 있었다.… 나는 처가 보내준 한복과 함께 강경한 내용의 항의문을 박물관장에게 보냈다. 결국 나의 항의는 바로 수락되어 한국 거지는 즉각 철거됐고, 박물관장으로부터 감사의 편지도 받았다.”(‘단암 이필석 회고’)
   
   단암은 귀국한 후 1956년 흥업은행 상무 시절에는 정액자기앞수표를 처음 도입한다. 이 정액보수제는 10만환·5만환·3만환·1만환 등 4종의 보증수표를 미리 인쇄해 두었다가 요청하는 고객에게 즉각 내줌으로써 보수작성 희망자의 약 7할에 해당하는 고객에게 종래 40분씩이나 소요되던 시간을 10분 이내로 단축시킨 획기적 방법이었다.
   
   단암은 1960년 상업은행장으로 승진하며 이듬해 5·16쿠데타 후에는 유능한 금융인으로 천거되어 산업은행 총재가 된다. 그러나 그는 반혁명사건의 장도영 국가최고회의 의장과 같은 고향(평안도)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오해가 풀려 40일 만에 석방된다.
   
   단암은 구속에서 풀려난 후 이한원 국제화재해상 대표의 권유로 국제화재해상 경영에 참여한다. 그후 이한원씨가 지분을 회수해가 오너가 된다. 그가 서울 남대문 앞에 세운 국제화재보험빌딩은 지상 28층의 연건평 1만 1000평 규모로 당시로서는 서울에서 최고의 고층빌딩이었다. 단암은 이후 금융통화위원, 대한소년단 총재 손해보험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다. 1984년에 단암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1995년부터는 서울대 도서관 도서구입비로 매년 1억원씩 10년간 10억원을 출연했다. 단암은 2000년 3월 8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1가 134번지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송곡리 선영에 안장된다.
   
   단암은 최응학과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봉서(75·단암그룹 회장)씨는 능률협회 회장으로 송원자(71·미 버지니아 메리워싱턴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3자매를 두었다. 장녀 미영(47·서울대 영문과 2년 수료)씨는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후 닐 심킨스(Neil Simpkins)씨와 결혼했다. 차녀 티나(45·서울대 불문과, 뉴욕대경영학과 졸업)씨는 미국에서 투자회사를 경영하는 최규남(48·스탠퍼드대 MBA)씨와 결혼하였으며, 3녀 원영(39·숙명여대 졸업)씨는 이정연(이회창 전 총리의 아들)씨와 결혼했다.
   
   단암의 차남 경서(73·단암전자 회장 역임)씨는 한사미(71·이화여대 졸업, 한인선 내무부 건설국장의 아들)씨와 결혼하여 1남2녀를 두었다. 아들 성혁(41·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씨는 행정고시에 합격했으나 미국 유학을 하여 하버드대를 나와 단안데이타를 운영하고 있다. 장녀 신영(45·이화여대, 파인매너대 졸업)씨는 임광원 한국종합전시장 사장의 아들인 유철(48·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케네디행정대학원 졸업)씨과 결혼하였으며, 차녀 진영(39)씨는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했다. 단암의 딸 온실(64·이화여대 졸업)씨는 신현철(67·유타대 경제학 박사, 한국수출입은행이사 역임, 신태환 전 통일원 장관 아들)씨와 결혼하여 재욱·정인 형제를 두었다.


   
내가 본 단암 이필석
   
   이현재 전 국무총리·삼성문화재단 이사장
   
   나는 단암 선생님이 1975년 서울대 상대 동창회장으로 계실 무렵부터 대학선배로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모교 교수이기도 하여 그분의 애틋한 모교사랑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평소 스스로를 노랭이라고 자칭하시면서도 보람있는 일을 하려 하시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모교 후배들을 지원하셨다. 어려서부터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서 특출한 자녀교육으로 보기 드문 성공사례를 남기셨다. 장남은 미국 하버드대학 박사로 상공부 장관을 지냈으며, 차남도 MIT 박사로 우리나라 미사일 개발에 기여한 국보급 인재다.
   
   얼마 전 청계천 고서점에서 단암 선생의 희귀 저서였던 ‘전후 일본 부흥상’을 마침 구입해 장남 이봉서 전 장관에게 보냈더니 매우 기뻐했다. 생전에 단암 선생께서는 아들이 장관이 되자 “이 교수, 평생 아들을 장관 시키고 싶었어” 하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하시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그처럼 순수한 면을 간직한 분이셨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