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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288호] 201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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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보이차 이야기]숙차냐? 생차냐? 보이차의 불편한 진실

서영수  영화감독 

▲ 건조 중인 모차. 생차와 숙차의 재료가 된다.
“생차(生茶)를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숙차(熟茶)로 드실래요?” 보이차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듣기에 다소 생소한 이 물음 속에는 보이차를 제조방식에 따라 분류한 현대 보이차의 정의가 들어있다. 보이차에 입문할 때 가장 처음 만나는 궁금증인 동시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통성과 맛, 효능의 우월성을 놓고 이견이 격하게 충돌하는 지점이 진짜 보이차가 생차냐 숙차냐는 문제다.
   
   윈난(雲南)의 소수민족이 수천 년 동안 만들어온 전통 방식의 보이차는 생차다. 지금도 그들은 그해에 만든 생차를 마시며 해를 넘긴 묵은 차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일부 소수민족이 약용과 식용으로 찻잎을 발효시켜 먹었지만 발효방식이 지금의 숙차와는 전혀 다르다.
   
   보이차의 기원과 발원 속에 등장하는 신농과 제갈량의 전설을 비롯하여 숱한 야설과 풍문을 뒤로하면 보이차가 처음 등장하는 역사기록물은 당나라의 번작(樊綽)이 쓴 만서(蠻書·서기 863년)다. 이 책의 윈난 물산 소개에 보이차가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만서에도 숙차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또 명나라 때 기록된 운남통지(雲南通志)와 전략에도 보이차의 유래와 제조방식이 제법 소상히 기록되어 있지만 역시 숙차에 대한 설명은 없다.
   
   청나라 옹정(雍正) 황제에게 처음 진상된 후 황실공차(貢茶)로서 위상을 높인 보이차도 숙차가 아닌 생차였다. 청나라 때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고 6대 차산을 중심으로 번성한 개인 차창에서 생산한 보이차도 모두 생차였다.
   
   보이차의 역사적 등장에서부터 개인의 보이차 생산과 판매를 금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생산된 보이차는 모두 생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에 중국 정부가 발표한 보이차의 정의에는 생차가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후발효 가공을 거쳐 만들어진’이라는 애매한 표현 대신에 ‘후발효를 위하여 만들어진’이 정통 보이차인 생차를 이해하는 적확한 표현인데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이 표현을 아꼈다. 보이차에 대한 공식적 정의는 수정과 교정을 거듭하다 2008년에 와서야 ‘윈난 지역 대엽종…중략…쇄청한 원료로 만든 생차(生茶)와 숙차(熟茶)’라고 확정됐다. 1973년에야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숙차에 비하여 수천 년의 역사 속에 이어져온 정통 보이차의 원형질인 생차가 보이차의 정의에 뒤늦게 편입한 것이다. 이러한 정통 보이차(생차)의 굴욕사는 마오쩌둥(毛澤東)과 무관하지 않다.
   
   마오쩌둥은 1956년부터 개인이 차를 팔지 못하게 하였으며 모든 생산시설을 국유화하였다. 이우(易武)를 중심으로 한 보이차 산업은 붕괴되었다. 보이차에 대한 핍박은 홍위병을 앞세운 문화대혁명 때 절정에 달해 관련 시설 등이 모두 불태워졌다. 보이차를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적 향유물로 인식한 결과였다. 전통적 제조방식으로 만든 생차의 수난시대였다. 지금은 거의 회자되지 않는 단어지만 차위(茶圍)라는 뜻은 중국어 사전에 의하면 ‘기루(妓樓)에서 기생을 상대로 차를 마시며 노는 것’을 말한다. 반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차를 즐긴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단어라 여겨진다. 공자마저 비판과 청산의 대상이었던 문화대혁명(1966~1976) 기간은 거친 시기였다. 중국에서조차 이 기간을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며 1981년 문혁이 마오(毛)의 과오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중국 인민의 삶에 있어 차가 차지하는 무게를 뒤늦게 간파한 중국 정부는 내수와 수출을 위하여 차 생산을 뒤늦게 독려하지만 다원과 산업기반이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할당된 생산량에 내몰린 차농들은 높은 곳의 가지를 잘라내어 채엽하였다. 심지어 커다란 고차수를 밑동부터 잘라 버렸다. 차나무가 위로 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간(主幹·주된 줄기)을 잘라 왜화(倭化)하는 등 생태계를 황폐화시켰다. 정통 보이차의 또 다른 고난의 시간이었다. 예전부터 유명한 다원들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경사도가 심한 심산유곡에 있는 고차수 다원들은 이러한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입어 최고급 보이차의 원료기지로 오늘날 각광받고 있다.
   
   죽의 장막 시절에 유일한 수출 창구인 홍콩은 숙성된 보이차를 원했지만 중국 대륙에는 좋은 보이차가 이미 없었다. 홍콩인들이 좋아하는 맛의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나긴 세월이 필요했다. 윈난성 정부는 광동 지역에서 유행하던 속성발효법을 거치면 숙성된 보이차의 맛을 흉내 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수차례에 걸쳐 기술자를 파견하여 발효기술을 배워왔지만 제대로 된 차를 만들 수 없었다. 급기야 미모의 산업스파이를 위장취업시켜 핵심기술을 빼내왔고, 수차례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숙성된 보이차의 맛과 탕색을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공법으로 숙차를 탄생시킨다. 이후 정통 보이차 대신에 수개월 동안 급조한 숙차를 대량생산하여 홍콩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원래 숙차는 생차를 원료로 오랫동안 잘 숙성된 노차(老茶)를 가리킨다. 미생물 발효를 촉진시켜 생차를 인위적으로 익히기 위하여 물을 뿌려가며 강제로 숙성시키는 조수악퇴발효(潮水渥堆酵)기법을 사용하여 만든 차는 전통적 기준에서 숙차라 부를 수 없다. ‘악퇴발효차’라 부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수출을 위하여 오래된 생차인 양 숙차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 동안 유통되다 보니 이제는 세월을 뛰어넘기 위해 만든 미생물발효차가 숙차로 통용되고 있다. 이와 구별하기 위해서 오래된 진짜 보이차를 노생차(老生茶)라고 부르지만 궁여지책이다. 세월 뛰어넘기를 위한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숙차는 보이차의 대중화와 수출에는 크게 기여하였지만 정통 보이차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재앙이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소수민족의 문화에 뿌리를 둔 생차는 15% 정도로 숙성된 상태에서 유통된다. 유통 과정에서 세월의 양과 질에 따라 85% 이상의 숙성을 기대하는 차다. 반면 조수악퇴발효기법을 거친 현대적 의미의 숙차는 출시될 때 이미 85% 정도 완성이 되어 있기에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15% 이상의 발전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차다. 숙차는 같은 산지의 똑같은 원료를 사용하더라도 발효기술이 들어가고 제조공정도 길어서 생산 원가가 훨씬 더 들지만 생차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받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격 편차는 더욱 벌어져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정통 보이차는 ‘자연 숙성’을 전제로 하는 차이기 때문이다.
   
서영수
   
   1956년 부산 태생. 유현목·이두용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뒤 1984년 영화감독으로 데뷔.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조예가 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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