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방추지덕’, 1904년, 목판채색, 27.6×37.8㎝,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자미상, ‘방추지덕’, 1904년, 목판채색, 27.6×37.8㎝, 한국학중앙연구원

드디어 귀국했다. 68세의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다. 그가 노나라 땅을 다시 밟게 된 데는 제자들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 공자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노나라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염구(冉求), 자로(子路), 자공(子貢)은 노나라에서 핵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공서화(公西華)는 외교사절로 외교적인 일을 맡았고, 자유(子游)는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었다. 자하(子夏)는 거부(莒父)의 읍재가 되었고, 유약(有若)은 노나라가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공을 세워 애공(哀公)과 국정을 논했다. 나중에 공자의 손제자가 된 양부(陽膚)는 치안을 담당하는 판관이 되었다. 그야말로 공자 제자들의 전성시대였다.

공자의 제자가 자신이 맡은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방추지덕(放鲰知德¡¤어린 물고기를 놓아주는 것을 보고 덕망을 알다)’이다. 공자가 귀국하기 전 위(衛)나라에 갔을 때였다. 공자는 단보(單父)지역의 재상으로 간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공자는 제자 무마기(巫馬期)를 시켜 단보지역의 민심을 살펴보도록 했다. 무마기는 몰래 옷을 벗어 버리고 대신 다 해어진 갖옷을 입고 단보 경내에 들어섰다. 마침 밤이 되어 고기를 잡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부는 잡은 물고기 중에 작은 것은 도로 놓아주고 큰 것만을 가려내고 있었다. 궁금해진 무마기가 이유를 묻자 어부가 대답했다.

“우리 마을의 수령께서 어린 물고기는 다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잡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마기가 돌아와서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복자천이 덕으로써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지극함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이 어두운 밤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바로 곁에서 엄한 형벌이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일찍이 복자천이 다스림의 요체에 대해 물었을 때, 내가 이 일에 성실한 사람은 또한 저 일에 있어서도 본받을 수 있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 방법을 시행하고 있었구나.”

그림 오른쪽 병풍 앞에 앉은 사람이 공자다. 공자 곁에는 두 명의 제자가 서 있다. 공자나 제자 모두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다. 이 자세는 유가(儒家)의 전형처럼 알려진 공손한 자세다. 그들이 지금 야외에 있는데 병풍이 설치된 것도 이치에 맞지 않거니와 탁자 위에 죽간 대신 책이 놓인 것도 고증이 틀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화가가 살던 시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그리다 보니 발생한 오류다. 그림을 읽는 사람은 이런 사소한 흠집에 걸려 넘어지는 대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으면 된다. 그림 왼쪽에는 두 사람이 물가에 서서 대화를 나눈다. 무마기와 어부다. 유가인 무마기 역시 두 손을 모은 채 어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우리 마을의 수령께서는’으로 시작된 어부의 말을 들었을 때 무마기도 같은 ‘패밀리’로서 마치 자신의 선행을 칭찬받은 듯 뿌듯했으리라.

‘방추지덕’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배운 대로 잘 실천하고 있는 제자를 본 공자의 흡족함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이다. 예전에 우리 부모님이 ‘안 먹고 안 쓰고’ 교육에 투자해 성공한 자식을 바라볼 때의 흐뭇함과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공자성적도’에는 공자가 제자들의 활약상을 보고 만족감을 느낀 장면이 여러 곳에 담겨 있다. 자로가 재상이 되어 포(浦)지역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그의 정치에 대해 칭찬하는 ‘과포찬정(過蒲贊政)’, 자공이 신양(信陽)의 재상이 되어 길을 떠날 때 당부하는 ‘자공사행(子貢辭行)’, 자고(子羔)가 위나라의 사사(士師)라는 관리로 있을 때 어질게 법 집행한 것을 칭찬한 ‘자고인서(子羔仁恕)’, 자유가 무성 땅에서 재상이 되었을 때 군자의 도에 대해 대화를 나눈 ‘무성현가(武城絃歌)’ 등등 공자의 제자들의 활약상은 끝이 없다.

젊고 유능한 제자들의 활약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 정치가 공자는 BC 484년 겨울, ‘화려한’ 귀국길에 올랐다. 노나라의 실권자 계강자(季康子)의 초청에 응하는 형식이었다. 스승의 귀국을 위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자는 자공과 염구였다. 자공은 뛰어난 언변과 논리적인 화술로 시끄러운 국제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의 탁월한 외교력으로 자칫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오나라와의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됐다. 예법을 강조한 외교술 덕분이었다. 먼 훗날의 얘기지만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른 제자들이 모두 3년 만에 여묘살이를 끝냈으나 자공은 다시 3년을 더하여 6년간이나 공자의 무덤을 지킬 정도로 스승에 대한 마음이 극진했다. 그는 외교뿐만 아니라 예법에서도 전문가로 평판을 얻었다. 자공은 공자의 가르침을 자신의 일에 적용해서 성공한 제자였다.

자공과 더불어 공자의 귀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제자는 염구였다. 그는 공자가 귀국하기에 앞서 계강자의 가신이 되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귀국하기 몇 달 전에 염구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해 온 것이다. 당시 노나라의 군주 애공은 거의 힘이 없었고 실질적 권한은 세 가문(계손씨, 맹손씨, 숙손씨)이 쥐고 있었다. 세 가문의 뿌리는 같은 조상이었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거의 원수처럼 지냈다. 계손씨의 권력이 워낙 비대해지다 보니 소외감을 느낀 맹손씨와 숙손씨의 심기가 불편했던 까닭이다. 세 가문은 사사건건 부딪치고 반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했으니 만약 세 가문이 합심하지 않으면 노나라가 패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때 염구가 나서 세 가문을 설득하고 번지(樊遲)를 부관으로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번지도 공자의 제자였다. 염구의 노력 덕분에 세 가문은 합심해서 제나라를 물리쳤다. 노나라는 물론 세 가문도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제 노나라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염구는 계강자에게 스승 공자를 모셔 오자고 제안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계강자가 염구에게 물었다. “그대는 군대의 일에 대해 배운 적 있는가? 아니면 타고난 재능인가?” 염구가 대답했다. “공자에게서 배웠습니다.” 계강자가 말했다.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염구가 대답했다. “그를 등용하면 나라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방식을 백성들에게 시행하거나 귀신에게 고하건 간에 유감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저와 같은 길을 걷게 한다면 비록 천 개 마을을 상으로 내려준다 해도 자기 몫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강자가 말했다. “내가 그를 초청하려고 하는데,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공자는 ‘국가의 원로’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러나 고국에서의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노나라의 사정도, 그를 모셔 온 제자들의 사고방식도 더 이상 공자의 훈계 한마디로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한물간’ 정치인이었고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기에는 너무 머리가 커져 있었다. 새로운 시련이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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