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의 마지막 글을 쓰기에 앞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성균관대학교에 갔다. 문묘(文廟)를 보기 위함이다. 문묘는 학교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있다. 규모와 위용이 대단하다. 문묘 안에 들어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성전(大成殿) 앞 계단에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온 듯한 남녀 한 쌍이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치 이름만 남고 실체가 사라진 공자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문묘는 대성전과 명륜당(明倫堂)이 결합돼 있다. 앞쪽의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공자가 만세의 사표가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고전의 정리다. 공자는 책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직접 쓴 책은 한 권도 없다. 공자는 동양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코드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술한 책은 전혀 없다. 공자의 저서로 알려진 ‘논어’조차도 공자가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대신 공자는 당시까지 내려오던 방대한 양의 고전을 읽고 선택하고 정리했다. 공자는 자신의 역할을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하되 짓지는 않는다)’으로 규정했다. 기존의 학문을 전하되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1년 동안 그림이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공자의 생애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긴 여정의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재한 글을 점검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자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스쳐가는 문장이 있었다. ‘행복은 짧고 고난은 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후자가 예술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데 반해 전자는 시난고난한 사람의 인생을 대변한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동양을 대표하는 공자라는 성인(聖人)의 인생
공자가 노(魯)나라에 귀국한 기원전 484년의 일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향해 격앙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무리(제자)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를 성토해도 좋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공자가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한 사람은 누구일까. 공자가 귀국하는 데는 제자들의 힘이 컸다. 그중에서 염유(冉有)는 노나라의 실력자 계손씨(季孫氏)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공자의 귀국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염유가 공자를 찾아왔다. 계손씨가 토지세를 거둬들이는 문제로 공자의 의견을 듣고자 보냈다고 했다. 공자는 계손씨를 대
드디어 귀국했다. 68세의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다. 그가 노나라 땅을 다시 밟게 된 데는 제자들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 공자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노나라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염구(冉求), 자로(子路), 자공(子貢)은 노나라에서 핵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공서화(公西華)는 외교사절로 외교적인 일을 맡았고, 자유(子游)는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었다. 자하(子夏)는 거부(莒父)의 읍재가 되었고, 유약(有若)은 노나라가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공을 세워 애공(哀公)과 국정을
공자의 유랑생활도 어언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를 등용하겠다는 왕은 없었다. 14년 동안이나 유랑했다. 혼자 몸도 아니었다. 여러 명의 제자가 공자를 따랐다. 그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재워 줄 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유랑은 가능하지 못했다. 공자가 다닌 곳은 위(衛), 진(陳), 조(曹), 송(宋), 정(鄭), 채(蔡) 6개국이었다. 공자는 산동성에 있는 노나라에서 출발해 서쪽과 북쪽으로는 황하를 건너지 못했고 남쪽으로는 장강에 이르지 못했다. 그다지 넓은 지역은 아니었으니 한 번 갔던 곳을 또 방문할 때도 많았다.일정하게 하는 일도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국의 도교문화-행복으로 가는 길’이 전시 중이다. 오랜만에 만난 내실 있는 기획전이라 한걸음에 달려갔다. 전시 작품은 도교와 관련된 그림과 도자기, 공예품 등 다양했는데 유교를 상징하는 ‘공자성적도’가 전시된 것이 눈에 띄었다. 도교와 유교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지향점이 다르다. 그렇게 색깔이 다른 철학(혹은 종교)이 허심탄회하게 딱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었을 때다. 두 거인의 만남은 ‘문례노담(問禮老聃)’이라는 제목으로 그
공자의 유랑길은 숱한 위험과 허다한 비난으로 점철됐다. 공자가 자신을 알아 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의 궁궐 문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공자 일행이 엽(葉) 땅을 떠나 채(蔡)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하를 건널 수 있는 나루터가 어디인지를 몰라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쟁기질하며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만났다. 공자는 제자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했다.“저기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신가?”(장저)“공구(孔丘·孔子)입니다.”(자로)“노나
이상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사람. 누군가는 그를 낭만주의자라 부른다. 그러나 눈보라 치는 날 양식은 떨어져 가는데 수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직장을 찾아다니는 사람에게 유랑은 결코 낭만도 멋도 아니다. 그저 가야만 하니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가는 길이 고달파도 중도에 그만둘 수도 없다. 어떤 난관이 가로막더라도 무조건 돌파해야 한다. 명분 때문에 떠나온 만큼 명분이 생겨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유랑생활은 낭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은 성인이라
남자친구 집에 인사하러 갔다. 오랫동안 사귀었으니 양가 부모만 허락한다면 결혼할 생각이었다.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어떤 선물을 사가지고 갈까. 시부모 될 분들을 처음 상견례하는 자리인 만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드디어 남자친구 집에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에 들어서니 내부가 잘 꾸며진 5성급 호텔 같았다. 화사하게 장식된 집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집안 분위기가 거북했다. 그 넓은 집 어디에도 내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지만 낡고 편안한
정부가 출범하면 새 내각이 구성된다. 대통령은 각료를 구성할 때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 생사를 함께하리라 굳게 믿는다. 임명된 사람도 그렇게 믿는다. 같은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까지 같은 자리를 지킨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이 떠난다.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떠나느냐다. 자신의 잘못으로 떠난 것이 분명해도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사람이 있다. 뒷모습이 추레하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떠난 것이 분명해도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이 있다. 뒷모습이 당당하다. 공자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대사구 자
우리가 대통령을 뽑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바람에서다. 부자와 권력자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의 뜻을 배려해 달라는 소망에서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이념도 다르고 세대도 다른 수많은 사람의 요구를 전부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여러 계층의 사람을 고루 만족시키려면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일정 부분 자신들의 손 안에 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쉽지 않은 얘기다. 새로 뽑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을 수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자식은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 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옷 매무새는 단정한지, 얼굴 표정은 온화한지, 말투는 공손한지 거울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자식이 비뚤어지고 엇나갈 때 그 원인은 십중팔구 부모에게 있다. 자식이 들여다보는 거울이 흐리기 때문이다. 자식이 몹쓸 짓을 할 때 부모 된 이의 덕을 탓하는 것도 자식의 뿌리가 부모이기 때문이다.공자가 대사구(大司寇) 벼슬에 있을 때 부자(父子)간 소송건이 있었다. 공자는 법 집행에 앞서 그 아버지와 아들을 옥에 가두고 3개월이 지나도록 거들떠보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 도중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나라 밖에까지 가서 추태를 벌였으니 망신살이 단단히 뻗쳤다. ‘국격(國格)’은 지도자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협력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그림자처럼 보필하고 이끌어주고 때론 단호한 목소리로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책사(策士)가 옆에 있어야 지도자가 길을 잃지 않고 국정을 잘 이끌어갈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왕과 제후들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부국강병의 기본이 사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주살(誅殺)했다. 조정에 나가 재상의 임무를 수행한 지 7일 만에 행해진 조치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예를 실천한다는 사람이 공직에 나가자마자 행한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제자 자공(子貢)은 그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스승께 여쭈었다.“무릇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지금 선생님께서 정사에 나오셔서 그를 처음 표적으로 삼아 죽이셨으니, 혹 선생님께서 실수하신 것인지요?”의구심과 걱정이 뒤섞인 질문이었다. ‘소정묘는 나라에서 알아주는 귀족입니다. 비록 스승님이 지금 대사구(大
비가 쏟아진다. 쉴 새 없이 온다. 피해가 심각하다. 우리뿐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다. 쓰촨성에서는 폭우로 수백 명이 사망했고 이재민 200만명이 생겼다고 한다. 필자는 7월 초에 동(東)티베트를 다녀왔다. 쓰촨성 청두(成都)공항을 출발해 루얼까이 대초원을 본 후 마지막에 지우자이거우(九寨溝)에 있는 지우황공항에서 청두공항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지우황공항을 떠나 청두공항으로 향한 직후부터 폭우가 시작됐다. 버스로 이동했던 도로는 물에 잠겨 끊어지고 건물은 물속에 둥둥 떠 있는 지경이 됐다. 하루만 일정이 늦
40대의 공자는 어떻게 살았을까. 본인 스스로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후부터 ‘불혹(不惑)’은 사십의 대명사가 됐다. 불혹의 주인공이 공자다. 공자는 안영(晏嬰)의 반대로 제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하고 노나라로 귀국했다. 37세 때였다. 귀국한 뒤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스승으로 모시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치인이 돼 자신의 포부를 펼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공자는 귀족 가문인 삼환(三桓)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자 관직에 나아갈 마음을 접었다. 그는 황금 같은 40대를 제자 양성과 공부하는 것
공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73세에 세상을 떠난 공자가 70세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열다섯에 배움(學)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서는 자립(而立)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고(不惑), 쉰이 되어서는 천명(天命)을 알았으며,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고(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不踰矩).”열다섯에는 철이 없어 몰랐다 해도 서른부터는 어쩐지 공자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을 주는 문장이다. 마흔은 어떠한가. 불혹
공자를 공부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그가 음악을 사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고지식한 남자가 음악을? 점잖게 무게만 잡고 앉아 감정 표현은 전혀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공자가 음악을 사랑했다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사랑도 적당히 취미로 집적거리는 사랑이 아니었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는 자주 노래를 불렀다. 틈만 나면 악기를 연주했다. 다른 음악가의 연주를 듣고 나면 적절한 의견을 실어 음악을 평가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논어’에는 공자가 음악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가 열아홉 차례 나온다. ‘공부자성적도’에도 공
공자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노자(老子)를 찾아간 것도 그런 자세 때문이었다. 공자는 34세 때 노자를 찾아가서 예(禮)에 대해 물었다. 제자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함께였다. 남궁경숙은 대부 맹희자(孟僖子)의 유언을 받든 맹의자(孟懿子)와 더불어 공자에게 가서 예를 배운 제자다. 남궁경숙은 노나라 군주를 찾아가 “공자와 함께 주(周)나라에 가겠다”고 청했다.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