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부대전부’ ‘공자성적도보’, 중국 곡부문물출판사
작자미상, ‘부대전부’ ‘공자성적도보’, 중국 곡부문물출판사

공자가 노(魯)나라에 귀국한 기원전 484년의 일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향해 격앙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무리(제자)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를 성토해도 좋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공자가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한 사람은 누구일까. 공자가 귀국하는 데는 제자들의 힘이 컸다. 그중에서 염유(冉有)는 노나라의 실력자 계손씨(季孫氏)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공자의 귀국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염유가 공자를 찾아왔다. 계손씨가 토지세를 거둬들이는 문제로 공자의 의견을 듣고자 보냈다고 했다. 공자는 계손씨를 대신해 의견을 묻는 염유에게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 대답을 했다.

계씨가 염유를 세 번째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선생은 국가의 원로로서 나라의 대사를 선생의 의견에 따라 행하고자 하거늘 어째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래도 공자는 여전히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후 사적인 자리에서 염유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마땅히 예에 따라 많이 주고 적게 거둬들여야 한다. 만약 끝이 없는 탐욕을 좇는다면, 토지세를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로 나를 찾아와 물어볼 것이 무엇이냐?”

이때만 해도 공자는 염유가 마지못해 계손씨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계손씨의 정책이 시행됐다. 공자는 염유가 자신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염유는 계손씨가 주공보다 부유한데도 그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그의 부를 더욱 늘려 주고자 했다. 공자가 분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북을 울려 염유를 성토하라고 한 데는 이와 같은 실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부대전부(不對田賦·토지세에 대한 자문에 답변하지 않다)’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른쪽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계손씨일 것이다. 그의 앞에서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은 염유다. 왼쪽에 서 있는 세 사람은 공자 일행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염유의 행동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서로 관련 없는 사람들처럼 서 있는 두 무리의 인물들을 보면, 지향점이 전혀 다르다. 맨 뒤에 서 있는 소나무가 같은 공간에 있으나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비록 자신의 귀국을 위해 힘쓴 제자였지만 공자는 잘못된 행동을 보고 묵과할 수는 없었다. 염유는 염유대로 스승의 반응이 서운했을 것이다. 자연히 스승과 제자 사이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염유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럴수록 공자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어느날 염유가 조정에서 나와 늦게서야 공자에게 문안을 드렸다. 공자가 염유에게 무슨 일로 늦었느냐고 물었다. 염유가 조정에 일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씨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조정에 일이 있었다면 비록 내가 등용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도 그것을 들었을 것이다.”

한때는 스승의 수레를 끌며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묻던 제자였다. 그런 제자가 더 이상 스승의 가르침대로 따르지 않았다. 공자의 서운함을 모를 리 없는 염유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스승을 비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느날 그가 공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스승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중도에 그만둔다. 지금 너는 안 된다고 스스로 선을 긋고 있다.”

공자의 뜻을 거스르는 제자는 염유뿐만이 아니었다. 자공은 제사에서 양(羊)을 쓰는 제도를 폐지하려다가 공자와 부딪혔고 재아는 삼년상을 일년상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가 어질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았다. 귀국 후 공자가 힘든 이유는 제자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이 들면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이 더 많다. 오래 살면 즐거운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 공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후 몇 년 되지 않아 아끼던 제자 안회가 사망했다. 공자가 71세 때였다.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는 말을 하며 안회의 죽음을 슬퍼했다. 제자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애통해하는 스승을 보고 걱정했다. 공자는 제자들을 향해 “내가 안회를 위해 상심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겠느냐”라고 되물었다. 안회를 향한 그리움이 그와 같았다.

중요한 것은 안회가 죽은 이후 제자들의 반응이다. 안회가 죽자 안로(顔路·안회의 아버지로 공자의 제자)는 공자의 수레를 팔아 곽(槨·덧관)을 마련하자고 했다. 고대의 대관들은 시신을 안치할 때 안쪽의 관(棺)과 바깥쪽 관(槨), 두 가지를 만들어 썼다. 안로는 스승이 자신의 아들 안회를 지극히 아끼는 것을 알고 화려하게 장례를 치를 속셈이었다. 공자는 안회를 몹시 아꼈지만 결코 예를 벗어나는 장례를 허락할 수 없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재주가 있든 없든 저마다 자기 자식은 귀하게 마련이다. 리(鯉·공자의 아들로 공자 나이 49세에 죽음. 일설에는 공자가 70세에 죽었다고도 함)가 죽었을 때 관만 있었고 곽은 없었다. 내가 걸어다니고 그를 위해 곽을 만들어주면 될 터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나도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어서 걸어서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승의 아들도 장사 지낼 때 곽을 쓰지 않았는데 제자도 스승의 예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무람이었다. 더구나 안회의 집은 허례허식을 치를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안회는 거의 도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통이 비었다’는 공자의 얘기에서 알 수 있듯 매우 가난했다. 가난한 사람이 집안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성대하게 장사 지내는 것을 공자는 반대했다. 제자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가 탄식했다. “안회는 나를 아버지처럼 대했지만, 나는 아들처럼 대하지 못했다.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저 몇몇 제자 탓이다.”

공자는 안회를 아들 리처럼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었는데 몇몇 제자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제자들은 늙은 스승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세태가 많이 변했다.

안회에 죽음에 이어 두 번째 불행이 들이닥쳤다. 공자 나이 72세 때 자로가 사망했다. 자로가 위(衛)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대부 괴외(蒯聵)의 난이 일어났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자로는 죽을 것이다.” 용감하지만 급하고 우직하지만 타협할 줄 모르는 자로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한 소리였다. 우려했던 대로 공자의 예측은 정확했다. 위나라 사신이 와서 자로가 죽었음을 알렸다. 이어지는 말이 기가 막혔다. “자로를 죽여 젓갈을 담갔습니다.” 공자는 처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 제자들에게 “젓갈을 모두 엎어버려라”고 명했다. 젓갈만 봐도 자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홉 살 어린 동생 같은 제자를 잃은 늙은 스승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차마 어찌 이런 것을 먹을 수 있겠느냐?”

아끼는 제자들은 하나둘 곁을 떠나고, 남겨진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거스르는데 노나라 조정에서는 여전히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공자도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가 생애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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