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엄비의 회중시계로 추정된다”는 금제 회중시계 한 쌍. 케이스에 대한제국 이화문양이 찍혀 있고 화려한 문양의 여성용 케이스 안쪽에는‘內藏院’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photo 유창우 영상미디어 부장
“고종과 엄비의 회중시계로 추정된다”는 금제 회중시계 한 쌍. 케이스에 대한제국 이화문양이 찍혀 있고 화려한 문양의 여성용 케이스 안쪽에는‘內藏院’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photo 유창우 영상미디어 부장

지난 2월 10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한 음식점. 점심시간이 지나 조용한 가운데 한쪽 방에선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분홍색 보자기가 펼쳐지자 15×10㎝ 크기의 빨간색 상자가 나왔다.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은 한 쌍의 금시계였다. 크기와 문양이 각각 다른 두 개의 회중시계는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보였다. 여성용은 케이스 겉면에 왕관으로 보이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한눈에도 귀중한 물건으로 보였다. 개화기 유물 수집가인 황필홍(60·단국대 철학과 교수)씨가 “고종황제와 고종의 후궁인 엄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제국 황실 이화문양 금제 회중시계”라면서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주간조선은 회중시계 정보를 입수하고 “취재하고 싶다”고 몇 차례 설득한 끝에 이날 황 교수를 만났다.

회중시계는 두 개 모두 미국 시계회사인 월섬(Waltham Watch· 1852~1957)이 제작한 것으로 14K 제품이고, 시계 케이스에는 ‘大韓帝國(대한제국)’이라는 한자와 황실의 상징으로 사용된 이화문양이 압인(금속에 글씨나 무늬를 튀어나오게 만든 가공법)돼 있었다. 또 여성용으로 보이는 작은 회중시계의 케이스 뚜껑 안쪽에 케이스 보증서가 끼워져 있고 보증서를 들춰 내면 안쪽 면에 ‘內藏院(내장원)’이라는 글씨가 압인돼 있었다. 내장원은 대한제국 시절 황실의 재정과 살림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보증서에는 케이스 제작회사를 나타내는 ‘COURVOISIER, WILCOX MFG.CO(쿠브와지에 윌콕)’이 쓰여 있고 상단에 최고 품질을 표시하는 ‘ESSEX SUPERIOR’라는 영문과 함께 ‘25년 보증’을 뜻하는 ‘25’라는 숫자도 적혀 있었다. 무브먼트는 월섬의 것이지만 케이스는 윌콕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남성용에는 ‘내장원’이라는 글자는 찍혀 있지 않고 ‘대한제국’과 이화문양만 새겨져 있다. 남성용은 무브먼트는 월섬, 케이스는 키스톤 워치(The Keystone Watch Case Company) 제품이었다. 보관상태도 좋아 남성용 시계 뒷면이 변성을 일으킨 걸 제외하고는 깨끗했다. 황 교수가 태엽을 감자 멈춰 있던 시계가 ‘재깍재깍’ 초침 소리를 내면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의 비밀’을 간직한 채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황 교수가 “고종황제 부부의 회중시계”라고 판단하는 단서는 두 개의 회중시계에 찍힌 ‘대한제국’ ‘내장원’이라는 글씨와 이화문양, 케이스 회사 윌콕의 보증서이다. 황 교수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내장원이 개편을 거쳐 존재한 시기가 1899년부터이고, 윌콕이 1905년 이후 다른 회사에 매각됐기 때문에 제작 시기는 1899~1905년 사이다. 황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장원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는 것으로 봐서 내장원에서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화문양이 있는 물건은 많이 봤지만 ‘대한제국’이라는 글자와 이화문양이 함께 찍혀 있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내장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물건은 17년여 이 바닥을 기웃거렸지만 처음 본다. 정황상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내장원이 황제 부부용으로 미국에 특별주문한 시계로 추정할 수 있다.”

황 교수는 개화기 글씨와 서화를 주로 수집하는 컬렉터로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의 ‘총란도’(1870년대)를 비롯해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홍영식의 글씨 등 20년 가까이 수집한 개화기 물건이 1000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황 교수는 “개화기 물건에 미쳐 아파트를 팔아서 산 물건도 있다”면서 “그중 30여점은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귀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고미술품 시장에서 ‘개화기 컬렉터’로 알려진 덕분에 물건이 나오면 연락을 해오는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이번에 공개한 한 쌍의 금제 회중시계도 고미술품 전문 경매회사에서 연락이 와 인연이 닿았다고 한다.

황 교수는 “평소 고미술품 수집을 도와준 옥션 대표가 ‘도쿄, 타이베이, 베이징 등을 돌아다니는 골동품상이 도쿄의 작은 경매회사에서 낙찰받은 것을 가져온 것인데 대단한 물건인 것 같다’고 연락해 와서 달려갔다”며 “기대 이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구입했다”고 말했다.

‘황실 시계’는 2010년에도 고미술 시장에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미술품 경매회사인 K옥션 경매에 ‘순종의 회중시계’가 나온 것.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스위스의 명품 시계 브랜드인 바쉐론 콘스탄틴(1755년~)의 회중시계로 케이스 뒷면에 이화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K옥션은 “1926년 6월 10일 열린 순종의 장례식 사진 100여장을 담은 ‘어장의사진첩(御葬儀寫眞帖)’에 실린 부장품과 동일한 시계”라며 “대한제국 황실과 직접 관련된 인물이 경매에 내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 시계는 진위 논란에 휩싸였는데 ‘순종이 쓰던 물건은 부장품으로 모두 왕릉에 묻혔는데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도굴품이 아니면 가짜라는 이야기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논란은 바쉐론 콘스탄틴 측이 “시계에 적혀 있는 고유번호가 1910년에 제작한 것이 맞다”며 순종 소유 시계였다는 것을 확인해 주면서 일단락이 됐다. 순종의 사진 속 시계는 아니지만 부장품과 비슷한 모델로 확인된 ‘순종의 회중시계’는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경매가 시작돼 시작가 5000만원에서 출발, 1억2500만원에 낙찰돼 개인 소장가의 손에 넘겨졌다.

01, 03   여성용으로 보이는 작은 회중시계 케이스 안쪽에 보증서가 있고 종이를 들추면 안쪽에 ‘內藏院’이라는 글씨가 압인돼 있다. 02   케이스 바깥쪽에 예서체로 ‘大韓帝國’이 새겨져 있다. ⓒphoto 유창우 영상미디어 부장
01, 03 여성용으로 보이는 작은 회중시계 케이스 안쪽에 보증서가 있고 종이를 들추면 안쪽에 ‘內藏院’이라는 글씨가 압인돼 있다. 02 케이스 바깥쪽에 예서체로 ‘大韓帝國’이 새겨져 있다. ⓒphoto 유창우 영상미디어 부장

바쉐론 콘스탄틴은 19세기 초 청나라에서도 ‘황제의 시계’로 최고 인기였다. 청나라는 당시 유럽 시계 브랜드들의 각축장이 될 만큼 회중시계가 대유행이었고, 그 바람은 사신이나 상인들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불어닥쳤다. 특히 순종은 시계 매니아였다. 창덕궁에 거처하던 순종이 매일 아침 덕수궁에 있는 고종에게 문안 전화를 하면서 “그곳의 시각은 어떠하냐”고 묻고 시계를 맞추는 것이 일과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은경 시계칼럼니스트는 “창덕궁에 순종의 시계방이 따로 있을 정도로 수집한 시계가 많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하게 해 상품으로 시계를 줄 만큼 순종의 시계 사랑은 유별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황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한 쌍의 회중시계 정체는 뭘까. 황 교수의 추정대로 고종과 엄비의 것이 맞다면 그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황 교수는 “한 쌍인 데다 드물게 내장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고 동서문물의 교류를 보여주는 등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경매에 나왔던 순종 회중시계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만일 내장원에서 고종의 물건으로 구입한 것이라면 내장원의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또 월섬사의 아카이브가 있다면 일국의 왕실에서 특별주문을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틀림없이 기록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주간조선은 황 교수의 주장에 근거해서 ‘회중시계의 진실’ 추적에 나섰다.

먼저 내장원 관련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장원은 궁중의 쌀·잡물·노비 등을 관리하던 내수사가 1895년 을미개혁 때 개편 설치된 이후 1899년 ‘내장원’으로 승격됐다가 다시 1905년 경리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내장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 시기는 1895~1905년이니 회중시계의 제작연도도 이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내장원 기록이 남아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을 찾았다. 일반인이 규장각 자료를 열람하려면 간단한 신청서만 작성하면 된다. 왕실경비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내장원 회계책’을 신청했더니 마이크로 필름으로 된 자료를 찾아주었다. ‘내장원 회계책’이란 제목으로 규장각에 남아있는 것은 모두 3책으로 고종 32년인 1895년 9월부터 1907년 7월까지 수입(捧上)과 지출(用下) 내역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1899년(光武 3년)까지는 날짜별로, 이후에는 월별로 기록된 3권의 회계책에는 ‘紙價(종이값)’, ‘柴油價(연료비)’ 등 경비와 가격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문제는 모든 기록이 한자로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金庫鎭子一部價 金五兩(금고진자일부가 금오량), 印朱一當價 金五十兩(인주일당가 금오십량), 朱墨一丁價 金一兩(주묵일정가 금일량) 등 한자를 읽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 용어 자체가 낯설다 보니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규장각 직원이 찾아준 마이크로 필름 자료를 전부 복사해 가져왔다. 전부 273쪽 분량이었다. 주간조선 인턴기자들을 동원해서 지출(用下) 내역 중 ‘懷中時計(회중시계)’ 또는 ‘鐘表(종표·시계의 옛말)’라는 단어를 찾았다. 인턴기자 2명이 ‘숨은그림 찾기’ 하듯 2~3일간 회계책을 뒤적이고 내놓은 말은 “기록을 못 찾았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한자에 능통한 사람이 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규장각을 다시 찾아가 이상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 교수는 “내장원에서 구입한 물건이라고 반드시 내장원 회계책에 기록이 남아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른 곳에 기록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금방 찾을 수도 있지만 한 달 또는 일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자료를 찾고 발굴을 해야 하는 만큼 취재해서 될 일이 아니고 연구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회중시계에 찍힌 ‘내장원’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묻자 이 교수는 “내장원 기록에 시계를 구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해도 반드시 황제의 물건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고종이 선물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장원을 통해 구입했을 수도 있고, 선물로 들어온 것을 내장원에서 보관하면서 새겼을 수도 있다. 고종의 시계라고 해도 고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시계의 가치에 대한 생각은) 개인의 독특한 견해일 뿐이다. 해석의 여부는 각각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학계에서 내장원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이윤상 창원대 교수도 이 교수와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교수는 전화통화에서 “왕의 물건을 구입한 기록이 반드시 남아있다고는 볼 수 없다.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없어진 기록도 많다. 내장원 기록은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왕의 개인적인 물품에 대한 기록보다는 왕실 살림과 관련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면서 “왕이 사용할 물건에 왕실 살림을 담당한 관청 마크를 새겼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화문양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내세워 황실의 상징으로 사용했던 문장이다. 일제강점기에 황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가 ‘이왕직’이라는 기구로 바뀐 이후에도 왕실의 물건에 이화문양을 많이 사용했다. 왕실에 공작제작소까지 차려놓고 이화문양이 찍힌 주석잔, 병, 주전자, 담배케이스 등을 만들어 왕실에서 사용했고 판매하거나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골동품감정가 조인성씨는 “이화문양 골동품은 많다. 내가 본 이화문양 은주전자만 해도 20개가 넘는다. 요즘 골동품 시장에 개화기 물건이 뜨면서 부쩍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내장원 회계책의 기록은 숙제로 남겨둔 채 시계 제작회사인 월섬(Waltham)을 추적했다. 월섬은 1850년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동부 도시 월섬에서 시작해 회중시계의 대량생산에 성공했으나 1957년 다른 회사에 넘어간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현존하는 회사가 아니다 보니 아카이브를 찾는 것도, 고유번호로 추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량으로 시계를 생산했기 때문에 고유번호가 있다고 해도 기록이 남아있을지 의문이었다.

회사 설립 때부터 여러 번 이름이 바뀐 월섬은 1885년 미국월섬시계회사(AWWCo)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가, 1907년에는 미국을 떼고 월섬시계회사(WWCo)가 됐다. 황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회중시계에 ‘AWWCo’가 적혀진 것을 보면 1885~1907년 제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월섬시계는 링컨의 시계로도 유명하다. 링컨이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월섬의 1857년 모델 회중시계는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내서도 구한말 이후 월섬에 대한 기록은 심심찮게 나온다. 1921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월섬시계 광고가 실려 있다. ‘타임을 尙하는 활동가는 월삼시계를 애용함’ ‘하인이든지 만족케 하는 월삼’ 등 광고 문구도 재미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지기 직전 김구 선생에게 “저는 이제 좋은 시계가 필요 없으니 선생님의 낡은 시계와 바꾸자”면서 건네준 시계가 바로 월섬의 회중시계였다.

대량생산된 만큼 실제 월섬 회중시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야후 재팬 옥션’에 들어가 ‘waltham’을 검색어로 입력했더니 경매에 나온 중고 월섬 회중시계 수십 개가 주르륵 떴다. 그중에는 1895년, 1902년 등 100년이 넘은 것도 제법 눈에 띄었다. 케이스는 은제품부터 14K, 18K 금제품 등 다양했고 가격대도 만원대부터 수백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1902년, 1903년 금제 시계의 경우 300만원에서 400만원대도 있었다. 25년 보증의 최고 품질 금제 케이스로 된 1895년 월섬 회중시계는 시작가 1000원에서 출발해 경매 종료일을 5일 앞둔 2월 25일 14만원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날 550만원에 낙찰된 시계가 최고가를 기록했는데 일본의 대표 문예지인 ‘문예시대’의 창립자이자 신감각파 대표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가 소유했던 1914년 모델과 같은 제품이었다.

미국 시계 전문 박물관 사이트인 NWC(National Watch&clock Museum) 사이트에서도 ‘waltham’이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수백 개의 제품이 나온다. 각각의 시계들은 모두 고유번호가 적혀 있다. 고유번호로 검색하면 모델 연도 등 시계 정보가 뜨지만 주문자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황 교수는 “뉴욕에 월섬 아카이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온라인에서 찾기는 쉽지 않았다.

2010년 경매에 나와 1억2500만원에 낙찰된 순종의 바쉐론 콘스탄틴 회중시계.
2010년 경매에 나와 1억2500만원에 낙찰된 순종의 바쉐론 콘스탄틴 회중시계.

이은경 시계칼럼니스트는 “K옥션에서 1억2500만원에 낙찰된 순종의 바쉐론 콘스탄틴과 비교했을 때 월섬은 일단 대량생산된 제품이기 때문에 시계 가치만 따지자면 비교하기가 어렵다. 수공예품과 공장에서 만든 작품을 어떻게 비교하겠나. 바쉐론은 소장자를 떠나 시계 자체만으로도 수천만원에서 억대를 호가한다. 얼마 전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가 감정가 1억1000만원에 나와 5500만원에 낙찰됐다”며 “19세기 중국은 유럽 시계회사들의 주요 시장일 만큼 회중시계가 유행이었다. 구한말 회중시계가 귀한 물건이긴 했지만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의 선물 품목에 많이 들어 있었다고 들었다. 흥선대원군도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K옥션에 나왔던 ‘순종의 회중시계’를 감정한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명품 앤티크시계점 ‘용정’의 김문정 대표는 “순종의 것이든 고종의 것이든 일단 시계 자체의 가치를 따져봐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차원에서 바쉐론과 월섬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이에 대해 “제조회사가 바쉐론이냐 롤렉스냐 월섬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시계의 가치에 10%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무슨 시계면 어떤가. 대한제국의 황실시계냐, 고종황제 부부가 사용한 것이냐가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이화문양에다가 대한제국과 내장원이라는 글자가 함께 찍혀 있고 제작 시기 등을 봤을 때 고종황제와 엄비의 시계라고 추정할 정황이 충분하다. 태평양을 건너 동서문물의 교류를 보여주고 대한제국 황실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가치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다. 중국은 청나라시대 도자기 하나만 나와도 경매에서 수백억원에 낙찰되는 등 자신들의 가치를 올리는데 우리는 너무 소홀한 것 같다. 고미술품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역사적 배경을 먼저 생각해야지 시계값을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황 교수는 “개화기의 역사가 너무 묻혀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역사도 많다. 누군가는 그것을 발굴해내고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화기 물건을 수집하게 됐다”고도 했다.

“두 개의 시계 중 여성용으로 보이는 것에만 내장원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는데 한 쌍으로 제작된 근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황 교수는 “한 쌍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두 개가 함께 100년이 넘는 동안 같이 붙어다닐 수 있겠느냐. 한 쌍이 아닌데도 함께 경매에 나오는 것이 더 어려운 일로 보인다. 한 쌍이기 때문에 한 개에만 내장원을 찍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황 교수에게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시계를 얼마에 구입했느냐고 질문했더니 “기자들은 보도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한 마디도 안 빼놓고 다 보도하더라. 얼마인지 밝힐 수 없지만 상당한 액수였다”며 “좋은 물건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진짜는 진위 여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고미술품이든 그림이든 진짜냐 가짜냐 머리 맞대고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작품의 질이 의심스럽다는 이야기 아니냐. 나도 처음에는 가짜에 속기도 했지만 수업료를 많이 지불하고 안목을 키웠다”고 덧붙였다.

현재 고종의 유물을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는 곳은 국립고궁박물관이다. 이곳 유물과학과 서준 학예연구사는 “덕수궁에 있던 고종 유물까지 합쳐져 이곳 수장고에 있는 고종 유물은 수천 점에 이른다. 아직 다 파악이 안 된 것도 있다. 계속 조사하고 리스트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옷, 식기 등 생활 유물도 수없이 많다. 계급장, 훈장부터 카스테라를 만드는 빵틀, 빵칼까지 있다. 이화문양이 찍힌 접시·사발도 수없이 많이 있는데 대한제국이나 내장원 글씨가 새겨진 것은 내 기억으로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계 등 귀중품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들이 남아 있겠느냐. 관리하던 사람들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귀중품들은 대부분 분실됐다고 보면 된다. 고종의 사진에서 회중시계를 본 기억은 난다”고 답했다.

과연 ‘고종황제와 엄비의 시계’가 맞는지, 내장원이라는 글씨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한국도 아닌 일본의 작은 경매시장에 이 시계가 나온 건지, 그 진실을 밝히진 못했지만 110여년이란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금제 회중시계’는 ‘잃어버린 역사’와 함께 풀리지 않은 숙제를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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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 홍근혜 인턴기자·연세대 국문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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