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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수의 보이차 이야기]  보이차왕 왕만위안과 철관음왕 왕만롱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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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306호] 201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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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보이차 이야기]보이차왕 왕만위안과 철관음왕 왕만롱 형제

서영수  영화감독 

보이차 상식

건강을 위해 보이차를 마시면 안 되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임신한 여성과 수유기(授乳期)의 여성은 보이차를 마시면 안 된다. 보이차의 폴리페놀이 태아의 두뇌발달을 저해하고 모유를 통한 카페인 섭취가 유아의 불면증을 유발할 수 있어서다. 위궤양 환자의 경우 공복을 피해 연하게 보이차를 마시면 암으로의 전이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다만 약과 함께 보이차를 마시거나 공복에 진하게 마시는 것은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
▲ 왕만위안
지난 3월 21일부터 23일까지 중국 윈난성(雲南省) 징홍시(景洪市)에서는 세계차문화교류협회(世界茶文化交流協會) 신임 회장단이 선출됐다. 제6기 회장단을 선출하는 행사장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차문화 전문가와 각계 인사가 모였다. 1500여명이 들어간다는 행사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린슈위안(林修源) 현 회장이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세계차문화교류협회 창립 회장인 왕만위안(王曼源)의 지지를 받고 있다. 세계차문화교류협회는 제다(製茶) 기술의 상호교류와 합작을 통한 협업, 인적교류 활성화를 통해 차문화의 학술 교류 발전을 촉진하는 국제 단체다. 2002년 2월 왕만위안, 린슈위안, 리스핑(李世平) 등 3인이 공동 발기해 홍콩에서 출범했다.
   
   왕만위안 회장은 ‘세계차왕(世界茶王)’이라고 불린다. ‘중국보이차왕(中普茶王)’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이상을 갖고 차문화의 보급과 발전에 헌신해 왔다. 중국의 차업(茶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왕만위안은 1957년 가을, 중국 푸젠성(福建省) 안시현(安溪縣)의 시핑진(西坪鎭) 난옌촌(南岩村) 출신이다. 왕스랑(王士讓)의 12대 손인 왕롄단(王聯丹)의 셋째 아들이다. 왕씨 집안의 시조인 왕스랑은 ‘철관음(鐵觀音)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 왕만위안이 태어난 곳은 반발효차(半醱酵茶)인 오룡차(烏龍茶)의 최고급 품종인 철관음의 발원지로 유명하다.
   
   왕스랑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시골 선비였다. 청(淸)나라 때인 1736년 남산 관음암 아래에서 특이한 차나무를 발견해 자신의 정원에 옮겨 심었다. 이를 정성스레 키워 오룡차를 완성했다. 1741년에는 궁정으로 가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를 알현하고 차를 바쳤다. 이 자리에서 건륭제는 이 차에 ‘철관음’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또 청 황실에 공차(貢茶)로 바치도록 명했다.
   
   이후 300년의 역사를 거듭하는 동안 왕스랑의 집안은 차업을 가업으로 삼았다. 1945년 싱가포르 국제차박람회에서는 왕만위안의 부친인 왕롄단이 연구해 출품한 ‘철관음’이 금상을 수상했다. 개혁개방 이전 왕만위안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 왕만위안도 면학(勉學)의 기회를 놓쳤다. 24세의 왕만위안은 아버지가 만들어 둔 5㎏의 철관음을 어깨에 둘러메고 1981년 고향을 떠났다.
   
   왕만위안은 혈혈단신으로 홍콩으로 나왔다. 배움이 짧은 왕만위안에게 홍콩은 신세계였다. 일용직으로 홍콩을 떠돌았지만 ‘쟁취하려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민남인(南人·푸젠성 남부 사람)’의 악착 같은 근성이 있었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성공하지 못하면 살아서 고향에 안 돌아간다”는 각오로 버텼다. 왕만위안은 “삶의 밝은 희망과 장밋빛 꿈보다 이유 있는 분노가 앞섰던 시기”라고 그때를 회고한다.
   
   마침 홍콩에서는 고향 특산인 철관음 400g이 280위안가량에 거래됐다. 고향인 안시에서 단돈 5위안에 거래되던 것이었다. 수십 배나 가격이 비쌌다. 왕만위안은 “기쁨에 앞서 슬펐다”고 말한다. 그는 “고향 사람들은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팔리는 가격이 점점 더 싸진다. 그런데 홍콩에서는 포장지 하나 바뀐 것밖에 없는 똑같은 차를 수십 배 비싼 값에 팔며 상인들이 폭리를 취한다”라는 의문을 가졌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차에 대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고향에서 가져온 조상의 귀한 차를 팔아 단순히 연명하는 데 쓰기는 싫었다. 왕만위안은 ‘어떻게 해야 고향의 차농(茶農)들도 고생한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당시 왕만위안의 수중에는 돈 한 푼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차업(茶業)에 뛰어들 밑천으로 애지중지 아끼던 차를 한꺼번에 모두 잃어버리는 사고도 당했다.
   
   왕만위안은 당시 일로 큰 교훈을 얻는다. “한몫에 빠른 성공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황소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전진해야 안정적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평생을 차와 함께 가기로 결심한 왕만위안은 여러 해에 걸쳐 거듭되는 시행착오와 실패에 굴하지 않았다. 객지에서의 어려움과 고통을 묵묵히 참아냈다. “산을 만나면 길을 뚫고, 강이 가로막으면 다리를 놓겠다”는 신념과 쉬지 않고 정진하겠다는 정신으로 자신의 차 가게인 ‘영원차행(榮源茶行)’을 창업했다.
   
▲ 왕만롱
좌판 규모에 불과한 영원차행에서 ‘나홀로 사장’ 왕만위안은 온갖 일을 도맡았다. 청소는 물론이고 물건을 고르는 일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성심을 다했다. 양질의 찻잎만을 취급해 신용을 쌓아갔다. 또 사람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마인드를 통해 영원차행의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국제적 차대회에 출품한 차로 ‘국제명차금장(國際名茶金奬)’을 연거푸 받으며 브랜드를 알렸다.
   
   하지만 영원차행의 늘어난 사업 규모에 비해 믿을 만한 일손이 부족했다. 마침 왕만위안은 법학을 전공한 동생 왕만롱(王曼龍)을 설득해 대학 졸업 후 홍콩으로 건너오게 했다. 동생인 왕만롱은 왕만위안이 1981년 고향을 떠나올 때 여덟 살에 불과했다. 왕만위안은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자 학업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었다.
   
   법률가의 길을 접고 홍콩의 형에게 건너온 왕만롱 역시 차에 대해 다시 눈을 떴다. 어릴 적 왕만롱에게 차는 지겹기만 한 것이었다. 이후 형제가 함께 차업을 하면서 1993년 무렵 ‘영원차행’의 사업은 최고조에 올랐다. 왕만위안은 철관음을 대중화한 공로로 ‘철관음왕(鐵觀音王)’이란 명성까지 얻는다.
   
   하지만 일찍 가출한 대가로 철관음의 제13대 적통 계승은 동생 왕만롱에게 전수됐다. 왕만위안은 철관음 대신 ‘보이차’ 사업에 치중하게 된다. 마침 보이차 열풍이 홍콩과 대만을 넘어 중국 본토에서도 불어닥쳤다. 왕만위안은 보이차로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철관음’의 적통 후계자인 왕만롱도 형과 일하며 수많은 ‘호급차(號級茶)’ ‘인급차(印級茶)’ 등 오래된 노차(老茶)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보이차를 다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형인 왕만위안으로부터 차업의 기본기를 익힌 왕만롱은 1997년 상하이에 ‘남향명차행(南香茗茶行)’을 설립해 독립했다. 윈난의 고차수다원(古茶樹茶園)을 일찌감치 확보해 안정적으로 양질의 원료도 공급받았다. 이후 고급 보이차 생산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상하이엑스포(2010년)에 공식 보이차 공급자로 선정됐다. 비록 형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사업의 번창 속도만큼 그의 행보 역시 무척 바쁘다. 형제지간이지만 좀처럼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힘들다.
   
   최근에 한국을 방문해 다회를 함께하기도 한 왕만롱은 세계차교류협회 행사장에서 형인 왕만위안과 만났다. 왕만위안은 오랜만에 마주한 동생 왕만롱에게 “부지런하되 욕심은 부리지 마라”는 자신의 생활철학을 말했다. 차 사업의 선배로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열여섯 살 터울의 형제는 이구동성으로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골동급(骨董級) 보이차와 철관음차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영수
   
   1956년 부산 태생. 유현목·이두용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뒤 1984년 영화감독으로 데뷔.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조예가 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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