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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호]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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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보이차 이야기]보이차와 결혼한 여교수의 실패와 성공

서영수  영화감독 

▲ 법원에서 판사들에게 특강하는 주즈리 교수.
차(茶)를 즐기는 사람은 나이가 많고 고루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중국 광저우성시직업전문대학(廣州城市職業學院)의 주즈리(朱自) 교수(다예과)는 꿈꾸는 10대가 아닌 세상물정을 아는 30대의 골드미스다. 광저우에서 차문화(茶文化)를 가르치는 주 교수의 생각과 표현은 독특하다. “한 남자의 아내로 살기보다, 차와 더불어 삶을 하나의 기나긴 수행으로 여기며 정진하겠다.” 그녀의 말에는 쾌락과 자유분방함과는 다른 삶의 결이 느껴진다. 진정성이 있다.
   
   주즈리 교수의 실력과 명성은 중국 차산업의 메카인 광저우 일대에서 유명하다. 2001년 처음 열린 광저우 국제차박람회에 학생들을 이끌고 차예 시범과 공연을 연출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2002년에는 중국 노동부(현 인력자원사회보장부)를 대신해 대만의 중화차문화협회와 공동으로 ‘해협양안차예사고증반(海峽兩岸茶藝師考證班)’을 개설했다. 차를 통한 양안(兩岸) 간 교류를 주도한 셈. ‘다어(茶語)’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20만자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고 각종 차 문화 기관의 요직도 맡고 있다. 중국 정부에서 인정하는 자격 제도인 ‘국가급고급차예사’를 가르치며, 자격시험을 출제하는 출제위원이기도 하다.
   
   주즈리 교수의 화려한 이력과 묵직한 직함은 30대에 이뤘다고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과거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개혁개방 전인 1976년 12월 광동(廣東)에서도 낙후한 화주(化州)의 시골학교 교사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고 했다. 지붕이 달린 화장실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때였다. 그는 “깡촌에서 벗어나려면 장학생으로 대학에 가는 길밖에 없어 죽기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렸다”고 했다.
   
   보이차와의 첫 만남은 10살 때. 첫 만남은 그다지 우아하지 않았다. 중국어 교사였던 아버지는 집에서 수업 준비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늘 차를 곁에 두고 마셨다. 어느 날 친척 아저씨가 “윈난(雲南)에서 사온 몸에 좋은 귀한 차”라며 보이차를 집에 가져왔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만 드리는 보이차의 맛이 정말 궁금했다. 몰래 보이차를 훔쳐 마시다가 어머니에게 치도곤(治盜棍)을 당한 것이 보이차와의 첫 만남이었다.
   
   1995년 화남사범대(華南師範大) 졸업과 동시에 대학어문(大學語文)을 가르치며 교육자의 길에 들어섰다. 1997년부터 광저우대학에 신설된 차문화예술학과에서 차 문화와 예술, 차예관(茶藝館) 경영과 관리, 차엽(茶葉) 품평을 가르치게 됐다. 이후 그는 “책 속의 이론보다 현장에서 체험한 살아있는 차 지식을 교단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고 결심한다. 1999년부터 중국 전역과 해외 차 생산지를 돌아다니며 현지의 차엽과학연구원, 차농과 차상들을 만났다. 지방마다 다른 생태환경, 생장변화, 가공방식, 심사기준, 판매 등 전문지식을 쌓았다.
   
   2000년 봄 주 교수는 윈난성의 윈시림 속에 펼쳐진 고차수에 매료됐다. 어릴 적의 향수와 묘하게 맞물리며 보이차가 가진 변화무쌍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보이차를 따라다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보이차의 원형을 간직한 소수민족의 음차 풍습을 연구하기 위해 차산을 탐방할 때였다. 폭우에 진흙탕으로 변한 산길에서 차가 낭떠러지로 미끄러졌다. 고생 끝에 찾아간 소수민족 마을에서는 개에 물리는 봉변도 당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부랑산(布朗山)의 라후족(拉祜族) 농가에서다. 장작불로 밥을 짓고 소금에 절인 쇠고기 육포와 토종닭을 잡아줘서 유난히 밥을 많이 먹었다. 주인장을 향해 “함께 먹자”고 권했지만, 주인장은 “이미 먹었다”고 사양하며 옆에서 웃음만 지으며 시중을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주인장은 없는 살림에 저녁을 굶어가며 춘절(春節·음력 설)에만 먹을 수 있는 명절 음식을 대접해 준 것이었다. 당시 차농의 생활과 주거환경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차엽 가격이 옥수수 가격과 비슷했을 때였다. 주 교수는 “소박하지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정(情)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2004년부터 맹해차창(海茶廠)이 운영하는 경홍다도관(景洪茶道館)에서 특별강의를 했다. 강의를 진행하며 보이차의 교과서로 인정받는 맹해차창의 병배 원리를 배우게 됐다. 보이차를 제대로 알게 됐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 보이차에 대한 투자 의욕도 마구 솟구쳤다.
   
   그는 이미 1998년부터 여윳돈으로 보이차를 조금씩 사들이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보이차를 대량으로 매입했다. 모아둔 돈과 주변의 돈까지 끌어왔다. 밥을 굶어도 누각처럼 쌓여 있는 보이차를 보면 마냥 즐거웠다. 보이차의 가격은 매년 올랐고 계속 보이차를 매집했다. 2006년 말부터 2007년 봄 사이, 보이차 가격은 그야말로 폭등했다. 보이차라면 무조건 사는 ‘묻지마 투자’ 열풍에 중국의 서민들도 대거 동참했다. 주 교수도 이에 질세라 돈과 인맥을 총동원했다. 맹해차창의 보이차를 몇 해 동안 모은 수량보다 더 많이 사들였다.
   
   하지만 보이차 시장의 비이성적 광풍 뒤에는 거대한 투기세력의 조작이 있었다. 투기세력은 엄청난 차익을 챙기고 소리 소문 없이 빠져나갔다. 결국 2007년 하반기부터 보이차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투매 현상마저 일어났다. 폭등하는 속도도 빨랐지만 폭락세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폭주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주 교수는 다리에 맥이 풀렸다. 보이차라면 한때 밥을 굶어도 좋았던 그였다. 이제는 밥 먹을 돈도 없었다. 배가 고프고 속이 쓰라렸다. 결국 헐값에라도 보이차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라고 믿었던 시기가 함정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빈손이었다.
   
   주 교수는 처음에는 보이차 투자의 실패 원인을 거대자본을 휘두른 투기세력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자신이 패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이차를 축재(蓄財) 수단으로 삼아 부린 과욕과 물욕이 재앙을 만들어낸 것. 그래도 재앙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자신을 반성하고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주 교수는 신심(身心)을 다잡기 위해 광저우를 떠나 윈난의 차산에 잠시 칩거했다. 마침 윈난의 고차수에서 위로를 받던 주 교수는 고차수에서 보이차의 미래를 발견하게 된다. 윈난의 고차수 순료만을 고집하여 고수차를 만드는 진미호(臻味號)를 사업파트너로 선택해 광저우로 돌아온다. 그녀의 생각은 옳았다. 중국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며 보이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농약과 화학비료로부터 안전한 고수차를 선호하기 시작한 것. 생태환경이 좋은 고수차를 보급하는 사업은 투기로 얼룩진 대형 차창의 흐름과는 달랐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주 교수는 2011년 5월 광저우의 부촌 판위(番)에 5500m² 규모의 최고급 차예관인 부자원(夫子園)을 열었다. 이론과 실전을 연마하는 장소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부자원은 차와 식사를 겸할 수 있는 고급 사교장이다. 주즈리 교수는 “한국에서 오신 분에게는 회비 부담 없이 VIP 대접을 하겠다”고 내게 말했다.


   
서영수
   
   1956년 부산 태생. 유현목·이두용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뒤 1984년 영화감독으로 데뷔.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조예가 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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