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황혼’에 하겐으로 출연한 베이스 전승현. 키릴 페트렌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이 지휘를 맡았다. ⓒphoto Bayreuther Festspiele/Enrico Nawrath
‘신들의 황혼’에 하겐으로 출연한 베이스 전승현. 키릴 페트렌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이 지휘를 맡았다. ⓒphoto Bayreuther Festspiele/Enrico Nawrath

리하르트 바그너 김나지움, 라인의 황금 호텔, 파르지팔 약국…. 독일 바이에른주 소도시 바이로이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의 자취로 가득하다. 바이로이트 근교 온천 이름도 바그너 오페라 이름을 딴 ‘로엔그린 온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드레스덴에서 자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의 상징이 된 것은 1876년 바그너가 창설한 바이로이트 축제 덕분이다.

여름철 늦은 오후면 바이로이트역에서 도보로 10분쯤 떨어진 축제극장으로 향하는 길에 턱시도와 나비 넥타이, 화려한 드레스 정장 차림의 신사 숙녀들로 붐빈다. 전 세계 바그너 애호가들의 성지(聖地)로 꼽히는 바이로이트 축제 티켓을 확보한, 선택된 소수다. 매년 7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유럽의 여름축제 가운데 가장 티켓을 구하기 어려운 연주회로 꼽힌다. 예전에는 전 세계에 있는 바그너협회를 통해 티켓을 할당하고 이를 통해서만 티켓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이로이트 축제 구경을 한번 하려면 몇 년씩 기다려야 했다. 몇 년 전부터는 인터넷 예매도 가능하다지만, 축제 개막일(7월 25일) 훨씬 전에 티켓(총 30회)이 모두 동났다. 바이로이트는 올해 개막공연 ‘탄호이저’를 비롯,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로엔그린’과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인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7작품을 올린다. 모두 바그너 작품이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자체가 바그너가 자기 작품을 올리기 위해 만든 극장이다.

올해 바이로이트는 한국 음악사(音樂史)에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바이로이트 138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성악가들이 같은 작품에서 주역으로 동시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바리톤 사무엘 윤(43·본명 윤태현)이 바그너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주인공 ‘네덜란드인’을 부르고, 역시 주역인 노르웨이인 선장 달란트로 베이스 연광철(49·서울대 교수)이 나섰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 성악가들이 이렇게 한 작품에 연거푸 주연으로 출연한 적도 거의 없다. 베이스 전승현(41·서울대 교수)도 ‘반지’ 시리즈 마지막 ‘신들의 황혼’에 하겐이라는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아 올해 바이로이트는 한국 성악가들의 경연장이 됐다.

‘로엔그린’에 헤어루퍼로 출연한 바리톤 사무엘 윤. 사무엘 윤은 2010년부터 이 작품에 출연하다 2012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인공에 발탁됐다. ⓒphoto Bayreuther Festspiele/Enrico Nawrath
‘로엔그린’에 헤어루퍼로 출연한 바리톤 사무엘 윤. 사무엘 윤은 2010년부터 이 작품에 출연하다 2012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인공에 발탁됐다. ⓒphoto Bayreuther Festspiele/Enrico Nawrath

축제 개막공연이 열린 지난 7월 25일 오후 3시 바이로이트 ‘라인의 황금’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서는 1시간 뒤에 있을 ‘탄호이저’ 공연에 가려는 정장 차림의 신사 숙녀들이 가볍게 샴페인과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로비는 공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호텔 측은 투숙객들을 위해 2.5㎞ 떨어진 축제극장까지 셔틀버스를 마련했다. 극장 입구엔 시상식장처럼 레드카펫을 깔아놓고 사진기자들이 VIP들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작년과 재작년 개막공연 때는 메르켈 독일 총리도 참석했을 만큼, 바이로이트 개막공연은 독일 최고의 문화 이벤트다.

극장 2층 발코니에서 금관 주자들이 나와 팡파르를 한 번 울렸다. 공연 15분 전이라는 신호다. 10분 전에는 팡파르 2번, 5분 전엔 3번 울리는 것으로 공연 시작을 알린다. 1925석짜리 이 극장은 성악가 보호를 위해 에어컨도 제대로 틀지 않고 의자도 딱딱한 나무의자다.

여느 오페라극장과 달리 객석에서 오케스트라도 보이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무대 아래 깊숙이 내려앉아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오로지 바그너의 의도에 따라 무대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탄호이저’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무대 위 원형 철장 안에서 탄호이저가 사랑의 여신 베누스와 환락을 즐기는 장면이 연출됐다. 그런데 갑자기 막이 내려오더니, 양복 입은 안내원이 나왔다. “기술적 문제 때문에 20분간 공연을 중단한다. 관객들은 모두 극장 밖으로 나가서 기다려 주길 바란다.” 영문 모를 안내방송에 관객들은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휴식은 40분 정도 이어졌다. 알고 보니 무대세트 고장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나중에 독일 뉴스를 보니 바이로이트 138년 역사상 개막공연에서 무대세트 고장으로 40여분간 공연을 중단하고 관객들을 극장 밖으로 내보낸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날 ‘탄호이저’에는 베이스 연광철이 헤르만 영주로 나왔다. 프로그램 제일 위에 이름을 올릴 만큼 중요한 배역이다. 2011년 바이로이트에 신작(新作)으로 올라간 ‘탄호이저’는 복잡한 이야기 전개와 난해한 연출, 산만한 무대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올해를 마지막으로 예정보다 1~2년 빨리 바이로이트 무대에서 내려간다.

바그너 애호가들의 성지로 꼽히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photo 김기철
바그너 애호가들의 성지로 꼽히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photo 김기철

‘탄호이저’는 13세기 초 기사 탄호이저가 영주의 조카 엘리자베트와 연인 사이였지만, 사랑의 여신 베누스의 동굴에 찾아간 후 쾌락에 빠져 나락을 헤매다 엘리자베트의 목숨을 건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 하지만 바이로이트에서 본 ‘탄호이저’는 줄거리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전위적인 연출과 무대였다. 연광철 교수도 이렇게 말했다. “미리 설명을 듣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부터 2000년 후 인류의 DNA가 오염됐다고 가정한다. 정말 제대로 된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정상적인 음식을 못 먹고, 바이오가스를 알코올에 섞어서 먹는다. 탄호이저는 베누스와 관계를 갖고 임신을 시킨다. 여기서 정상적인 인간이 나올 거라고 기대한다.” 연출가 세바스티안 바움가르텐(45)은 중세 기사문학을 미래 공상과학소설로 바꿔놓았다. 얘기 자체가 낯선 데다 독일어 대사에 자막도 없다 보니 장면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악셀 코버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바그너의 장중한 교향악을 오리지널 무대답게 황홀하게 연주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울려퍼지는 관현악은 날카로운 금관 소리마저 부드럽고 우아하게 들렸다.

바이로이트 관객의 평가는 냉정했다. 커튼콜 때 의례적인 박수 같은 건 없었다. 출연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냉혹하리만큼 칼 같은 평가를 했다. 박수와 발 구름, ‘브라보’ 환호의 크기가 등급을 매긴 성적표처럼 정확하게 나왔다. 탄호이저 역 토르스텐 케를과 베누스 역 메조소프라노 미셸 브리트에 대한 박수는 시들했고, 연출가 바움가르텐이 나왔을 때는 노골적인 야유가 쏟아졌다. 엘리자베트 역 소프라노 카밀라 니룬트와 볼프람 폰 에센바흐 역 마르쿠스 아이헤에 대한 박수는 뜨거웠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연광철이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마룻바닥을 발로 구르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는 점이다. 1996년부터 바이로이트 무대에 서온 연광철에 대한 관객들의 사랑은 지극했다.

이튿날인 7월 26일 한국 성악가 2명이 주역으로 나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개막공연에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성공이었다. 조명이 꺼지자 나비넥타이를 맨 검정색 정장 차림의 신사들과 화려한 드레스로 성장한 여성들이 흥분한 아이들처럼 발을 구르며 브라보를 외쳐댔다. 지휘를 맡은 크리스티안 텔레만(55)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음악감독을 비롯, 바리톤 사무엘 윤과 베이스 연광철이 대여섯 차례 무대로 불려나왔다. 마지막 커튼콜 때는 사무엘 윤과 연광철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나왔다. 한국 성악가 두 사람이 합작해 만들어낸 성과였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저주를 받은 유령선 선장 ‘네덜란드인’이 젠타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 30대 연출가 얀 필립 글로거(Gloger)는 네덜란드인은 비즈니스맨으로, 달란트는 선풍기를 만드는 기업가로 바꿨다. 무대는 현대도시처럼, 고층건물과 번쩍이는 불빛으로 현란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숫자는 주가(株價)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표현했다.

양복 차림의 사무엘 윤은 여행용 캐리어에 돈을 잔뜩 넣어다니며 자신을 구원해 줄 여인을 찾아다녔다. 첫 등장부터 진지하고 울림 깊은 목소리로 목표 없는 현대인의 고뇌를 담아냈다. 말쑥한 정장을 입은 연광철은 사업 궁리에 여념없는 기업가였다. ‘네덜란드인’의 재력(財力)을 보고 딸 젠타를 넘겨주면서 사업 기회만 떠올리는 기회주의자이면서도 밉지 않은 달란트였다. 1막 하이라이트는 사무엘 윤과 연광철이 15분 넘게 이중창을 부르는 대목. 사무엘 윤의 고뇌 어린 목소리와 연광철의 따뜻하면서도 힘 있는 저음(低音)이 어울려 극장 안을 감돌았다. 독일 소프라노 리카르다 메르베트(Merbeth)는 30분 넘게 혼자 볼륨 있는 목소리로 무대를 장악하면서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젠타를 연기했다. 당대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 틸레만의 자로 잰 듯 정확한 연주는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최근 바이로이트의 대표작으로 떠올랐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인공 ‘네덜란드인’ 사무엘 윤(오른쪽)과 노르웨이인 선장 달란트 역 연광철. 바이로이트 138년 역사상 한국 성악가가 한 작품에서 주역 둘을 동시에 맡은 것은 처음이다. ⓒphoto Bayreuther Festspiele/Enrico Nawrath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인공 ‘네덜란드인’ 사무엘 윤(오른쪽)과 노르웨이인 선장 달란트 역 연광철. 바이로이트 138년 역사상 한국 성악가가 한 작품에서 주역 둘을 동시에 맡은 것은 처음이다. ⓒphoto Bayreuther Festspiele/Enrico Nawrath

바이로이트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비롯, 보통 1년에 1편씩 신작을 올리고 한번 올린 작품은 5~6년씩 이어진다. 2012년 시작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사무엘 윤에겐 기회의 무대였다. 원래 배역을 맡았던 가수가 나치 문양을 새겼다는 스캔들 때문에 도중하차해, 최종 리허설을 5시간 앞두고 투입됐다. 그해 5월 쾰른 오페라극장에서 ‘네덜란드인’을 불렀던 사무엘 윤은 준비된 대타(代打)였다. ‘바이로이트를 구한 성악가’란 보도가 나올 만큼 그의 연주는 성공적이었고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3년째 바이로이트에서 ‘네덜란드인’을 부르고 있다. 작년 바이로이트 개막공연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최근 DVD와 블루레이로도 출시돼 사무엘 윤의 활약을 안방에서도 즐길 수 있다.

연광철은 올해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긴급 호출’을 받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 ‘발퀴레’에 투입됐다. 연광철은 “원래는 존 보타(남아공 테너)가 탄호이저를 맡고 틸레만이 지휘한다고 해서 응했는데, 보타와 틸레만이 차례로 빠져나갔다. 내가 발을 빼기엔 너무 늦었다”고 설명했다. 보타는 ‘발퀴레’에서 주역 지그문트로 연광철(훈딩)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공연을 마치고, 근처 동네 맥줏집에서 연광철·사무엘 윤과 바이로이트산(産) 맥주를 시켜 놓고 앉았다. “바이로이트에서 한국인이 한 작품에서 나란히 주역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아시아 성악가들이 한 작품에서 동시에 주역을 맡는 경우도 거의 없다.” 두 사람은 적잖이 감격스러워했다. 맥줏집에서도 이들을 알아보고 사인을 부탁하거나 사진촬영을 요청하는 팬들이 줄을 이었다.

연광철 이전, 바이로이트에서 한국인의 존재감을 알린 성악가는 필립 강으로 알려진 베이스 강병운 전 서울대 교수다. 강병운은 1988년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라인의 황금’과 ‘지크프리트’에 파프너, ‘신들의 황혼’에 하겐으로 출연했고, 이듬해엔 반지 4부작 4작품 모두 출연하는 등 1992년까지 바이로이트를 지켰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다시 반지 4부작 중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에 출연했다.

연광철은 바이로이트 축제 공연 30회 중 16회, 사무엘 윤은 ‘로엔그린’의 헤어루퍼 등 12회에 나서고, 전승현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신들의 황혼’ 주요 배역인 하겐으로 3회 출연한다. 사무엘 윤은 “국내에서 바그너 테너 경연대회라도 열어서 테너도 바이로이트에 참가하면 한국 성악가들끼리 주역을 도맡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키워드

#현장
김기철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