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 건립된 독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1818년 건립된 독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세계 최고의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곳은 뮌헨과 빈, 베를린일 겁니다. 여기서는 지금 한창 뜨는 성악가들을 만날 수 있지요.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나 런던 로열오페라는 유명하지만 전성기가 지난 성악가들을 많이 세우지요.”

베이스 연광철(49)은 세계 오페라 무대의 판도를 이렇게 정리했다. 뮌헨은 독일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최고의 클래식음악을 즐길 수 있는 문화도시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가 매일같이 최고 수준의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하고, 마리스 얀손스가 이끄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지난 7월 타계한 로린 마젤이 이끌던 뮌헨 필하모닉오케스트라, 그리고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소속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 등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가 정립(鼎立)해 있다.

다른 도시의 오페라하우스가 문을 닫는 여름철, 뮌헨은 유럽에서 최고의 오페라를 입맛대로 골라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도시다. 정규 시즌 직후인 6월 하순부터 7월 말까지 올라가는 뮌헨 오페라페스티벌 덕분이다. 지난 6월 21일 시작, 7월 31일에 막을 내린 뮌헨 오페라페스티벌은 정규 시즌 레퍼토리 가운데 최고의 성악가들로 출연진을 짜서 40여일간 집중적으로 오페라를 올렸다. 올해 페스티벌엔 티켓 8만7683장이 팔렸는데, 작년보다 9500장이나 더 나갔다. 객석 점유율도 99.13%나 될 만큼 인기를 누린다.

올해 뮌헨 오페라페스티벌에는 로시니의 ‘윌리엄 텔’, 몬테 베르디의 ‘오르페오’ 등 신작(新作) 2편과 정기 레퍼토리 공연 12편이 올라갔다. 특히 페스티벌 개막공연 로시니의 ‘윌리엄 텔’은 오페라하우스 앞 막스요제프광장에서 대형 화면으로 생중계돼 무료로 관람했다. ‘모두를 위한 오페라(Opera for All)’ 프로그램이다.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맥베스 부인으로 나선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 에디타 그루베로바의 ‘루크레치아 보르자’,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가 나선 ‘세빌리아의 이발사’, 아냐 하르테로스의 ‘토스카’, 디아나 담라우의 ‘라 트라비아타’, 요나스 카우프만의 ‘운명의 힘’ 등 세계적 성악가들이 총출동했다.

그루베로바의 ‘루크레치아 보르자’

도니제티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서 제나로 역을 맡은 슬로바키아 출신 테너 파볼 브레슬릭(가운데 앉은이).
도니제티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서 제나로 역을 맡은 슬로바키아 출신 테너 파볼 브레슬릭(가운데 앉은이).

지난 7월 20일 저녁 뮌헨 도심 막스요제프광장 근처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슬로바키아 출신 명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68)의 ‘루크레치아 보르자’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면서 모델로 삼았던 15세기 이탈리아의 전제군주 체사레 보르자의 여동생. 추기경(훗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된 로드리고 보르자)의 딸로 태어나 평생 세 명의 남자와 결혼했으며, 방탕한 남녀관계 때문에 악녀로 알려진 인물이다.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 삼아 희곡을 썼는데, 19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가 위고의 희곡을 토대로 대본을 쓰고 도니제티가 작곡을 맡아 1833년 밀라노 라스칼라극장에서 초연을 올려 흥행에 성공했다. 루크레치아가 베니스의 젊은 장교 제나로와 사랑에 빠지는데, 알고 보니 어릴 때 헤어진 아들이었다. 세 번째 남편 알폰소 데스테 페라라 공작은 제나로와 아내 루크레치아의 관계를 의심한다. 제나로를 붙잡아와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지만 루크레치아가 해독제를 준 덕분에 살아난다. 하지만 제나로는 친구 오르시니의 권유로 파티에 갔다가 계략에 빠져 다시 독이 든 와인을 마신다. 이번에는 루크레치아가 주는 해독제를 마다하고 친구들과 함께 죽는다는 비극.

뮌헨의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기계음을 뺀 언플러그드 음악 같았다. 3면의 벽과 전면에 ‘Lucrezia Borgia’라고 붙인 글자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독일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Loy)와 무대디자이너 헨릭 아르(Ahr)는 16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을 요즘의 학교 같은 세트로 옮겼고, 의상도 요즘 것으로 입혔다. 현대심리극처럼 보이는 단순한 무대였다. 제나로 역의 슬로바키아 출신 테너 파볼 브레슬릭(Breslik)과 오르시니 역의 메조소프라노 실비아 트로 산타페(Santafe) 등 여섯 명의 동료들은 시작부터 힘 있는 중창으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작품의 꽃은 예순여덟의 소프라노 그루베로바였다. 그루베로바는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당대 도니제티와 벨리니 오페라의 1인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흔에 가까운 나이인지라 어떨까 싶었다. 객석에서 본 그루베로바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젊어 보였다. 목소리는 더 젊게 들렸다. 그루베로바의 아리아는 여러 겹으로 꼭꼭 싼 보석상자처럼, 한 꺼풀씩 벗겨낼 때마다 다른 깊이와 색깔을 드러냈다. 죽어가는 아들 제나로 앞에서 남편 알폰소 공을 향해 속삭이듯 절규하듯 부르는 ‘그는 나의 아들이었소’는 절창(絶唱)이었다. 커튼콜 때 쏟아진 환호는 뮌헨 관객들이 그루베로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끼게 할 만큼, 열렬했다.

하르테로스의 ‘토스카’

도니제티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서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왼쪽 앉은이)와 아들 제나로 역 파볼 브레슬릭.
도니제티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서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왼쪽 앉은이)와 아들 제나로 역 파볼 브레슬릭.

이튿날은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의 대표주자 아냐 하르테로스(Harteros·42)의 ‘토스카’였다. 2012년 1월 바로 이 극장에서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베이스 르네 파페 등 독일 최고의 성악가들과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여주인공 엘리자베타 왕비로 나선 하르테로스를 보고 감탄했었다. 늘씬한 키에 미모도 돋보이지만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소프라노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만난 ‘돈 카를로’에서도 하르테로스는 카우프만, 토머스 햄슨(로드리고), 마티 살미넨(필리포 2세) 등 쟁쟁한 드림팀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하르테로스는 연인 카바라도시에 대한 사랑과 질투로 가득한 격정의 여인 토스카에 맞춤한 캐스팅이었다. 카바라도시를 가두고 토스카를 탐하는 로마 경찰총수 스카르피아 남작에 맞서는 2막에서 하르테로스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스카르피아와 실랑이하다 낙담한 토스카가 부르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가 끝나자 발로 바닥을 구르며 환호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사형대에 선 카바라도시가 쓰러져 숨지고, 토스카를 농락하는 대가로 연인 카바라도시를 살려주겠다던 스카르피아의 약속이 거짓으로 밝혀지자 하르테로스는 경찰에 쫓겨 성벽 위로 올라갔다. “스카르피아, 신 앞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외치며 아래로 몸을 던진 토스카의 격정은 하르테로스와 분간이 어려울 만큼 한 몸으로 겹쳤다. 아르헨티나 테너 마르첼로 알바레스(Alvarez·52)가 처형 직전 부르는 카바라도시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도 좋았고, 세르비아 바리톤 제리코 루치직(Lucic·46)은 음모와 야심으로 가득한 악역 스카르피아를 굵직한 저음에 잘 담아냈다.

프랑스 무대디자이너 리샤르 페두치가 꾸민 ‘토스카’ 무대 역시 간결했다. 3막 토스카가 몸을 날리는 성벽 이외에는 별다른 무대 세트가 없었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을 비롯한 독일 오페라는 고전을 재해석한 현대적 연출과 무대가 주류를 이루면서 볼거리는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 같다. 이탈리아 지휘자 카를로 몬타나로(Montanaro)가 이끈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는 ‘토스카’에 최적화된 연주를 들려줬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에 객원으로 참여한 한국 연주자들에 따르면, 이 오케스트라는 늘 주요 레퍼토리를 외우다시피 하기 때문에 새 프로덕션이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처럼 거작(巨作)이 아니면, 리허설 한 번 하고 바로 본 공연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고도 이런 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다.

어윈 쉬로트의 ‘피가로의 결혼’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 오른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관객들의 열띤 기립박수 덕분에 출연진은 10여차례 무대에 불려 나왔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 오른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관객들의 열띤 기립박수 덕분에 출연진은 10여차례 무대에 불려 나왔다.

지난 7월 22일 저녁에 본 ‘피가로의 결혼’은 시작부터 어리둥절했다. 원래 프로그램에는 우루과이 바리톤 어윈 쉬로트(Schrott·44)가 알마비바 백작, 캐나다 바리톤 제럴드 핀리(Finley·54)가 피가로를 맡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대에 나선 피가로는 어윈 쉬로트였고 핀리가 알마비바 백작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06년 그의 오페라 22편을 모두 공연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피가로의 결혼’에서 케루비노를 불렀던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틴 셰퍼도 빠졌다. 알마비바 백작 부인만 프랑스 소프라노 베로니크 장스(Gens·48) 그대로였고, 수잔나도 원래 러시아 소프라노 에카테리나 시우리나에서 한나-엘리자베트 뮐러로 바뀌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공연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쉬로트는 어리숙하면서도 세상 눈치에 빠른 하인 피가로를 능청맞게 연기하면서 오페라를 이끌어갔고, 핀리도 수잔나를 탐내는 엉큼한 알마비바 백작 그대로였다. 크리스틴 셰퍼가 빠져 서운했던 마음은, 미국 메조소프라노 케이트 린제이(Lindsey)가 케루비노 아리아 ‘나도 나를 알 수 없어’를 부르는 순간 말끔히 가셨다. 린제이는 사랑에 들뜨고 혈기왕성한 케루비노 그대로였다. 3막에서 푸른 줄무늬 드레스를 입고 나온 베로니크 장스도 알마비바 백작 부인의 유명한 아리아 ‘좋았던 시절은 어디로 갔나(Dove sono)’를 멋있게 소화했다. 7월 17일의 첫 공연을 놓고 ‘오페라투데이’는 이스라엘 출신 지휘자 댄 에팅거(Ettinger)에 대해 “차라리 지휘자 없이 공연하는 게 낫겠다”며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22일의 연주는 이런 야유가 부당하다 싶을 만큼, 나쁘지 않았다. 에팅거의 지휘는 지난 4월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라 트라비아타’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좋은 연주를 보여줬다.

공연 3시간이 넘어 피날레로 치달을 무렵 1층 뒤쪽 객석이 잠깐 어수선해지더니 관객 10여명이 옆으로 빠져나왔다. 혹 공연이 마음에 안 들어서 도중에 나가려고 하나 싶었는데, 장시간 공연의 긴장과 흥분 때문에 관객 한 사람이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극장 안내원이 달려와 환자를 밖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했고, 일어났던 관객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알마비바 백작 부부의 갈등, 티격태격하던 피가로와 수잔나의 다툼도 해결되고, 모두가 화해하면서 부르는 합창으로 막이 내려갔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은 독일어 자막만 제공하고, 팸플릿도 거의 독일어로 쓰여있기 때문에 줄거리와 아리아 가사를 착실히 공부해가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을 제공하는 빈 국립오페라극장보다는 못하지만, 자막 서비스가 아예 없는 독일 바이로이트페스티벌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뮌헨 오페라페스티벌은 내년 6월 시작하는 2015년 스케줄을 벌써 홈페이지(www.bayerische.staatsoper.de)에 올려놨다. 내년 1월 24일 오전 10시 티켓박스에서 첫 티켓 판매에 들어간다는 안내문이 벌써부터 눈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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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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