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산’을 설계한 안도 다다오의 의도대로 긴 담을 돌아가야 본관 건물이 보인다.
‘뮤지엄 산’을 설계한 안도 다다오의 의도대로 긴 담을 돌아가야 본관 건물이 보인다.

항공촬영한 ‘뮤지엄 산’. 도형이 이어진 모양이다. ⓒphoto 뮤지엄 산
항공촬영한 ‘뮤지엄 산’. 도형이 이어진 모양이다. ⓒphoto 뮤지엄 산

피라미드 형태의 계단 위에 사각 프레임이 하늘로 뚫려 있다. 프레임 속으로 하늘이 표정을 달리하며 흘러갔다. 시간에 마음을 맡기고 있다 보니 프레임과 나의 경계가 사라졌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듯 하늘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 프레임 밖으로 한발을 내딛는 짧은 순간, 몸이 휘청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2차원의 평면 프레임 밖에는 탁 트인 자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강원도의 산이 피라미드처럼 펼쳐져 있고 발 아래로 오크밸리 골프장이 내려다보였다. 의식은 2차원의 평면에 머무른 탓인지 잠깐 동안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오히려 비현실 같았다.

빛과 공간의 마술사라 불리는 세계적 설치작가 제임스 터렐(72·미국)의 작품 ‘호라이즌 룸’을 체험한 느낌이다. 터렐은 작품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따라 관객의 사유가 더해지면서 작품이 완성된다. 이곳에는 호라이즌 룸을 비롯해서 터렐의 작품 5개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있는 곳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에 있는 ‘뮤지엄 산’이다.

‘뮤지엄 산’(관장 오광수)은 복합리조트 오크밸리 내 해발 275m의 산꼭대기에 있다. 2013년 5월 한솔뮤지엄으로 개관했다가 지난해 3월 ‘뮤지엄 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개관 2년도 안 된 ‘뮤지엄 산’에 2014년 한 해 유료관객이 10만1362명이 다녀갔다. 서울 종로구 도심 한복판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작년 관객이 108만명이었다. 인구 1000만명에 가까운 서울과 비교해 32만명의 소도시에서 10만을 돌파했다는 것은 놀랍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입장료가 4000원인 데 비해 제임스 터렐관까지 볼 수 있는 ‘뮤지엄 산’의 입장료는 어른 2만8000원(갤러리 1만5000원), 소인 1만8000원(갤러리 1만원)으로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강원도 산속 미술관에 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걸까. 지난 2월 1일 ‘뮤지엄 산’을 찾았다. 이날도 100여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 방문 차량으로 가득 찼다. 조재흥 교육실 주임은 “하루에 1300여명이 몰려온 날도 있다. 개관 초기에는 오크밸리 리조트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요즘엔 일부러 뮤지엄 산을 찾아오는 일반 관객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01  뮤지엄 산 본관에서 외부로 뚫린 삼각형 부분. 삼각형 구조를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각도 조절을 했다. 건물 내부는 조명을 최소화하고 자연빛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했다.<br></div>02  ‘드로잉의 재발견’전이 열리고 있는 청조갤러리. 현빈이 출연한 드라마 ‘지킬 하이드, 나’의 별장 거실을 이곳에서 촬영했다.<br>03  워터가든에 물을 채워 놓으면 건물이 마치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photo 뮤지엄 산
01 뮤지엄 산 본관에서 외부로 뚫린 삼각형 부분. 삼각형 구조를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각도 조절을 했다. 건물 내부는 조명을 최소화하고 자연빛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했다.
02 ‘드로잉의 재발견’전이 열리고 있는 청조갤러리. 현빈이 출연한 드라마 ‘지킬 하이드, 나’의 별장 거실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03 워터가든에 물을 채워 놓으면 건물이 마치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photo 뮤지엄 산

‘뮤지엄 산’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맏딸인 한솔문화재단의 이인희 고문이 소장품을 내놓고 만든 곳이다. ‘건축계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맡아 2008년 착공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다. ‘느림의 예술’을 내걸고 자연 속에서 예술과 소통하며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이 고문의 의지가 담겼다. ‘뮤지엄 산’은 한솔종이박물관이 뿌리인 페이퍼갤러리와 기획전시가 주로 이뤄지는 청조갤러리, 제임스 터렐관, 3개의 가든(플라워가든·워터가든·스톤가든)으로 이뤄져 있다. 총 7만7170㎡(2만1530평)의 면적으로 미술관 전체를 돌아보려면 이동거리만 왕복 2.3㎞,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웰컴센터에서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면 플라워가든이 펼쳐진다. 80만주의 난쟁이패랭이꽃을 심어놓은 플라워가든에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82)의 강철 작품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가 서 있다. 높이 10m인 붉은 강철 작품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키네틱 아트이다. 자연과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붉은 패랭이꽃이 필 때도 좋지만 겨울에는 눈을 배경으로 흰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조합을 볼 수 있다. 180여그루의 자작나무 숲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긴 콘크리트 벽과 돌담이 엇갈리며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 뒤에 워터가든과 본관 건물이 숨어있다. 한 번에 다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은 안도 다다오의 의도라고 한다. 극적효과를 노린 것이라면 그의 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벽을 돌아 나타나는 전경에 탄성이 나온다. 워터가든 가운데로 죽 뻗어 있는 길 끝에 서 있는 본관 건물은 3월부터 11월까지 워터가든에 물이 채워질 때면 마치 물 위에 뜬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길의 중앙엔 러시아 출신 작가 알렉산더 리버만의 강철 작품이 아치 대문처럼 서 있다.

04 05  제임스 터렐의 작품. ‘웨지워크’(왼쪽)와 ‘호라이즌 룸’. photo 플로리안<br></div>06  한솔종이박물관을 모태로 한 페이퍼갤러리의 전시장 일부.
04 05 제임스 터렐의 작품. ‘웨지워크’(왼쪽)와 ‘호라이즌 룸’. photo 플로리안
06 한솔종이박물관을 모태로 한 페이퍼갤러리의 전시장 일부.

본관은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벽은 물론 내부까지 콘크리트 벽과 경기도 파주에서 가져온 돌벽으로 이뤄져 있다. 건물에 들어간 파주석만 1180t이다. 돌벽과 콘크리트 벽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건물엔 삼각형, 사각형, 원형의 공간이 숨겨져 있다. 하늘로 뚫려 있는 도형들은 외부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가늘고 긴 모양의 산꼭대기에 위치한 미술관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이 도형들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관은 페이퍼갤러리와 기획전시를 하는 청조갤러리으로 나눠져 있다. 백남준의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가 전시된 별도의 방도 있다. 청조갤러리엔 현재 ‘사유로서의 형식-드로잉의 재발견’전이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3번의 기획전이 열렸다. 그중 개관전으로 열린 ‘한국 근현대 서양화’와 두 번째 전시 ‘근현대 한국화, 판화’전은 이 고문의 소장품을 전시한 것이고 특별기획전으로는 드로잉전이 처음이다. 드로잉전 중에서 황혜선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장소는 최근 탤런트 현빈의 출연으로 화제인 SBS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 현빈의 별장 거실로 나왔다고 한다.

오는 3월 20일부터는 두 번째 특별기획전으로 ‘하얀 울림-한지의 정서와 현대미술’전이 열린다. 단색화의 대표작가인 김기린·박서보·윤형근 등 한지를 매체로 한 40여명 작가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된다. 한지가 현대미술의 한 부분을 개척한 1980년 이후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미술관을 통과하면 스톤가든이 나온다. 안도 다다오가 경주 고분을 모티브로 만든 이곳은 한반도 8도와 제주도를 상징하는 아홉 개의 돌무덤으로 이뤄져 있다. 부드러운 곡선의 무덤을 배경으로 미국의 팝아트 조각가 조지 시걸의 ‘두 벤치 위의 연인’ 등 조각 작품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스톤가든을 지나 산꼭대기의 끝에 제임스 터렐관이 지하로 숨겨져 있다.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 터렐의 대표작으로 ‘완전한 영역’을 의미하는 ‘간츠펠트(Ganzfeld)’, 어두운 통로를 지나 빛과 마주하는 ‘웨지워크(Wedgework)’ 등 5개의 작품이 있다. 터렐의 작품은 보는 사람, 위치, 시간, 빛의 색깔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스카이스페이스에서는 바닥에 벌렁 누워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도 있다고 한다. 터렐관은 인원 제한이 있어서 관람을 하려면 시간별로 예약을 해야 한다. 지난해 이곳을 찾은 터렐은 “다섯 개 작품이 한곳에 있으니 황홀하다”면서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터렐의 전속 사진작가인 플로리안 홀츨러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카이스페이스 작품이 한국에 있다”고 평했다.

조재흥 주임은 “안도 다다오가 작년 관객 10만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속까지 누가 찾아올까, 잘해야 3만명이 찾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깜짝 놀라더라”고 전했다. 영국의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해 6월 28일자로 ‘뮤지엄 산’을 “어디에도 없는 꿈의 미술관”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공사기간만 꼬박 4년 반이 걸려 건축과 관련된 숨은 이야기도 많다.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보기 위한 건축학도들의 견학코스가 되고 있다. 미술 전시만을 기대하고 온다면 건축과 공간에 비해 갤러리로서의 역할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계절별로 다른 풍경을 빚어내는 자연과 어우러진 ‘뮤지엄 산’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판화 공방 등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2016년 제2영동고속도로가 뚫리면 서울과도 훨씬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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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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