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맛이 일품인 돼지갈비백반.
불 맛이 일품인 돼지갈비백반.

오전 8시, 빈 택시들이 서울 성북동 성곽 너머로 줄지어 모여든다. 든든한 아침식사를 챙기기 위해서다. 간송미술관 맞은편 ‘성북동돼지갈비’는 지난 48년간 택시기사들에게 맛난 밥상을 제공하는 밥집으로 명성을 쌓아왔다.

인터넷 검색이 없던 시절, 택시기사들은 실속 있고 맛있는 식당에 대한 알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사들이 많이 찾는 식당은 가성비 좋은 맛집이라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성북동돼지갈비는 인기 있는 기사식당이었지만 이제 기사들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시간으로 밀려나고 맛집을 찾아온 일반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여러 가지 메뉴 중 손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8000원짜리 돼지불고기백반. 여기에 500원을 더 받고 엄지손가락 한 마디 폭의 돼지갈비구이 한 대를 올린 돼지갈비백반도 인기다. 어렵던 시절 돼지불고기를 먹으면서 갈비도 뜯고 싶은 손님들을 위해 창업주가 특별히 만든 메뉴라고 한다.

돼지불고기나 돼지갈비백반을 주문하면 이 집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양은쟁반에 밥과 조갯국, 상추쌈, 조개젓, 통마늘무침, 무초절임, 된장 등을 담아준다. 고기 접시도 조그맣고 얇은 ‘스뎅’으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인분에 고기가 열몇 점 정도 될까. 석쇠 자국이 선명한 고기에서 불 향이 솔솔 풍겨나와 침샘을 자극한다. 우선 시원한 조갯국으로 마른 입을 적시고 고기 한 점을 맛보면 육질이 보들보들하면서 쫄깃하고, 달거나 짜지 않은 순한 양념 맛이 입에 착착 감긴다.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는 온데간데없고 구수한 불 맛이 정말 일품이다. 고기에 쌈이 빠질 수 없다. 상추에 고기와 새콤한 무채, 아삭한 통마늘무침을 얹어 싸먹으면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상추와 함께 나오는 청양고추는 특유의 알싸한 매운맛으로 입맛을 산뜻하게 정리해준다. 풋고추인 줄 알고 덥석 베어 물었다가는 매운맛을 톡톡히 볼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고기 먹는 중간에 짭조름한 조개젓 한 젓가락을 하얀 쌀밥에 얹어 먹다 보면 어느새 밥 한 공기를 금방 비우게 된다. 고기 밥상에 술 한잔이 생각나지만 술은 일절 팔지 않는다. 밥집이지 술집이 아니라는 것이 주인장의 생각이다. 그래서 고기도 백반으로만 팔고, 고기 추가 주문을 받지 않는다.

창업주 강부자(73)씨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요리사였고 어머니는 성북동에서 목로주점을 운영했다.

“어머니는 돼지주물럭을 주로 팔았어요. 옆에서 그대로 배워 나도 돼지주물럭을 했지.”

서울 시내에 차 댈 곳도 마땅치 않았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시간에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드물던 1968년, 강씨는 차 대놓고 밥 먹기 좋은 성북동에 기사식당을 열었다. 테이블이래야 고작 5개, 기사집이라고 간판을 써붙인 작은 식당이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밀어닥쳤다. 자리가 없어 쟁반에 음식을 받아다가 차에서 먹는 기사들이 있을 정도로 손님이 밀려들자 근처에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 창업 8년 만에 지금의 널찍한 자리로 옮겨왔다. 2층집인데 1층은 주방과 홀이 있고, 2층에는 25명 정도 단체손님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다. 직원도 14명으로 늘었다.

이곳은 택시기사들의 천국이었다. 1970~1990년대, 대중교통이 지금처럼 좋지 않고 자가용도 드물던 시절 택시라도 탈라치면 합석은 물론 요금도 ‘따블’을 외치곤 했었다. 이 집에선 하루 종일 강행군하는 기사들이 밥을 먹는 동안 세차 서비스는 기본, 동전을 바꿔주고, 커피도 서비스했다. 강씨는 기사들에게 각자 빨간 돼지저금통을 주고 올 때마다 500원짜리 동전을 모으게 했다. 꽉 차면 저금통을 내주고 기사용 선글라스를 선물로 줘서 그들 사이에서 ‘돼지저금통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시대가 변한 지금은 선반 위 빨간 돼지저금통 몇 개가 그때의 추억을 말해주고 있다.

2대 대표 윤영호씨와 아내 이미옥씨.
2대 대표 윤영호씨와 아내 이미옥씨.

돼지고기는 최고등급 1+만 사용

2003년부터 주방에서 고기 굽는 것을 돕던 아들 윤영호(45)씨가 2013년 대물림을 받아 2대를 이어가고 있다. 영호씨는 매일같이 주차장에서 환한 웃음으로 차량을 안내하고 그의 아내 이미옥(40)씨는 카운터와 주방관리를 도맡고 있다. 아들 부부는 어머니 강부자씨가 하던 그대로 모든 것을 지켜가고 있다.

“어머니는 언제나 최고의 재료만을 고집하셨어요.”

국내산 돼지고기와 쌀, 고춧가루 등 모든 식재료를 엄선해 쓴다. 특히 돼지고기는 최고등급인 1+를 사용한다. 가격이 자꾸 올라 고민이 많지만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삼겹살을 제외한 통마리로 들여와 주방에서 부위별로 손질한다. 목살, 다릿살 등 다양한 부위의 고기를 육절기로 얄팍하게 자른 다음 간장, 설탕, 생강, 마늘, 소주 등 12가지 재료를 넣은 연한 양념에 담가 하룻밤 숙성시키는 것이 맛의 비결. 다른 시설은 현대화했어도 연탄화덕만은 예전 그대로다. 아침 일찍 전날 숙성시켜 놓은 고기를 핏물이 가실 정도로만 초벌구이 해놓고 주문을 받은 즉시 19공탄 연탄불에 바싹 구워 불 맛을 낸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저녁용 고기는 오후에 초벌구이를 따로 한다.

상추도 얇고 부드러우면서 손바닥 안에 딱 들어오는 최상품으로 준비한다. 마늘은 크면 아린 맛이 강하기 때문에 작은 알로 준비해 양념에 버무려낸다. 유난히 시원한 이 집 조갯국은 신선한 조개를 쓰고 많은 양을 한 번에 끓이기에 깊은 맛이 남다르다.

“내 식구들도 먹을 수 있는 깨끗하고 맛있는 밥상을 차려내야죠.”

윤영호씨 부부는 하루에 한 끼는 이 집 돼지불고기나 돼지갈비백반을 먹고, 아이들도 이틀에 한 번씩은 도시락 반찬으로 싸간다. 어디 가서 먹어봐도 이 집 고기가 최고라는 가족의 평에 힘이 난다.

손님 중 70%가 단골이다. “기름 하나!” “살 하나!” 이 집 단골만의 주문법이다. 비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손님의 취향에 맞춰주고 있다. 오랜 세월 자주 오는 손님은 주문이 필요 없다. 얼굴만 봐도 늘 먹던 메뉴를 기억하기에 가게 입구 세면장에서 손을 씻는 동안 밥상을 차려놓는다. 예전 기사들에게 유명했던 식당의 명성은 이제 일반인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근처 성곽 둘레길에 온 등산객들, 가족 단위 손님들이 늘고 있고 동호회에서 단체로도 많이 온다. 변함없이 맛있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예나 지금이나 맛이 그대로라는 말이 최고죠.”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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