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경북 청송의 우리 집은 종갓집으로 늘 사람들로 붐볐다. 내 어린 기억 속에는 농사일로 그을린 얼굴의 할아버지와, 공직에 계셨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농사일로 바빴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떠오른다. 몹시도 엄하셨던 호랑이 할머니의 시집살이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우리 삼남매를 부족함 없이 키워내셨다. 고된 시집살이로 힘드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삼남매를 품어주신 분이 막내 고모님이다. 내게는 어떤 때는 큰누이와도 같고 어떤 때는 어머니와도 같은 따뜻함으로 표현되는 고모님!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청송을 떠나올 때까지 유년의 추억은 내 인생의 가장 따듯한 시간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나의 소울푸드는 고모와의 추억으로 마음에 아로새겨진 ‘순대’였다.

까마득한 옛날이다. 아마 그날도 여름의 여느 날처럼 나와 형은 동네 형들과 함께 용전천변 모든 민물고기를 모두 다 잡아버리겠다는 호기로움으로 연신 애꿎은 강물을 내리치며 다녔다. 뚝지, 메기, 미꾸라지 등 어떤 놈은 아주 조용히, 어떤 놈은 잽싸게 종류별로 잡는 방법이 다 다르다. 고기 망태기가 3분의 1 정도 채워졌을까. 우리 동네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무신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마구 달려갔다.

까까머리 궁금쟁이 동네 아이들이 잰걸음으로 달려온다. 나는 와중에도 석류를 한 움큼 낚아채어 입안 가득 물고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드디어 울음의 발원지인 우물가에 다다랐다. 저 멀리 마을 어귀까지 들려오던 울음소리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다. 주체할 수 없이 두근두근 뛰어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애처로이 들리는 울음소리를 애써 외면하면서도 괜스레 밀려오는 불안감을 감추고자 형의 뒤꽁무니에 숨어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간신히 반쯤 뜬 흐린 눈빛으로 그곳을 응시했다.

분명 거기에는 어제까지 우리 집 돼지우리의 대장이었던, 작은 우리 속의 절대권력자였던 검둥이(흑돼지의 별명)가 마치 깊은 잠에 든 듯 가로누워 있다. 늘 씩씩하고 건강하게 웃던 이웃집 노총각 형과 서너 명의 건장한 아저씨들은 팔을 걷어붙인 채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다. 그때의 나로서는 절대 짐작할 수도, 아니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있었던 듯하다. 언뜻 붉은 액체 가득한 양동이와 잠이 든 듯 누워 있는 검둥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내 귓가에는 여느 때보다 들뜬 모습의 동네 아낙들의 수다와 걸쭉한 어른들의 말들이 강물처럼 흘러갔으며 나는 멍한 채로 서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더 이상 그 우물가의 모습은 기억을 하지 못한다.

한참이 지났을까. 반나절 전의 그 소란스러움과는 또 다른 시끌벅적함이 온 동네에 넘실댔다. 그날은 바로 고모의 혼례가 있던 날이다. 우리 집 앞마당은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이내 여느 잔칫집처럼 많은 음식과 술과 흥겨움으로 가득하다. 열 살의 나는 맛난 음식 앞에 무장해제한 채 수육이며 전이며 마구 입으로 가져갔다.

어느 순간 내 눈은 얇은 고기가 검붉은 색깔의 내용물을 가득 품은 듯한 둥근 모양의 신기한 음식물을 발견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을 엄지와 검지로 뜨거운 줄도 모르고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그 맛은 여태 먹어 본 음식 중에 으뜸이었다. 그게 바로 순대였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은 지금의 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맛이다. 지금의 주재료인 당면이 아닌 고두밥을 주재료로 만들어졌으며, 파·마늘·고추가 섞인 듯한 맛이었다. 다양한 재료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내는 구수함과 매콤함은 내 10년의 삶 중에서 영혼을 뒤흔들어 놓은 맛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언뜻언뜻 문틈 사이로 보이던 새색시 고모의 고운 얼굴도 잊게 할 만큼 나는 연신 순대라는 것을 먹어치웠다. 그 순간 우리 집 돼지우리의 대장이었던 검둥이를 잃은 슬픔은 온데간데없었고, 고모와의 이별의 슬픔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오로지 입안 가득 품었던 순대의 고소함과 오묘한 맛만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할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의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처음 경험하는 맛난 음식에 푹 빠져 있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우리 막내 고모가 드디어 아침이 되어 윗동네에 있는 시댁으로 신행을 떠났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만 띠며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의 얼굴과 눈빛이었지만 이별을 모르는 형과 나는 해맑은 웃음으로 그렇게 고모를 보냈다. 그러나 오후가 되니 형과 나는 불현듯 고모님이 보고 싶은 마음에 물어물어 고모님의 시댁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고모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찾아간 것 같다. 겨우 찾아가 그 댁의 큰 대문을 열자 이곳 또한 마을 잔치가 벌어져 마당 가득 사람들로 붐볐다.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우리 둘을 지켜보며 어찌 왔는지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코흘리개 우리를 두고 사돈총각들이 왔다며 반가운 얼굴로 황초굴(담뱃잎을 말리던 곳)로 안내를 했다. 그 옛날 잔치가 있는 날은 황초굴에도 멍석을 깔아 손님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초굴에 들어서니 많은 손님들로 붐볐고 이내 작은 교자상 가득 음식을 내어 주셨다. 우리는 그날 분명히 고모를 보고픈 마음에 그곳을 찾았으나, 그 모든 것을 잊고 음식만 배불리 먹고 돌아온 기억만이 남아 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날들을 떠올리면, 마치 어제의 일인 양 눈앞에 펼쳐진다. 그날의 순대 맛은 더욱 또렷해진다. 아마도 그날의 순대는 양동이 가득 담겼던 돼지피와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과 함께 파·마늘 등 갖은 양념들이 잘 버무려져 돼지막창 안에 차곡차곡 채워 장작불에 정성으로 쪄냈을 것이다. 요즘도 그때의 맛이 그리워 소문난 맛집이라는 순댓집은 모두 찾아가 보지만 이내 실망하고 만다. 여름의 무더위가 가시고 처서(處暑)가 되어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를 보노라면,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정겹던 고모의 사랑이 그리워진다.

한동수 청송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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