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치를 참 좋아한다. 맛이 좋아서 좋고, 우리의 삶을 닮은 것 같아 좋다. 나의 김치 사랑은 배추김치, 총각김치, 물김치, 깍두기, 깻잎김치, 갓김치 등 종류도 상관없다. 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맛이 일품이다. 겨울 내내 싱싱할 뿐만 아니라 숙성되는 정도에 따라 모두 제각각의 맛을 내는 매력이 있어 숙성이 되고 나면 또 그 맛에 홀린다. 나는 숙성된 김치에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넣어 끓인 김치찌개를 ‘밥도둑’이라고 부를 만큼 사랑한다.시골 마을 경남 산청에서 나고 자란 나는 김치와 관련된 추억이 유달리 많다. 요즘은 음
난 어려서부터 김치찌개를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매니아다.맛깔스러운 젓갈을 머금은 시골김치가 익어가는 겨울철이 되면 보글보글 끓는 상큼한 김치찌개 생각에 군침이 돌고, 바쁘고 팍팍한 삶에 낭만과 활력을 준다. 김치찌개의 구수한 냄새만으로도 밥 한 공기 거뜬히 비울 수 있다. 충청도 두메산골의 김치찌개는 시골김치에 멸치 또는 밴댕이젓갈 몇 마리 넣고 끓이는 게 고작이었다. 고기는 엄두도 못 냈지만, 그래도 그게 최고!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던 옛 보릿고개 시절, 꽁보리밥에 고추장, 김치 또는 김치찌개로 배를 채우기 급급했던 기억이 새
역시 좋은 냄비보다는 양은냄비가 적격이다. 냄비에 물을 적당량 넣고 가스불을 켠다. 물이 끓을 동안 라면봉지를 뜯고 분말수프를 분리해 놓는다. 물이 끓어도 10여초는 더 끓게 놔두었다가 분말수프를 먼저 넣는다. 차가운 분말수프가 들어가자 냄비 속에 거품이 인다. 잠시 후 수프가 들어간 물은 다시 맹렬하게 끓는다. 라면을 냄비 안에 넣는다. 냄비가 작아 한 번에 안 들어간다. ‘라면을 잘라 넣을 걸.’ 후회가 든다. 젓가락으로 어떻게든지 라면을 냄비 안에 구겨 넣는다. 이제는 면을 쉼 없이 휘저을 차례다. 라면봉지에 남은 부스러기는
정감 가고, 친근하며 오래오래 사랑받는 사람, 가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하는 나는 정말 행복한 가수다. 어디를 가든 관객들의 환호를 받고, 보답으로 더 큰 감동과 신남을 드리려 노력한다. 내가 즐겨 던지는 멘트는 “저와 있을 때 스트레스 풀고 가세요!”이다. 나는 청중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면서, 웃으면서, 뛰면서, 같이 노래하면서 답답했던 속을 텅텅 비워 집에 돌아가길 원한다. 모두가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것을 내가 노래할 때에는 다 내려놓고 가길 원한다. 그곳에 새롭고, 활기차고,
2018년은 호텔 업계에 종사한 지 32년째 되는 해다. 돌아보면 호텔 업계는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월드컵, 2010년 G20정상회담 등의 국가적 행사를 기점으로 엄청난 발전과 성장을 보였다. 또한 2015년 시행된 관광진흥법에 따른 호텔 건축 규제 완화에 따라 호텔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양적 성장을 보였고, 외국인의 경우에도 비즈니스·관광 등을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수가 매년 증가세를 보여왔다. 개발도상국이었던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이 세계인이 찾는 관광지가 되는 과정을 업계 종사자로서 지켜보며
아침에 일어나면 바깥의 찬 기운과 집안의 따뜻한 기운 때문에 생긴 습기로 창문이 뿌옇다. 그래서 햇살이 어슴푸레하다. 겨울이다. 어릴 적 나는 겨울방학만 되면 외할머니댁에 가곤 했다.외할머니는 벌써 일어나 계신다. 방에는 어젯밤 피운 화로에 온기가 여전하다. 일어나야 하는데…. 바닥이 자글자글하니 일어나기가 싫다. 그냥 이렇게 등 붙이고 있고 싶다. 뒹굴뒹굴하며 게으름을 맘껏 부리고 있는데 소리가 들린다. 달그락달그락. 외할머니가 부엌에서 뭔가를 하시나 보다.옷을 덧입고 용기 내 부엌으로 나가 봤다. 큰솥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내 마음의 봄은 화사한 꽃에서 오지 않는다. 봄이 오면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상큼한 벌금자리다. 봄바람과 함께 봄 내음이 풍겨오면 내 가슴과 머릿속엔 벌금자리로 뒤숭숭해진다. 벌금자리를 뜯으러 가야 할 텐데. 입이 먼저 알고 군침이 돈다.벌금자리! 나에겐 그렇게 친숙하고 그리운 이름이, 충청도 사람이 아닌 타지 분들에겐 그저 낯설기만 한 풀 이름인 모양이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벌금자리 얘기를 늘어놔 봤지만 타지 분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아서 좀 맥이 풀리기도 했다. 그 좋은 걸 왜 모를까, 참!이 글을 쓰느라고 인터넷을 뒤져
한국인의 밥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찬(正餐). 굳이 한정식집이 아니라도 어릴 적 할아버지, 아버지의 밥상에 끼여 앉으면 거긴 불고기든 돼지고기볶음이든 고기에 조기나 고등어 같은 생선, 정갈한 나물반찬에 부침, 김구이, 찌개와 국, 김치도 물김치까지 차려지니 어지간한 크기의 밥상은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차려지는 국이나 탕이 중심이 되는 소박한 밥상이다.맏이라는 특권(?)으로 언제나 정찬 밥상에 앉기는 했지만 사실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밥풀 하나
‘나는 왜 오남매의 장남일까.’한창 먹성 좋은 학창 시절, 속으로 원망한 적도 있다. 맛있는 요리가 식탁에 올라오면 동생들과 나눠 먹어야 했다. 아무래도 형이고 오빠인지라 양보는 내 차례였다. 동생들과 벌인 먹거리 신경전 덕일까. 성인이 돼서도 음식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 실은, 주변 지인들도 인정하는 식도락가다.가격 대비 맛있는 집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그러다 보니 ‘맛집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최근엔 홍대앞부터 연남동 일대의 맛집을 탐색 중이다. 몸담고 있는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 사무실이 마포구 서교동
17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대구에 안착한 후 네 번째 맞이했던,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무더운 여름도 다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아침이 하루를 열어줍니다. 높이 올라간 하늘, 서서히 변하고 있는 나뭇잎들의 색깔과 차츰 다정하게 느껴지는 긴소매 옷들에서 기다리던 계절이 왔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맘때가 되면 오히려 별빛이 후두둑 떨어지던 여름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어머니가 주시던 상 위의 음식들이 생생해지는 것은 아마 오래전 이 계절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럴지
된장은 비논리적이고 고추장은 역설적이다. 작가 김훈의 설명에 따르면 된장은 친화력이 커서 다른 재료와 잘 사귄다. 그 사귐의 결과로 얻어진 된장국물의 깊은 맛은 논리적으로 잘 분석되지 않는다.고추장도 친화력이 크다. 이어령 선생이 ‘맛의 교향곡’이라 일컬은 비빔밥은 고추장의 지휘 아래 다양한 재료들이 화음을 이룬다. 빨간 빛깔이 연출하는 맵고도 달콤한 그 맛은 서로 모순적이면서도 조화롭다. 내가 된장보다 고추장에 더 빠져드는 것은 그 역설적인 맛 때문이다.내가 고추장을 사랑하는 방식은 남들이 보기에 ‘비논리적’이다. 라면이나 육개장
8월 말의 게으른 더위가 내장산 산자락에 물안개로 내려앉아 자욱하다. 백양사로 오르는 이른 오후의 길은 한적했다. 물이 분 개천 바닥 이끼 낀 돌 위에 자라 한 마리가, 나오지도 않은 해를 찾아 일광욕 하러 목을 길게 뽑고 있다.콩나물김칫국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20년, 아니 4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에 나와 산 지 벌써 20여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어머니의 고향인 전라도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그 진가를 인정받으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찰음식을 배워 보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와 마주한 아침상은 소박하다. 밀양산 고추를 썰어 넣어 끓인 담백하고 구수한 된장찌개와 여름에 무성한 잎을 따서 간장이나 된장에 박아두었던 들깻잎 장아찌가 내 입맛을 당긴다. 밥맛이 달큰하다. 우리 어머니는 모든 자식이 그러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했으면 바라는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가진 분이다. 경제적으로 부족할 게 없는 친정에서 집안사정이 넉넉지 못한 집안으로 시집오셔서 온갖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는 말수가 적고 포용력이 있는 분이다. 내가 성장할 때 큰소리로 혼을 내거나 매를 든 적이 없으셨다. 그저 뒤편에서 자식이 하
얼마전 친구 상가에 갔다가 우연히 언론사 간부와 합석했다. 이런저런 화제가 오가다가 ‘소울푸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내게 “당신의 소울푸드는 뭔가요?”라고 물었다. 당황하는 내게 상주인 친구가 “정작 소울은 있고?”라고 농을 걸어왔다. 이후 나는 내 소울푸드는 뭘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6·25전쟁 통에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셨다. 서울 토박이인 우리 어머니의 외증조부는 내의원 의원이셨다고 한다. 외증조부는 외할아버지 형제 세 분에게 각각 중국어·일어·영어 교육을 시키셨다니 당시 돈 잘
즐겨 보던 일본의 음식 잡지가 있었다. 식상한 조리법이나 음식점 소개가 아니라 매번 기발한 기획으로 그 기획에 맞는 음식과 음식점을 소개하던 잡지였다. 음식이라는 콘텐츠를 오랜 세월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온 일본다운 저력이 돋보이던 매체였다. 그런데 그 잡지가 경영 악화로 폐간을 맞게 되었다. 잡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특유의 기획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폐간호의 주제는 ‘최후의 만찬’. 편집진은 그동안 제작에 참여한 요리사, 음식평론가, 요리연구가, 사회 저명인사 등에게 “당신이 마지막 한 끼로 먹고 싶은 음식과 그 음식을 먹기 위해
2004년 6월, 첫 펜화 전시를 서울 인사동 학고재 3개 층 전관에서 열었다. 작품을 돌아보고 “작가 생활 중에 일반인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채식을 합니다만 왜 물어보십니까?” 하니 “그림에서 무언가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를 연구하신다는 분들은 그림 속의 절, 바위, 산에서 강한 기가 나온다고 했다. 합천 영암사 그림에서는 배경인 황매산 기가 강하게 나오니 팔지 말고 공부하는 자녀의 방에 걸어주면 좋은 학교에 진학할 것이라는 황당한 말도 들었다. 반신반
나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경기도 광주 분원초등학교를 다녔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삶은 매우 곤궁했다.그러나 나의 조부께서는 농사를 크게 지어 다른 사람들보다는 여유 있게 살고 있었다. 분원은 조선백자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 분원 사람들은 경안천과 한강 사이의 너른 벌판에서 벼농사와 함께 무·배추를 재배해 주로 서울에 내다팔며 생계를 꾸렸다. 1970년대 팔당댐 건설로 인해 지금은 농경지 전체가 수몰되어 호수(팔당호)로 바뀌었고 분원 마을은 호수변 마을로 변해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
봉골레(Vongole)는 조개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조개 국물로 만들어내는 소스와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인상적인 봉골레 파스타는 이탈리아에서 인기 있는 파스타 중 하나다. 이탈리아에서도 해안지역인 베네치아 지방에서 유명한 봉골레 파스타는 백합, 바지락, 모시조개 등 바다에서 채취되는 다양한 조개를 이용하여 만든다. 나는 봉골레 파스타를 먹으면서 내 고향 군산과 바다를 생각한다.나는 여러 가지의 공직을 거친 후에 지금은 고향의 조그만 사립 전문대학의 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나의 가족과 살림집은 서울에 있으므로, 주말에는 서울에
난 어린 시절 한때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해외로 출장을 가시고 집에 안 계시면 집에는 여자뿐이었다. 어머니, 사촌누나, 여동생, 도우미 누나가 있었는데 엄마도 직장에 나가셨기 때문에 방과후에는 주로 사촌누나와 친하게 지냈다. 나이 차가 많이 났던 누나는 나를 끔찍이도 예뻐해줬는데 남자친구를 만날 때도 날 데리고 나갈 정도였다. 상당히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누나가 다방에 가도, 야구장에 가도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듣지도 않고 무조건 조용히 따라다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누나랑 같이 있는 게 좋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 영등포입니다. 하지만 주로 성장한 곳은 인천입니다. 인천에서도 자유공원 남쪽 기슭입니다. 부모님이 황해도에서 피란 나와 고향 사람들 곁으로 찾아온 곳이 바로 중국인 마을 차이나타운과 가장 가까운 동네인 해안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짜장면, 우동, 만두, 찐빵, 공갈빵 등의 중국 음식에 익숙했습니다. 우리 집 길 건너편에는 왕씨 성을 가진 중국인이 운영하는 ‘태화관’이 있었습니다. 벽에는 중화민국 국기와 우리나라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고 그 밑에는 장제스 총통과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사이좋게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