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앤서니 기든스. (우) ‘제3의 길’ 초판
(좌) 앤서니 기든스. (우) ‘제3의 길’ 초판

“경제 관리 이론으로서 사회주의의 사망과 함께 좌·우파를 나누는 중요한 구분선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대신할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남은 논쟁은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관리하고 규제하느냐이다.”(‘제3의 길’ 제2장)

이러한 시대적 화두에 천착하여 매우 인상적인 해법을 제시한 문제작이 있다. 바로 앤서니 기든스(79)의 ‘제3의 길:사회민주주의의 쇄신’(The Third Way: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1998)이다. ‘제3의 길’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등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제3의 길’이란, 기든스가 구상한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에 관한 방향을 가리킨다.

기든스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사회이론가이다. 무엇보다 그는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1994)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시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그의 견해에 동조한 토니 블레어의 고문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1997년 블레어의 노동당은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집권에 성공했다. 이 책은 기든스가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후 20~30년 동안 서구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복지정책 등을 통해 자본주의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했다. 당시 산업사회는 분명한 성별 역할분담, 견고한 가족구조, 동질적 노동시장, 대량생산 체제, 광범위한 노동자 계급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사회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두꺼운 노동자 계급을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그러한 사회적 특성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노동자 계급도 예전처럼 동질적이고 강고하지 않다. 더구나 정통사회주의의 몰락은 불가피하게 그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인 사회민주주의에도 타격을 주었다. 특히 사회주의적 방식의 비효율성이 도마에 올랐다. 실제로 그동안 구축된 서구의 복지국가 모델도 상당한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방식만 고집한다면 사회민주주의의 집권은 매우 난망한 노릇이다.

이러한 틈새를 비집고 거센 기세로 등장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이것은 시장의 기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복지를 최소화하자는 입장이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대표적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국경 없는 시장을 표방하며 세계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심화 등 곳곳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제1의 길)와 신자유주의(제2의 길)는 모두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나 기든스는 평등과 정의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을 통해 새로운 방식(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구식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어야 한다.

기든스는 “구좌파는 변화에 저항하였다. 신우파는 변화를 관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변화를 관리하여 사회적 연대와 번영을 (동시에) 창출해야 한다”라고 천명한다. 이를 위해 사회민주주의도 시장의 기능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성장과 복지를 균형 있게 추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세계화도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인 상황에서 극단적인 좌우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거듭 역설한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양자의 평균적 절충을 추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회민주주의나 신자유주의의 평등관을 모두 비판하며 평등을 새롭게 정의한다. 그는 평등을 ‘포용’으로, 불평등을 ‘배제’로 규정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모두를 껴안는 ‘포용적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포용으로서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그는 ‘적극적 복지’ ‘제한적 능력의 지배’ ‘사회투자국가’ 등을 제안한다.

복지야말로 우파와 좌파가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지점이다. 그는 분배적 복지를 지향하는 하향식 복지국가가 도덕적 해이를 유발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이에 대한 그의 대안이 바로 ‘적극적 복지’ 모델이다. 이것은 ‘재화의 재분배’가 아니라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한 ‘가능성의 재분배’를 겨냥한다. 달리 말해 ‘일방적 수혜’보다 ‘사회적응력의 확대’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적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여기에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이나 NGO의 적극적 협력과 참여도 필요하다. 바로 이런 투자가 활발히 행해지는 나라가 ‘사회투자국가’인 것이다. 교육 등을 통해 누구나 일자리를 갖고 그 안에서 각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한적 능력의 지배’는 불가피하다.

이처럼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하는 평등이나 사회정의를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율성이나 효율성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려고 한다. 즉 시장의 효율성을 활용하되 그것이 평등이나 정의를 벗어나지 않도록 양자의 조화를 추구하는 전략이다. 그의 의도는 ‘책임 없는 권리 없다’는 그의 주장에 잘 드러나 있다. ‘제3의 길’은 한때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지침으로 각광받았다. 실제로 토니 블레어가 이 깃발을 들고 장기간 집권에 성공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제3의 길’은 기든스의 현대사회이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전통적 산업사회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후기 현대’ 또는 ‘성찰적 현대’)가 도래하고 있는 바, 그러한 시대적 변화에 맞춰 정치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이론에 바탕을 두었다고 해도 ‘제3의 길’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담론이다. 더구나 좌와 우를 아우르는 중도좌파노선이다. 좌우로부터 다양한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설사 공허할지라도 선명한 주장이 논쟁에서 유리하다. 이것이 어디서나 극단론이 득세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제3의 길’은 온갖 비판을 감내하며 상대방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독트린에 대해서도 치열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체계적인 중도노선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사회적 갈등 지수가 가장 높다. 정치도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제대로 된 중도노선일지 모른다.

대통령선거 캠페인이 벌써 중반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관된 집권 비전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잡다한 공약들이 당일치기로 급조되어 쏟아지는 느낌이다. 우리 대통령들의 연속적인 실패의 원인으로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가 회자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질적인 병폐가 바로 ‘준비 없는’ 집권이다. 그런 점에서 ‘제3의 길’은 여전히 우리가 눈길을 떼기 어려운 타산지석(他山之石)인 것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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