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는 지난 2000여년 동안 유교가 정통사상으로 군림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과 학문이 이단(異端)으로 몰려 배척되고 말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한비(韓非·BC 280~233)의 법가사상이다. 그의 생각은 ‘한비자(韓非子)’에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무엇보다 ‘한비자’라는 책명부터 논쟁적이다. 흔히 유명인에게는 성씨에 자(子)를 붙였는데 ‘자’는 ‘선생’이란 뜻이다. 또한 이것을 그 사람의 책명으로 삼기도 했다. 한비의 책도 처음에는 ‘한자’라고 불렸다. 하지만 송나라 때 유학자 ‘한유(韓愈)’가 ‘한자’라고 불리면서 그의
시중에는 ‘아빠의 무관심’이 자식을 잘 키우는 비결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빠는 잠자코 돈이나 잘 벌어오고 엄마가 좋은 사교육을 수소문하여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아버지들은 자녀교육에 관해 대부분 부재(不在) 상태이다.이러한 부재는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버지가 집을 떠나 부재한 상태에서 자식이 스스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고색창연한 고전이 있다. 바로 호메로스(Homeros)의 ‘오디세이아(Odysseia)’이다. 이 시가(詩歌)는 수백 년 동안 구전(口傳)되다가 기원전 8세기
“기술에 의해 그 종류의 일반적인 것 이상으로 크게 하든가… 반대로 작게 하든가 발달을 멈추게 할 수도 있소. 또한 보통 종류 이상으로 다산하도록 하거나, 반대로 출산을 억제하여 늘지 않도록 하기도 하오. 또 색깔이나 형태나 활동이나 그밖의 것을 갖가지로 다르게 변화시키기도 하오.”오늘날 이런 이야기는 진부하게 들린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년 전에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다. 그는 사후에 발간된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1
누구나 행복한 삶을 욕망한다. 하지만 정작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선뜻 답을 하기 쉽지 않다. 일찍이 이 곤란한 문제에 끈질기게 천착한 고전 중의 고전이 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ka Nikomacheia)’이다. 니코마코스는 그의 아들이다. 이 책은 그가 아버지의 강의 자료를 정리해 펴낸 것이라고 추측된다.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의사(醫師) 가문 출신이다. 이로 인해 그는 플라톤의 수제자임에도 플라톤 사후 아카데미아의 책임자가 되지 못했다. 한때 그는 고국으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는 기아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제 배를 주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비만을 걱정하며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도 한층 평온하고 안전해야 마땅하다.그러나 우리는 평안은커녕 점점 불안에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 현실을 꿰뚫어보며, 우리 시대의 ‘풍요 속의 불안’을 명쾌하게 분석한 고전이 있다. 바로 울리히 벡(1944~2015)의 ‘위험사회’(Riskogesellschaft·1986)이다. 이 책은 현대의 특징을 ‘위험(risk)’으로 포착하며, 그것이 산업
인간은 고도의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그에 대한 답, 즉 진리를 갈구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결국 인생이란 ‘나’를 찾아 헤매는 구도(求道) 여행인 것이다.이 기나긴 여행은 결코 순탄치 않다. 주저앉고 넘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온갖 좌절을 훌훌 털고 우뚝 일어선 감동적인 경우도 어쩌다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그는 그의 굴곡진 삶을 ‘고백록(Confessiones)’에 오
정치는 오랫동안 철학이나 종교가 제시하는 도덕을 실행하는 하위 분야로 여겨졌다. 하지만 도덕은 욕망의 통제를 지향하고, 정치는 욕망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가 외면된 탓에 정치는 도덕의 옷자락 속에서 위선적으로 왜곡되기 일쑤였다. 더구나 정치의 기능이 점점 확대되면서 그러한 왜곡도 더욱 심화되었다.르네상스에 이르러 드디어 모든 분야에서 중세의 질곡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정치를 도덕과 종교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도발적인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
차량번호를 보면 차적지(車籍地)를 알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강남구에 몰려가 차량을 등록했다. 비록 자신은 강남구에 살지 못할망정 차량만이라도 강남구 차로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런 행동이 개인의 유별난 취향(taste)이라고 혀를 찬다.하지만 그런 행태가 결코 개인적인 발로가 아니라 사회적 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인상적인 고전이 있다. 바로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1979)이다. 이 책은 개인적 취향이 사회적으로 결정되며 이를 통해 사회적 구별짓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체제유지이다. 물론 어느 나라든 국체가 유지돼야 국민의 행복도 보장된다. 하지만 그들의 체제가 인민의 행복을 책임질 수 없다는 점은 이미 밝혀진 바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체제 유지 그 자체를 위해 그런 가공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직면하여 저절로 눈길이 가는 고전적 소설이 있다. 바로 조지 오웰(1903~1950)의 ‘1984년’(Nineteen Eighty-Four·1949)이다. 이 소설은 당 중앙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 전체주의 사회의 종말적 양상을 그리고
우리는 오래전에 민주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없는 민주화 상태가 무작정 지속되고 있다. 요즘은 아예 정부가 나서서 촛불 민주주의를 독려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민주화를 과식하면서도 정작 민주주의는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기형적 현실에 대해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묵직한 고전이 있다. 바로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의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mocratie en Amrique·제1권 1835, 제2권 1840)이다. 이 책은 당시 미국에서 전개되던 민주주의의 양상을 주의깊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한다. 하지만 선악이 분별되지 않아 그러는 경우는 드물다. 거의 대부분은 선과 악을 확실히 분별한 경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악(惡)이 우리 내면에 얼마나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내면의 취약성을 인상적으로 파헤친 고전적 근대소설이 있다. 바로 로버트 스티븐슨(1850~1894)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이다. 오늘날 ‘지킬과 하이드’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나라 보수는 풍요로운 경제를 건설하고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나간 좋은 시절(old good days)만 되뇌며 진화의 수고로움을 회피했다. 어떠한 생명체든 진화를 멈추면 도태(淘汰)로 내몰린다. 이것이 오늘날 보수가 자초한 현실이다.보수가 회생하려면 무엇보다 ‘나는 누구인가’에 천착해야 한다. 보수의 뿌리는 무엇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 공과(功過)는 무엇이며, 앞으로는 어떻게 갱신되어야 할까? 이 일련의 심각한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답을 모색하는 것이 보수혁신의 단초이다. 이를 통해 한
광복절이다. 수많은 애국열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의 숭고한 삶이야말로 길이길이 후대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이런 상념에 잠겨 무심코 포털 검색창에 ‘존경하는 인물’을 넣어 보니 ‘면접 존경하는 인물’ ‘자소서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이제는 면접을 보고 자소서를 쓰기 위해 ‘존경하는 인물’을 고르는 세상이 된 것이다.더구나 애국열사들은 면접이나 자소서에 적합한 인물로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죄송함이 간절한 분이 바로 백범 김구(金九·1876~1949)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휴가철이다. 누구나 여행에 대한 기대로 설렌다. 평소 우리는 일상을 통째로 바꾸기는 어렵더라도 여행쯤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돌연 강제로 여행에 나서야 하는 경우도 있다.조선 초 제주도에서 급히 뭍으로 향하던 관리가 악천후로 표류하게 된다. 그는 순식간에 뜻밖의 여행으로 내몰렸다가, 꼬박 다섯 달 동안 바다와 대륙을 떠돈다. 귀향한 그는 왕명에 따라 그간의 사정을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한다. 그것이 바로 최부(崔溥·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1488)이다. 그가 실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가들은 단일한 언어와 문화, 통일국가, 중앙집권적 관료지배 체제 등을 확립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투쟁을 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러한 것들을 거의 완전하게 갖추어왔다. 외견상 정치적 선진화에 한층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그럼에도 현실은 전혀 달랐다. 한국 정치는 광복 이후 (적어도 이 책의 출간 시점까지) 발전은커녕 순간순간 퇴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순적 현실을 주목하며, 한국 정치의 구조적 취약성을 날카롭게 꿰뚫어본 고전적 저작이 있다. 바로 그레고리 핸더슨(1922~1988)의 ‘소용돌이의 한
부자와 권력자와 악당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죽음을 앞두고 대부분 구원을 찾는다. 이처럼 유한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원한 구원을 갈망한다. 이런 까닭에 구원은 수많은 예술작품의 공통적 모티브이기도 하다.이러한 구원의 주제를 가장 치열하게 탐구한 작품은 단연코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Faust)’이다. 본래 파우스트는 15~16세기 독일 남부지역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우주의 신비를 깨닫고 최고의 향락을 맛보려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지만, 끝내 진
정권이 바뀌자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이 없던 일로 되었다. 그 대신 엉뚱하게도 고대사(古代史)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왕조시대에는 역사 문제로 종종 유혈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역사가 단순히 과거지사가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이러한 역사의 현재적 본질을 꿰뚫어본 유명한 고전이 있다. 바로 에드워드 해럿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1961)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역사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따져본 역사 이론서이다. 특히 저자는 1970~1980년대에 대학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문명은 우리에게 바르고 의롭게 살도록 권면한다. 특히 동양의 유교는 선량한 내면뿐만 아니라,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는 표출 방식까지 일일이 규율한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인(仁)과 예(禮)가 더불어 강조되는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유교 사회에 ‘얼굴이 두껍고 마음이 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제작이 등장하여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중국 청나라 말 리쭝우(李宗吾·1879~1944)의 ‘후흑학(厚黑學)’이다. 그는 1912년 무렵부터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후흑’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핵심적 내용을 소개한
오늘날 서구문명은 두 사람이 비극적으로 죽은 자리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바로 소크라테스와 예수이다. 예수는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겸비한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한낱 인간일 따름이다. 그는 왜 구명을 거부하고 한사코 죽음을 선택했을까.기원전 399년 어느 날 노(老)철학자가 피고의 신분으로 고대 아테네 법정에 소환된다. 20대 후반의 젊은 제자가 사형으로 결말이 나는 스승의 재판을 비통하게 지켜본다. 나중에 그는 스승이 법정에서 배심원들을 상대로
우리는 치열한 민주화 과정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이제 우리를 짓누르던 권력의 억압은 대부분 소멸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상 유례가 드물 정도로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다. 오늘날 누구도 이처럼 평안한 현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그러나 권력의 횡포보다 민주주의가 오히려 자유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기념비적 고전이 있다. 바로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자유론’(On Liberty·1859)이다. 이 책은 ‘자유’에 대해 최초로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오늘날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