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62호]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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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을 찾아 떠나는 고전 여행]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pcsun21@daum.net 

▲ (좌) 에드워드 해럿 카 (우) ‘역사란 무엇인가’ 초판 표지
정권이 바뀌자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이 없던 일로 되었다. 그 대신 엉뚱하게도 고대사(古代史)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왕조시대에는 역사 문제로 종종 유혈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역사가 단순히 과거지사가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의 현재적 본질을 꿰뚫어본 유명한 고전이 있다. 바로 에드워드 해럿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1961)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역사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따져본 역사 이론서이다. 특히 저자는 1970~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에게 ‘E. H. 카’라는 애칭으로 친숙하다.
   
   카는 영국의 외교관이자,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다. 그는 오랫동안 소련통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나중에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사’ 등을 저술한 소련 현대사의 대가가 되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의 저작 가운데 거의 유일한 이론서이다. 이것은 1961년 1월부터 3월에 걸쳐 그의 역사관을 격정적으로 토로한 일련의 공개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잘 알다시피 19세기는 이성과 진보의 시대였다. 그러한 신념이 20세기로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전쟁, 혁명, 대공황, 냉전 등이 발발하여 낙관론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역사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회의주의와 패배주의가 팽배한 나머지, 역사학은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바로 이때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역사는 ‘사실(fact)’을 다룬다. 더 정확히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史實)’을 재료로 삼는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논하려면 ‘사실이란 무엇인가’를 피해 갈 수가 없다. 이 물음에 대한 고답적(高踏的)인 응답이 바로 랑케(1795~1886)의 실증주의이다. 실증주의는 경험주의적 사조에 힘입어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분리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그대로(as it actually happened)’를 표방한다.
   
   그러나 카는 인식상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부정하며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통렬히 비판한다. 루비콘강을 건넌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역사가들은 시저(Caesar)의 도강(渡江)만을 의미 있게 평가한다. 이처럼 과거에 관한 사실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중에서 역사가가 평가하고 선택한 것만 역사적 사실이 된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허락해야 비로소 말하게 된다는 것이 카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역사가가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또한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 차곡차곡 구성된다. 이런 과정은 또한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양자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부단한 상호작용 속에 있는 것이다.
   
   역사가도 개인적으로는 결코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사회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이로 인해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곧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 이해되고, 동시에 현재는 과거에 비추어 좀더 분명히 이해된다. 이를 통해 역사는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켜 준다.
   
   카는 무엇보다 역사가 ‘왜’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가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과학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가는 어떤 사건을 우연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유발한 원인들을 나열만 해서도 곤란하다. 궁극적인 원인을 규명하거나 적어도 그것들의 위계 구조를 제시해야 한다. 역사가는 사실의 바다에서 중요한 것을 선택하듯이, 무수한 인과적 전후 관계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추출해내야 한다.
   
   역사학은 결코 어떤 완성된 체계를 추구하는 정태적(static)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다루는 동태적(dynamic) 학문이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실천적 학문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할 때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상상적인 분할선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역사에서 ‘왜’라는 물음은 불가피하게 ‘어디로’로, 즉 미래로 이어진다. 이때 그는 미래를 진보적으로 전망한다.
   
   그는 당시 영국 지식인들의 회의주의를 질타하며 영국에 ‘회의(懷疑)’는 다른 지역, 특히 식민지에는 ‘진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진보가 모든 사람, 모든 지역에 똑같고 동시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그는 냉전으로 말미암아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왜곡됐다고 주장하며, 무려 30여년에 걸쳐 ‘소비에트 러시아사’라는 필생의 대작을 집필하기도 한다. 그는 진보가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과학적 가설’이라고까지 역설한다.
   
   하지만 그가 진보를 필연적이라고 이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 진보는 우리가 이성의 확대를 통해 가꿔나가야 하는 과제이다. 지난 400년간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더 철저하게’ 변화해왔다는 점을 들어 앞으로도 진보는 의심할 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가 믿은 것은 진보의 필연성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이성적 잠재력인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무기력에 빠졌던 서구의 역사학계, 나아가 지성계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지적으로 방황하던 1970~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에도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특히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명제는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의 적극적인 역사 인식은 이른바 운동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의 역사론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과연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가능할까. 어차피 과거인과의 대화는 불가능한 만큼 그것은 일방적 대화일 수밖에 없다. 과연 역사학이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과학이어야만 할까. 오늘날에는 인간 생활을 다면적으로 조명해주는 역사의 문학적 구성도 주목되고 있다. 과연 역사는 진보만 할까. 자연에 대한 정복이 과도한 시대를 맞아 역사는 언제 재앙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통해 우리에게 여전히 강렬한 역사의식을 제공한다. 역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가가 자의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사실과 역사가의 대화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로든지 건강한 대화가 멈추는 순간, 역사는 생명력을 잃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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