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괴테. / ‘파우스트’ 1부(초판). / ‘욥’(레옹 보나 작)
(왼쪽부터) 괴테. / ‘파우스트’ 1부(초판). / ‘욥’(레옹 보나 작)

부자와 권력자와 악당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죽음을 앞두고 대부분 구원을 찾는다. 이처럼 유한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원한 구원을 갈망한다. 이런 까닭에 구원은 수많은 예술작품의 공통적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원의 주제를 가장 치열하게 탐구한 작품은 단연코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Faust)’이다. 본래 파우스트는 15~16세기 독일 남부지역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우주의 신비를 깨닫고 최고의 향락을 맛보려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지만, 끝내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한 채 악마에게 이끌려 지옥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민담, 소설, 유랑극, 인형극 등을 통해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되었다. 괴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 전승(傳承)은 오늘날에도 소설, 연극, 미술, 음악, 영화, 심지어 컴퓨터게임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각색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중에 으뜸인 것은 역시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파우스트’는 1·2부로 구성된 장편 희곡이다. 괴테는 20대 초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59세가 되어서야 1부를 출간한다. 66세부터 2부를 쓰기 시작하여 죽기 한 해 전(81세)에 탈고한다. 물론 2부는 그의 사후에야 출간된다. 이를 통해 그가 평생 동안 얼마나 구원의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했는지 알 수 있다.

‘파우스트’는 천상(天上)에서 시작된다. 주님과 악마는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존재인가를 놓고 내기를 한다. 악마는 인간이 동물과 다름없다며, “그 녀석(파우스트)을 내 길로 끌어들이겠다”고 호언한다. 주님은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 마음대로 해보라”고 허락하며, “인간은 노력하는 동안엔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지상으로 내려온 악마는 아무리 공부하고 즐겨도 만족하지 못하는 노(老)학자 파우스트에게 접근하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내가 당신의 종노릇을 할 테니 저세상에서는 당신이 내 종이 되어 달라”고 제안한다. 파우스트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이 “멈추어라, 너는 아름답다”라고 외치는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약속한다.

악마는 파우스트를 젊게 만들어 어느 순진한 처녀에게 접근시킨다. 그는 결국 그녀와 가족을 파탄에 몰아넣는다. 악마의 도움으로 그는 어느 왕의 신임을 얻어 부귀도 누리고, 그리스 시대로 되돌아가 헬레나와 살아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세로 돌아온 그는 악마가 제안한 권력과 화려함을 거절한다. 그 대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간척사업에 몰두한다.

이때 파우스트는 외친다. “멈추어라, 너는 아름답다!” 실제로는 악마에게 속은 것이지만, 그는 온갖 방황 끝에 진정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순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파우스트가 쓰러져 죽자, 악마는 그의 영혼을 취하려고 한다. 그러자 천상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그의 영혼을 데리고 올라간다. 주님은 ‘노력하는 동안엔 방황한’ 그에게 구원을 베푼 것이다.

‘파우스트’를 읽다 보면 저절로 ‘욥기(The Book of Job)’가 떠오른다. 잘 알다시피, 성서는 6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단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 ‘단 하나’가 바로 ‘욥기’이다. 이것은 ‘동방’의 현자인 욥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이 ‘욥기’의 값어치를 웅변해준다.

욥은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이다. 그런데 천상에서 악마는 “주님이 내린 복 때문에 욥이 신실할 뿐”이라고 고발한다. 이러한 기복적(祈福的) 태도는 독신(瀆神)이다. 주님이 “그를 너에게 맡겨 보겠다”고 허락하자, 악마는 욥의 재산을 빼앗고 자식들을 죽이고 그의 온몸을 종기 투성이로 만든다. 욥은 옹기 파편으로 몸을 긁으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욥의 세 친구가 위로차 방문하지만, 이내 욥과 그들 간에 장황한 설전이 벌어진다. 친구들은 “잘못이 있어 벌을 받았으니 용서를 구하라”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호소한다. 그런 논쟁 와중에도 욥의 마음은 오로지 주님을 향한다. 그는 온갖 불평을 늘어놓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그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주님이 등장한다. 실제로는 음성만 들린다. 자신의 억울함을 따져 보겠다고 단단히 벼르던 욥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두려움에 전율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희열의 전율이다. 그가 진실로 두려워한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소외였는데, 지금 주님이 그에게 임재해 있다. 이 자체로 이미 소외가 해소되고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주님은 애초부터 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욥의 ‘변함 없는’ 믿음을 통해 악마를 규탄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했다. 실제로 욥은 악마의 시험을 견뎌내며, 주님을 등지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더욱 매달렸다. 이러한 시련의 과정을 거치며 그의 믿음은 더욱 단단해지고, 마침내 커다란 구원에 이른다.

이처럼 ‘파우스트’와 ‘욥기’는 구성이나 내용이 상당히 유사하다. 두 이야기는 천상에서 주님과 악마가 ‘내기’를 하며 시작된다. 그것은 인간이 결코 알 수가 없는 영역이다. 인간은 그저 악마가 개입한 모순적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비극적 존재이다. 이렇듯 이 세상이 기계적으로 완전하지 않지만,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많든 적든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욥기’는 당연히 기독교적 구원의 정수를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주님에게 긴밀하게 의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욥기’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형식론적 신학을 거부하며, 우리에게 ‘의인의 고통’이라는 심오한 신학적 화두를 던진다. 거기에는 반드시 각별한 뜻이 담겨 있다.

반면, ‘파우스트’는 주님과 악마와 인간을 다소 느슨한 관계로 본다. 인간 역시 자신의 의지로 무엇이든 성취하려고 한다. 그는 주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때로는 주저없이 악마와도 손을 잡는다. 그것이 바로 ‘계몽된’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인간이 암흑의 충동에 쫓기더라도 결코 올바른 길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인내한다.

엄격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파우스트는 구원받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파우스트 작가들은 그를 지옥으로 보낸다. 하지만 괴테는 그의 영혼을 하늘로 올려 보낸다.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와 ‘욥기’는 인간의 구원이 천상의 몫이라고 입을 모은다. 어느 경우든 인간은 진인사(盡人事)하고 나서 대천명(待天命)하는 존재일 따름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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