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70호]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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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을 찾아 떠나는 고전 여행] 백범일지

나는 나라를 위해 밤을 새운 적이 있는가?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pcsun21@daum.net 

▲ (왼쪽부터) 백범 김구. ‘백범일지’ 초판 표지. ‘백범일지’ 친필본(보물 제1245호).
광복절이다. 수많은 애국열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의 숭고한 삶이야말로 길이길이 후대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이런 상념에 잠겨 무심코 포털 검색창에 ‘존경하는 인물’을 넣어 보니 ‘면접 존경하는 인물’ ‘자소서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이제는 면접을 보고 자소서를 쓰기 위해 ‘존경하는 인물’을 고르는 세상이 된 것이다.
   
   더구나 애국열사들은 면접이나 자소서에 적합한 인물로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죄송함이 간절한 분이 바로 백범 김구(金九·1876~1949)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은 그가 직접 쓴 ‘백범일지’(白凡逸志·1947)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침 올해가 ‘백범일지’ 출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逸)’은 ‘잃다’ ‘없어지다’라는 뜻이고, ‘지(志)’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백범일지’란 그냥 놔두면 사라져버릴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갈무리한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것이 자식과 겨레에 남기는 ‘유서(遺書)’라고 말한다.
   
   백범은 황해도 해주 산골에서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가의 세도에 눌려 살았다. 그는 공부하여 양반이 되기를 열망했으나 가난과 아버지의 병환으로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17세 때 어렵사리 해주에서 실시된 과거 시험장에 나가 보았으나 현장에서 목격한 타락상에 환멸을 느꼈다.
   
   이듬해 그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감복하여 동학에 입교했다. 그에게 상놈 출신의 지원자가 몰려들어 그는 ‘아기접주’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최시형 선생을 친견하고 돌아온 그는 7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봉기했다. 19세 때의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동학 봉기는 금세 수세에 몰렸다. 그는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의 보호를 받고 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때 그는 ‘사냥에 열중’인 안중근을 보았으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던 듯하다.
   
   마침 명성황후시해사건(1895)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듬해(21세) 그는 평안도 용강의 한 포구에서 한복을 입었지만 옷 속에 일본도를 감춘 일본인과 조우했다. 그는 다짜고짜 그자를 넘어뜨려 칼을 빼앗아 난자해 죽였다. 현장에 이름 석 자와 주소를 써서 붙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석 달 후 체포되어 인천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일본인은 나중에 일본군 장교로 밝혀졌다.
   
   당시 외국인 상대 범죄를 다루던 특별재판소가 인천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취조하는 관리들에게 오히려 호통을 쳤다. 삽시간에 ‘중전마마의 복수를 위해 왜놈을 때려 죽인’ 의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감옥 안팎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람들이 음식을 싸들고 그를 면회하려고 줄을 설 정도였다.
   
   고종의 특별지시로 다행히 즉각적 사형은 면했다.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1898년(23세) 탈옥하여 충청도, 전라도 등으로 피신했다. 길벗의 권유로 공주 마곡사에 들렀다가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머리를 깎았다. 하지만 이듬해 환속과 더불어 5년간의 유랑을 마치고 귀향했다. 그는 감옥에서 신서적 등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고 ‘문명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교육에 앞장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마침내 일본은 을사늑약(1905)을 통해 조선의 치안까지 장악했다. 저들은 안명근 사건(1910)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붙잡아다 매질을 했다. 그는 차라리 맨몸으로 맞겠다며 아예 옷을 벗어 젖혔다. 모진 고문으로 실신했다가 깨어나기를 일곱 차례나 반복했다. 그는 5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출소 후 그는 일제 감시 속에 고향에 머물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감시망을 피해 곧바로 상하이로 달려갔다. 임시정부는 문지기를 자청한 그에게 경무국장직을 주었다. 임시정부는 사상 대립으로 표류하였다. 백범도 인고의 나날을 보냈다. 상하이로 가족이 와서 둘째 아들도 태어났으나 아내는 병마로 죽고 가족은 가난에 시달렸다. 어머니가 쓰레기더미를 뒤져 반찬을 만들었다. 결국 어머니와 두 아들이 귀국하고 혼자 남았다.
   
   그는 떠밀리듯 1926년 임시정부 수반에 취임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기획했다. 그들의 거사로 독립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고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압박으로 부득이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 중국인의 배려로 ‘13년 만에’ 처음으로 상하이를 벗어나 근교에 숨어 살았다.
   
   일제는 세력을 팽창했고 중국의 국공(國共) 대립은 격화되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독립운동가 가솔을 이끌고 난징, 창사, 광저우, 충칭으로 옮겨갔다. 그 와중에 동포로부터 피격되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고 어머니와 큰아들을 잃기도 했다. 그는 장제스와 미군의 협조를 이끌어내고, 이범석을 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조직했다. 장준하, 김준엽 등 젊은이들의 합류로 열기도 상당히 고조되었다. 그는 곧 광복군 선발대를 국내로 침투시키려고 했다.
   
   이때 별안간 일제의 항복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에게 이것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광복군의 참전 준비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더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라고 통보했다. 결국 1945년 11월 그는 부득이 ‘개인’ 김구로 귀국했다. 그럼에도 동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백범은 불굴의 항일애국투사이다. 그는 스물한 살 때 일본군 장교를 때려 죽이고 반백 년 동안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우직스럽게 돌진했다. 정치 감각이 부족하다는 일부 비평은 그에 대한 찬사이자 또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스물아홉의 맏아들이 폐병으로 죽어가자 며느리(안중근의 조카딸)는 임시정부 수반인 시아버지에게 페니실린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라며 끝내 자식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밤새워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 경찰들을 보고는 ‘나는 저 왜구들처럼 나라를 구하려고 밤새워 일한 적이 있는가’라고 자탄했다. 그때부터 그는 평생 교육사업과 항일투쟁을 통해 자강(自彊)의 의지를 불태웠다. 우리가 자강을 통해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것은 그의 한(恨)이자, 또한 민족의 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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