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오남매의 장남일까.’

한창 먹성 좋은 학창 시절, 속으로 원망한 적도 있다. 맛있는 요리가 식탁에 올라오면 동생들과 나눠 먹어야 했다. 아무래도 형이고 오빠인지라 양보는 내 차례였다. 동생들과 벌인 먹거리 신경전 덕일까. 성인이 돼서도 음식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 실은, 주변 지인들도 인정하는 식도락가다.

가격 대비 맛있는 집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그러다 보니 ‘맛집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최근엔 홍대앞부터 연남동 일대의 맛집을 탐색 중이다. 몸담고 있는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 사무실이 마포구 서교동에 있어서다. 요즘엔 연남동이 맛집으로 ‘핫’한지라 새롭게 알아낸 식당에서 식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닭곰탕 잘하는 집, 우동면이 특히 쫄깃한 집, 돈가스, 생선구이집, 만두, 자장면, 삼겹살, 파스타집, 메뉴도 다양하다.

“동서양 여러 종류의 맛집을 어떻게 그리 많이 아나요?” 지인들이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지금 이 식사는 생에서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대충 먹으면 안 된다. 함께 밥을 먹는 상대에게 저렴하면서 맛있는 식당을 소개하면 즐거운 식사에 대한 기대와 감사로 모두 기분이 좋아진다. 대화도 잘 풀리고 일이 잘된다.”

나는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맛집 얘기가 나오면 바로 메모하고 그 정보를 노트북 파일에 담아두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소울푸드를 잘 만드는 식당은 찾지 못했다. 추억을 담은 수많은 음식들 중 나의 소울푸드는 ‘보르시(Borshch·러시안 수프)’다. 얼마 전 오남매가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가 나왔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보르시를 먹고 싶은데 어디 잘하는 데 없어?”

넷째 동생이 물었다. 그때 알았다. 우리 오남매의 소울푸드는 ‘러시안 수프’였다. 기쁨 반, 그리움 반으로 보르시를 떠올렸다. 넷째 동생은 미국에 오래 거주했다. 그동안은 아무래도 대화 나눌 기회가 없어 잘 몰랐었는데 이번에 귀국을 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 분이었다. 1970년대 초에 ‘러시안 수프’를 집에서 만들어주셨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요리도 배우시고, 영어공부도 계속하셨으며, 수상스키도 배워서 즐기곤 하셨다. 스노보드를 안 배우신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 정도로 계속 무언가를 배우시고 가족의 건강을 챙기시느라 요리법을 늘 연구하셨다. 그 덕분에 여러 가지 요리를 먹어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칠면조 요리도 먹어 보고, 그 당시 식당에서도 먹어 볼 수 없던 팬케이크도 즐겨 먹었다. 집에서 직접 만드신 수제아이스크림은 지금의 ‘하겐다즈’ 아이스크림보다도 더 맛있었던 것 같다. 그 정도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자녀들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매일 토마토를 손수 갈아 주스로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시곤 했다. 갈증만 나면 토마토주스를 마셨던 건강한 미각의 추억도 그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배추와 감자, 당근을 푹 끓여 소고기미트볼을 넣고 토마토케첩으로 국물을 우려낸 어머니표 ‘러시안 수프’는 밥을 말아서 먹어도 좋고, 빵과 먹어도 일품이었다. 그 맛 또한 감동이었다. ‘러시안 수프’를 내놓는다는 러시아 식당이 있는 곳이라면 이태원, 분당 등 가릴 것 없이 몇 군데 다녀 보았다. 하지만 예전 먹었던 그 맛을 찾을 수는 없다. 아마 어머니표 러시안 수프는 약간의 퓨전요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보르시는 우크라이나가 원조라 알려져 있다.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음식이 보르시다. 폴란드에서는 바르슈치라, 루마니아에서는 보르슈라 부른다. 요리법의 종류가 많다. 기본적으로는 야채와 고기를 볶은 다음 육수를 부어 천천히 끓이는 식이다. 돼지고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베이컨을 넣기도 하며 소고기 양지나 사태를 넣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돼지 비계를 넣는다고 한다.

어느 나라의 요리법이든 공통적으로 비트(사탕무)를 꼭 넣는다는 특징이 있다. 먹을 땐 우유로 만든 사워크림을 넣어 먹는다. 비트와 사워크림 때문에 특유의 분홍색 색깔이다. 기본적으론 뜨겁게 먹지만 식혀서 차갑게 먹기도 한다. 중국에도 유사한 요리가 있다. 뤄쑹탕(羅宋湯)이다. 보르시가 국경을 넘어 뤄쑹탕이 된 듯하다.

어머니표 보르시엔 소고기를 다져 만든 미트볼이 들어있었다. 토마토도 썰어 넣어 가족의 건강을 더 챙기신 듯하다. 그 덕분에 오남매들이 아직은 건강하게 지내지 않나 싶다. 젊은 부부들은 자녀들이 어릴 때 잘 챙겨 먹여야 자식이 평생 건강할 수 있다.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엄마, 러시안 수프 너무 맛있었어요. 고맙습니다!!”

다행히 아내가 어머님께 레시피를 배운 기억이 있어 한번 만들어 보겠단다. 그날을 기대해 본다. 머지않은 언젠가 우리 오남매가 모여 어머니표 ‘러시안 수프’를 먹으며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진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님 요리로 인해 평소에는 다 같이 모이기 힘든 오남매들과 뭉칠 수 있으니 이 또한 어머님의 자식 사랑으로 형제들의 우애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시는 모성의 혜안이 아닐까.

역시 소울푸드는 어머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손맛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실력 있는 셰프가 요리를 한다고 해도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가 녹아들어간 사랑의 손맛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오로지 정성만이 들어간 음식을 능가할 수 있을까.

백순진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 이사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