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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1호]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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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음악기행] “건축은 소리로 완성된다” 엘베 필하모니서 만난 바흐

글·사진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 지난해 1월 문을 연 함부르크의 기념비적 음악당 엘베 필하모니 전경.
독일이 경쟁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비해 높은 음악 수준에 도달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17세기 30년전쟁 이래 나라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잘게 쪼개졌던 덕이다. 300개가 넘는 공국이 저마다 궁정악단을 꾸리면서 음악가들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고 서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도제와 일꾼, 장인(마이스터)의 수직적인 시스템이 가장 잘 돌아갔던 나라가 독일이었고, 음악가도 그런 틀을 따랐다.
   
   이런 틀 속에 있던 음악가들의 복잡한 계보를 한번 훑어보자. 1721년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라는 작곡가가 함부르크에 음악감독으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감독이 죽은 라이프치히에서도 텔레만에게 손짓했다. 라이프치히로 가서 채용 조건을 들은 텔레만은 그냥 함부르크에 남기로 했고, 대신 친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그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은 텔레만이 바흐 둘째 아들의 대부가 되어주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라이프치히가 고른 사람은 바흐가 아니라 다름슈타트의 작곡가 그라우프너였다. 하지만 다름슈타트 영주가 자신의 음악가를 놓아주지 않자, 라이프치히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바흐를 택했다. 3순위로 라이프치히에 온 바흐는 27년 동안 활동하다가 1750년 작고했다.
   
   바흐보다 17년을 더 살다간 텔레만. 그가 죽은 뒤 함부르크 음악감독 자리에 지원한 사람은 바로 텔레만의 제자이자 바흐의 둘째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였다.
   
   아들 바흐가 1788년에 세상을 떠나고 한 세대 뒤인 1809년, 펠릭스 멘델스존이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베를린에서 자란 멘델스존은 뒷날 바흐 일가의 거점인 라이프치히로 갔고, 그곳에서 바흐의 음악을 부활시키다가 타계했다. 정작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라이벌이었지만, 뮌헨과 바이로이트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멘델스존을 일찍 떠나보낸 함부르크는 다시 브람스를 낳았고 그는 슈만에게 배우러 뒤셀도르프로 갔다. 슈만이 일찍 타계하자 브람스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도시 빈에 자리를 잡았다. 구스타프 말러는 라이프치히에서 함부르크로, 끝으로 빈에 안착했으니, 두루 시대를 마감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대략적인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지형이다. 프랑스에서는 파리로만 가면 되었고, 이탈리아에서도 대개 밀라노가 종점이었지만, 독일에서는 편력(遍歷)을 쌓지 않으면 마이스터가 될 수 없었다.
   
   함부르크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의 면모를 전시한 박물관이 흥미롭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함부르크도 폭격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브람스 생가도 흔적이 없다. 그런데 뜻있는 사람들이 인근에 집을 얻어 여러 작곡가의 흔적을 하나로 모았다. 박물관에는 아들 바흐가 치던 건반도 있고, 말러가 타던 자전거도 보인다.
   
   앞선 여행지 쾰른에서 함부르크까지는 고속열차로도 4시간이나 걸린다. 부산에서 신의주 정도 될까? 함부르크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함께 유럽 최대의 항구이다. 로테르담이 라인강을 마감한다면 함부르크는 엘베강의 끝이다. 그 하구에 지난해 1월, 기념비적인 음악당 엘베 필하모니가 개관했다.
   
   
▲ 엘베 필하모니에서 열린 연주회.

   부둣가 창고를 재개발한 랜드마크
   
   버려진 부둣가 창고를 어떻게 재개발할지 시민의 뜻을 물은 결과 콘서트홀로 리모델링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당초 예상보다 예산과 공기는 늘었지만 함부르크 시민은 인내했다. 브람스 시대부터 쓰던 음악당 라이스할레가 100년이 넘어 낡았기 때문이다.
   
   기다린 결과 함부르크는 전 세계 음악팬들이 부러워하는 홀을 얻었다. 붉은 벽돌의 옛 창고는 단단한 반석이었고, 그 위에 새로 휘황한 왕관을 얹은 모양새였다. 시내와 바다를 아우르는 탁 트인 전망 덕에 엘베 필하모니는 단박에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실제로 공연 관람객보다 전망대와 라운지 같은 상설 부대시설의 이용객으로 더 많은 수익을 모은다.
   
   나는 이곳에서 두 개의 콘서트를 예약했다. 먼저 일요일 오전에는 쾰른에서 온 악단 콘체르토 쾰른이 현지의 북독일 라디오 합창단과 바흐의 ‘B단조 미사’를 연주했다. 함부르크의 북독일 라디오 합창단은 뮌헨의 바이에른 라디오 합창단, 베를린 라디오 합창단과 더불어 독일의 3대 합창단이다. 곧 세계 최고라는 뜻이다.
   
   일요일 오전에 듣는 미사곡인데 교회가 아닌 세속의 콘서트홀이다. 평일 저녁이었으면 듣지 않았을지 모를 묘한 느낌이다. 신앙심이 깊었던 바흐가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역시 목사였고 바흐 음악에 정통했던 슈바이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슈바이처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각각 바흐의 전기를 썼을 정도로 그의 음악에 정통했고, 오르간 곡도 다수 녹음했다.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기록한 바흐 해석에 대한 견해는 20세기 후반을 뜨겁게 달굴 바로크 당대 스타일의 부활을 예고한다. 슈바이처는 “콘서트홀을 교회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연주회를 일종의 예배로 바꾸어놓는 일”에 몰두했다.
   
   또한 슈바이처는 바흐 시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각각 25명가량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규모가 부풀대로 부푼 20세기 초에 당장 소(小)편성을 적용하기란 무리여서 슈바이처는 바흐 당시보다 두 배의 인원 정도를 적정선으로 제시했다. 100명이 무대에 서는 모습을 이상적이라 보았던 것이다.
   
   
▲ 성 야코비 교회

   ‘대미사’와 ‘콩코드 소나타’
   
   이번 함부르크 공연에는 60명이면 충분했다. 바흐의 ‘미사’가 연주되는 2시간가량 나는 며칠 동안 느꼈던 음악에 대한 갈증을 말끔히 해소했다. 특히 후반부 ‘사도신경’의 한 구절에서 전에 없는 전율을 느꼈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의 다성음악은 신앙이 있고 없고를 떠나, 슈바이처가 바란 콘서트홀의 교회화를 이룬 부분이었다. 건축은 그 공간을 채울 소리로 완성된다.
   
   엘베 필하모니가 개관한 이래 처음 연주된 이날의 바흐 ‘대미사’는 이 곡의 역사적인 공연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것이었다.
   
   이튿날 저녁은 실내악이다. 2018~2019 시즌 엘베 필하모니가 마련한 ‘찰스 아이브스 시리즈’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작곡가 아이브스도 슈바이처와 동년배이다. 프랑스의 정상급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는 아이브스의 ‘콩코드 소나타’를 연주했다. 독일이 얼마나 ‘깊은 나라’인가를 이 한 곡이 함축해 보여준다.
   
   음악의 정식 명칭은 ‘소나타 2번, 1840~1860년의 매사추세츠 콩코드’이며 총 네 악장의 길이가 45분이다. 각 악장의 부제는 ‘에머슨’ ‘호손’ ‘올콧 부녀’ ‘소로’이다. 콩코드에 살았던 선험주의자(또는 초월주의자)들을 그린 초상이다. 이들은 19세기 신흥국이었던 미국이 유럽을 좇기 위한 방법은 초월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에머슨의 강령에 따라 쓴 호손의 ‘큰 바위 얼굴’,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 소로의 ‘월든’이 모두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고, 그 음악적인 결실이 ‘콩코드 소나타’인 것이다. 독일과 무슨 상관이냐고?
   
   19세기 미국 초월주의자들의 모델이 바로 독일이었다. 한 세기 전 독일의 상황도 자신들과 같았지만, 칸트나 괴테, 베토벤과 같은 천재들의 초월로 단박에 경쟁국들을 따라잡았다고 본 것이다. 에머슨은 친구 브론슨 올콧의 딸 루이자에게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선물했고, 루이자는 자전적인 소설 ‘작은 아씨들’에 괴테의 시를 녹여냈다. 독일에서 온 베어 교수가 조세핀 마치에게 노래로 불러주는 괴테의 ‘레몬꽃 피는 나라를 아시나요’는 낭만주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다.
   
   아이브스는 ‘콩코드 소나타’를 끌고 가는 주요 동기를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서 가져왔다. 이날의 연주자 피에르 로랑 에마르의 “밤밤밤-바암” 하는 연타는 우리를 또 한 번 묵직하게 두드렸다. 이렇게 이틀 동안 엘베 필하모니는 바흐의 장엄한 성당이 되기도 했고 소로의 호젓한 월든 호수로 변신하기도 했다.
   
   
▲ 함부르크의 작곡가 박물관

   명화 ‘안개바다 위의 나그네’
   
   여행 중 바흐의 ‘미사’와 아이브스의 ‘소나타’를 듣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함부르크에 와야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정말 필연이었다. 나는 함부르크에 와서 햄버거는 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쿤스트할레에 소장된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대표작 ‘안개바다 위의 나그네’는 꼭 봐야 한다. 프리드리히는 베토벤과 동년배 독일 화가이다. 그는 늘 비범한 풍경 속에 인물의 뒷모습만을 그렸다. 앞으로 나는 베를린에서, 드레스덴에서, 뮌헨에서 계속해 프리드리히의 대표작들을 만날 것이다.
   
   그림 속 인물 하나하나가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뒷모습은 기다림, 동경, 그리움 따위를 상징한다.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의 본질이다. 베토벤의 ‘멀리 있는 연인’,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같은 자전적인 인물들이 하나같이 프리드리히가 그린 그림 속에 들어 있다.
   
   숱한 예술사 서적과 음반 커버에 단골로 보이던 ‘안개 바다 위의 나그네’. 그림에 다가가는 것이 마치 낭만주의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조로운 색조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안개와 하늘, 구름과 산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신비롭기만 하다. 도대체 그것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얼굴은 어떤 표정일까? 낙담, 감격, 회한, 야망 어쩌면 그 모두가 얼버무려진 것이리라.
   
   이 사람을 청년 바흐라고 생각해본다. 바흐는 서른두 살 때 함부르크 성 야코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 지원했다. 그는 당대 독일에 널리 알려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지만,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 대신 요아힘 하이트만이라는 사람이 4000마르크를 기부하고 교구 목사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이 사건을 가리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만일 하늘나라의 천사가 성 야코비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기 위해 내려와 신성한 연주를 들려주었더라도, 그가 돈이 없다면 다시 하늘로 날아가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본다. ‘안개바다 위의 나그네’는 천사이자 바흐임이 분명하다. 슈바이처는 바흐의 음악을 “서사적이고 회화적이다”라고 말했고, 그 음악 속에서 프리드리히의 그림들과 같은 것을 보았다. “이리저리 떠도는 안개, 불어오는 바람, 떨어지는 낙엽, 울려퍼지는 조종…. 하늘의 구름 위를 거니는 천사.” 슈바이처에게 바흐는 낭만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성 야코비 교회의 야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리게 마련이다.
   
   
▲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 소장된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대표작 ‘안개바다 위의 나그네’와 그림 속 주인공의 뒷모습.

   뷜로에서 말러까지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함부르크 북쪽 변두리 올스도르프 묘지이다. 유럽에서 가장 넓은 공원 묘지라는 이곳 어딘가에 한스 폰 뷜로가 영면하고 있다. 뷜로는 19세기 음악사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이지만, 누구나 아는 이름은 아니다.
   
   뷜로는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와 리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한 그는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당대 제일이었다.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구약성서’에,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를 ‘신약성서’에 비유한 사람이 뷜로였다. 그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초연하는 사이에 아내 코지마는 바그너에게 가버린다. 그러나 뷜로는 바그너 음악에 대한 평가까지 뒤집지는 않았다. 또한 브람스의 첫 교향곡을 지휘하며 마침내 ‘10번’이 나왔다고 소개한 사람도 뷜로이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잇는 성과라는 의미였다. 뷜로는 막 창단한 베를린 필하모닉의 초대 지휘자로 악단의 기틀을 다졌다.
   
   만년에 함부르크 오페라의 지휘자였던 뷜로는 젊은 구스타프 말러를 아래에 두었다. 말러는 지휘뿐만 아니라 작곡으로도 인정받고 싶었지만, 뷜로는 젊은이가 쓰던 두 번째 교향곡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뷜로가 이집트에 갔다가 급사했고 시신이 함부르크로 운구되었다. 장례식에서 19세기 초 함부르크에서 작고한 계몽주의 시인 클로프슈토크의 ‘부활’이라는 시가 낭독되었다. 클로프슈토크는 괴테의 소설 속 젊은 베르테르와 로테가 함께 좋아한 시인이자, 바흐의 둘째 아들과 같은 시기에 함부르크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젊은 말러는 번개를 맞은 듯한 영감을 받았고, 교향곡 2번에 그 시에 붙인 합창을 넣어 마무리했다. 이듬해인 1895년 함부르크의 말러는 베를린에서 뷜로의 악단을 지휘해 ‘부활 교향곡’을 초연했다.
   
   “창조된 것은 반드시 죽어 없어지느니 죽어 없어진 것은 부활하리라!”
   
   나도 이제 베를린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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