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연수는 젊은이들의 특권? 66세 ‘몸짱 의사’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가 전무후무한 ‘4개 외국어 어학연수’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여유 있는 은퇴 여행이 아닙니다. 50세에 시작한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의 완전정복을 위한 대장정입니다. 2년 프로젝트로 ‘3개월 어학연수, 3개월 휴식기’를 4번 반복하는 일명 ‘삼삼한 시니어 어학연수’입니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나이의 한계를 극복해 보이겠다는 몸짱 의사의 도전기는 주간조선 2589호(2019년 12월 30일자) 커버스토리에 자세히 소개된 데 이어 매주 주간조선 지면을 통해 생생한 현지발 체험기가 전달됩니다. 이번호 ‘페루 리마, 스페인어’ 1편이 그 출발입니다.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두 상징 중 하나인 파네시요 언덕의 성모 마리아상 원경.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두 상징 중 하나인 파네시요 언덕의 성모 마리아상 원경.

나는 지난 3월 2일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어학연수를 위해 페루 리마로 출국했다. 4개 외국어 어학연수의 첫 도전이다. 멕시코항공으로 멕시코시티를 거치는 코스인데 당초 목적지인 리마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근 에콰도르에서 일주일 정도 체류한 후에 페루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일단 페루 입국 이후에는 어학연수에 충실하기 위해 페루 국내를 제외하고는 주변 국가 여행은 일절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갈라파고스섬에 잠깐 들러보는 것이 첫째 이유였다. 그리고 옛 잉카의 북쪽 거점도시였던 에콰도르 수도 키토와 에콰도르의 실질적인 제1 도시 과야킬 방문이 두 번째 이유였다. 세 번째는 미리 현지 시차 적응을 마치고 리마에서는 보다 효율적으로 어학원 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코로나19 청정지역이던 중남미에도 브라질을 시작으로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환자 급증 상황과 맞물려 급기야는 출발 사흘 전인 2월 28일, 멕시코와 에콰도르에서 한국인 입국 검역 심사를 강화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당시 멕시코의 확진자는 4명, 에콰도르는 1명이었다. 입국금지나 2주 격리조치가 아니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가장 큰 걱정은 가벼운 일반 감기 증상으로 자칫 코로나19 바이러스 보균자로 오해받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보온에 신경을 쓰며 미열이라도 생기지 않게 조심하면서 규칙적으로 체온 측정을 해나갔다. 또 검역관 앞에서 혹시 기침이라도 해서 오해를 받을까 목캔디도 준비했다. 기내에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두꺼운 옷도 준비했다.

코로나19가 막은 꿈의 갈라파고스행

부쩍 한산해진 인천공항을 통해 비행기에 탑승하니 기내는 마스크를 쓴 한국인 승객과 마스크를 쓰지 않은 멕시코 승무원들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어쨌든 장시간 비행을 마치고 멕시코시티공항에 도착했다. 과연 비행기가 게이트에 도착한 후에도 당국의 검역이 있을 예정이니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각오를 하고 있었던 터라 체온계를 손에 든 날카로운 눈매의 검역관의 등장을 예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승무원이 그냥 나가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문을 나서니 마스크를 쓴 검역관 서너 명이 승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간단한 발열 체크조차 하지 않았다. 특별히 이상 소견이 있어 보이는 사람만 걸러낼 의도 같았다. 검역을 통과하고 입국심사대로 가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류 업무가 일상적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환승 일정 관계로 멕시코시티에서 반나절을 보낸 뒤 3월 3일 새벽 2시30분 에콰도르 키토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장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지침이 내려왔는지 출국장 근무자들은 마스크를 대부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객들 중 마스크를 쓴 사람은 소수였고, 비행기 승무원들도 여전히 마스크 없이 근무를 했다. 키토공항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입국심사대 앞에 검역관들이 내국인 포함, 전 승객을 대상으로 체온을 측정했다. 그 전날 멕시코 공항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에콰도르에 성공적으로 입국, 코로나19로 인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 갈라파고스섬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러 키토공항에 도착해서의 일이었다. 인터넷에서 여러 번 보아 낯설지 않은 느낌의 입도(入島) 출입문에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런데 차례가 된 필자가 무심히 내민 여권을 보자마자 담당자가 옆 직원을 부르는 게 아닌가. 영어가 가능한 직원을 찾는 것이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한국의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그날부터 한국인의 갈라파고스 입도가 금지된다는 것이다. 중국, 이탈리아, 이란도 마찬가지였다. 30일 이내에 이들 4개 국가의 체류 경력이 있으면 무조건 안 된다는 설명이다.

직원은 “갈라파고스 주정부의 결정으로 에콰도르 정부와도 무관한 일이며 자신도 이런 상황이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거듭 피력했다. 결국 갈라파고스 일정을 취소하고 키토에서 이틀을 더 보낼 수밖에 없었다.

키토를 둘러싼 피친차 화산 기슭에 수크레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조국의 사원’.
키토를 둘러싼 피친차 화산 기슭에 수크레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조국의 사원’.

갈고닦은 스페인어 실력 빛을 발하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여행의 목적인 어학연수는 잊지 않았다. 그동안 갈고닦은 스페인어 실력을 확인할 기회는 빨리 왔다. 멕시코항공을 타고 에콰도르를 거쳐 페루 리마로 입성하는 일정의 첫 관문인 멕시코시티에서 10시간이 넘는 환승 여유 시간이 있었다.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했지만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멕시코가 자랑하는 세계적 유적지인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을 보고 싶었다. 테오티우아칸은 거대 피라미드군 유적지로 멕시코시티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차량을 제공하는 왕복 4~5시간의 개인 가이드 프로그램을 계약했다.

풍채 좋은 60대의 멕시코 가이드는 대뜸 영어, 스페인어 중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영어는 잘 못하니 스페인어로 부탁한다”고. 그의 스페인어 안내는 희비의 연속이었다. 모디스모(modismo), 사세르도테(sacerdote), 탈루드(talud)와 같은 고급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가이드의 말이 들릴 때는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매일(todos los días)’과 ‘하루 종일(todo el día)’ 같은 기본 단어조차 혼동할 때는 짧은 좌절감도 느꼈다.

필자의 최종 목적지가 어학연수를 위한 페루라는 것을 알게 된 가이드는 “수준급 실력인데 더 이상의 어학연수가 필요하느냐”라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만일 그렇다면 페루는 정통 스페인어를 구사하지 않기 때문에 멕시코에서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페루 사람들은 대부분 교양이 없고 여자들도 한결같이 땅딸하고 못생겨서 매력이 없다”고 열을 올렸다. 웃어넘기면서 물어보니 정작 페루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첫 번째 스페인어 실전 테스트는 성공이었다.

에콰도르 키토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택시를 탔다. 영어단어를 조각 맞추듯 힘들게 말하던 운전기사는 필자가 스페인어로 응대하자 반색을 하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게다가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안 순간 한국의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에콰도르의 확진자도 며칠 사이에 7명으로 늘면서 코로나19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전기사 이야기로는 에콰도르에서도 갑자기 마스크 품절 사태가 빚어졌다는데 정작 차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사가 “지금 지나가는 곳이 키토의 중하층민들이 사는 지역이라서 건강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갈라파고스 입도가 무참하게(?) 좌절되고, 공항에서 키토 시내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라메오라는 이름의 키토 ‘토종’ 영감을 알게 됐다.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키토에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자신의 차로 시내 관광 가이드를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적도박물관과 미타드 델 문도, 피친차 화산, 파네시요, 역사지구를 관광하는 차량 서비스가 30달러에 불과했다. 무려 6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일정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1 대 1 공짜 회화 연습을 할 기회까지 얻는 것 아닌가. 어쨌든 라메오 영감과 거의 반나절을 같이 보내면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필자보다 한 살 위였고 결혼도 같은 나이에 했다. 필자가 올해로 결혼 37주년이라고 말했더니 자신은 “38년 됐다”고 말하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38 años de sufrimiento(38년간의 고통)”이라는 표현을 했다. 순간 빵 터졌다. 그런 농담을 알아듣다니, 스스로 대견한 마음도 들었다.

프로 축구선수 출신으로 레슬링을 취미로 했다는 다부진 체격의 그는 시종일관 정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화 중 필자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을 눈치채고는 일정에도 없던 ‘조국(祖國)의 사원(Templo de la Patria)’이라는 유명한 독립 전투 현장을 추가로 데려가주었다. 그는 “¡muy entendible!(하는 말을 다 알아듣겠네!)” “¡mucho vocabulario!(어휘력이 대단하다!)” 등의 말로 내 얘기에 장단을 맞추며 흥을 적절히 돋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자도 약간의 정성을 표시했다. 계약된 30달러에 10달러를 더해 40달러를 주고, 다음 날 공항까지의 교통편도 추가로 부탁했다.

‘조국의 사원’ 내에 있는 수크레 동상. 베네수엘라의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기증한 것이다.
‘조국의 사원’ 내에 있는 수크레 동상. 베네수엘라의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기증한 것이다.

남미의 독립 영웅, 수크레와의 만남

그의 안내로 키토 시내를 다니면서 어디서나 마주치는 인물이 있었다. 키토에 내리는 순간부터 사실 궁금했던 인물이었다. ‘마리스칼 수크레 국제공항’, 즉 공항 이름이 수크레 대원수(大元帥)였다. 수크레는 키토 시민의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키토 시내의 역사지구에는 수크레의 이층집이 박물관(Museo Casa de Sucre)으로 보존되고 있고, 키토를 둘러싸고 있는 화산 피친차 기슭에는 그의 공적을 기린 ‘조국의 사원’이라는 기념관까지 세워져 있다. 같은 역사지구 내에 있는 산토도밍고성당 앞의 수크레광장(La Plaza Sucre)에는 그의 동상(Monumento de Sucre)이 서 있다. 우리의 국립극장에 해당하는 건물도 그의 이름을 땄고, 그 중앙 발코니에는 그를 기리는 조각품(Teatro Sucre)이 전시돼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유해는 역사지구 내 대광장에 있는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유해는 수크레의 고향인 베네수엘라에서 여러 차례 인도를 요청했으나 에콰도르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라며 일축하고 있다고 한다.

수크레가 키토를 넘어 에콰도르 전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에콰도르의 화폐단위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미국 달러를 쓰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 에콰도르의 화폐단위는 ‘수크레’였다. 세계 역사를 통해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화폐의 도안에 얼굴을 올리는 경우는 흔하지만 이름이 화폐단위가 되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수크레는 어떤 인물일까. 수크레 (Antonio José de Sucre·1795년 2월 3일~1830년 6월 4일)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유복한 군인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직후의 남미는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용암처럼 분출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와중에 수크레는 10대 청소년기부터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해 일찌감치 남미 해방군 초급장교로 부임했다. 그리고 1817년 남미의 해방 지도자인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1783년 7월 24일~1830년 12월 17일)와 운명적으로 만나 그의 수하가 된다.

군사전략가로서 수크레의 탁월한 자질은 처음부터 볼리바르의 눈에 띄었다. 수크레의 도움을 받아 볼리바르는 1819년 12월 17일 지금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아우르는 ‘대(大)콜롬비아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리고 수크레는 1년여 후에 볼리바르에 의해 남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같은해 8월 19일, 야구아치전투(Batalla de Yaguachi)를 통해 에콰도르의 제2 도시인 과야킬을 확보한다. 이듬해 키토 서쪽 피친차 화산 기슭에서 벌어진 스페인 정부군과의 피친차전투(Batalla de Pichincha)에서 대승을 거두고 마침내 키토까지 함락시킨다. 이 피친차전투는 페루의 아야쿠초전투와 함께 수크레의 양대 전훈으로 일컬어진다.

수크레의 활약으로 에콰도르를 점령한 볼리바르의 다음 목표는 스페인의 최강 부대가 막강한 세를 과시하며 진을 치고 있던 페루였다. 당시 페루에는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해방시킨 다음 페루 함락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던 또 한 명의 남미 독립 영웅이 먼저 와 있었다. 바로 ‘산마르틴’(Jose de San Martin·1778~1850) 장군이었다. 페루에서 마주친 두 영웅 볼리바르와 산마르틴은 담판을 벌인다. 그 유명한 과야킬 회담이다. 밀실에서 이뤄진 회담에는 동석자 없이 산마르틴과 볼리바르, 단 두 사람만이 참석해 후세 사학가들의 많은 해석을 낳기도 했다. 산마르틴은 이 회담에서 볼리바르에게 페루 독립의 마무리 과업을 부탁하고 자신은 페루에서 철수한다.

키토 대성당 안에 안치된 수크레의 유해. 관은 피친차 화산의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키토 대성당 안에 안치된 수크레의 유해. 관은 피친차 화산의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볼리바르와 수크레

그러나 실질적으로 스페인 정부군을 격파하고 페루 독립을 이룬 것은 1824년 수크레가 이끈 아야쿠초전투이다. 페루 의회는 수크레의 공을 인정하고 그에게 아야쿠초의 대원수(Mariscal de Ayacucho)라는 타이틀을 헌정했다. 오늘날 키토공항의 공식적인 이름이 마리스칼 수크레, 즉 수크레 대원수 공항이 된 이유이다. 수크레는 이듬해인 1825년 2월 25일 볼리바르의 명을 받고 ‘알토 페루(Alto Peru)’, 즉 지금의 볼리비아 땅으로 진격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스페인 정부군까지 격파하고 마침내 알토 페루마저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수크레는 알토 페루 지역을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 ‘볼리비아공화국(República de Bolivia)’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볼리바르를 초대 대통령(1825년 8월 11일~1825년 12월 29일 재임)으로 추대하지만 볼리바르는 수크레에게 양보한다. 그렇게 수크레는 1825년 12월 29일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 1828년 4월 28일까지 볼리비아를 이끌게 된다. 아마 이때가 수크레도 볼리바르도 생애 최고의 날들이었을 것이다.

볼리바르는 강력한 중앙집권하의 통일된 국가를 희망하고 남미 각국의 대표자들을 소집하는 파나마회의를 개최한다. 그러나 첨예한 이해관계와 고질적인 분파로 저항에 부딪히고 반대파들에 암살을 당할 위기에까지 몰린다.

한편 수크레는 1828년 4월 20일 키토 출신의 카르셀렌과 결혼을 한다. 당시 볼리비아 대통령이었던 수크레는 참석이 어려워 카르셀렌은 신랑 없는 결혼식을 치러야 했다. 결혼식 8일 후 수크레 사임으로 카르셀렌은 아주 짧은 영부인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마침내 수크레는 부인과 함께 1828년 9월 30일 키토로 돌아온다. 첫딸을 낳고 안정된 삶을 꿈꾸었으나 어수선한 정국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페루군이 키토를 합병할 욕심으로 군대를 일으키자 볼리바르는 급히 수크레를 소환한다. 수크레는 타르키전투(Batalla de Tarqui) 등 잇단 승전고를 울리며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단일정부 구상이 실패로 돌아간 볼리바르는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후계자 지명권, 평생연금도 거절하고 물러나고 만다. 수크레에게도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콜롬비아공화국을 살려 보기 위해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마지막 회의를 주재하고 키토로 돌아가던 중 콜롬비아의 산길에서 정적들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에게 저격을 당해 1830년, 3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볼리바르가 수크레의 암살 소식을 듣고 느꼈을 절망감은 여기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도 같은 해 12월 17일 47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만다. 발표된 공식 사인은 폐결핵으로 인한 병사였다.

수크레는 정치적 야심 없이 볼리바르를 위해 일생을 충성했다.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남미 전체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으로 후세의 사학가들은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남미의 독립혁명가들 중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손꼽히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남미는 그동안 지리적·정서적으로 너무 먼 나라였다. 최근 남미 여행 붐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남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는 한계가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남미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 수크레에 대해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이곳까지 날아온 필자의 여정에 더 이상의 보람이 없겠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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