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의 대표적 빈민가 중 하나로 달동네를 이루고 있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의 모습. 치안상 매우 위험한 곳이다.
리마의 대표적 빈민가 중 하나로 달동네를 이루고 있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의 모습. 치안상 매우 위험한 곳이다.

코로나19 뉴스는 어제 소식이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특히 필자가 출국한 지난 3월 2일 이후의 유럽 상황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가 되고 있다. 이곳 리마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리마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이틀 전인 3월 6일 페루에서도 첫 확진 환자가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3월 15일 하루 만에 28명의 확진자가 나오면서 모두 71명이 되었다. 71명 중 58명이 필자가 있는 리마에서 발생했다. 페루의 관문이자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밀집한 곳이니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날 오후 페루 대통령은 향후 15일간 전 국경을 폐쇄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사회적 격리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이 기간 중 식품과 약품의 공급, 금융 등에 관여되는 시설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점을 닫게 하고 국내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도 차단할 것이라고 한다. 주페루 한국대사관에서는 출국을 원하는 한국인의 경우 3월 16일 자정 전까지 출국을 권고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필자는 어차피 3개월 체류를 예정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출국에 관련된 어려움은 없지만 문제는 어학연수다. 15일의 기간 중 학원이야 당연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러면 이 기간 동안의 어학 공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역만리 페루에 전염병 비상 훈련을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리마의 대표적 부촌인 미라플로레스.
리마의 대표적 부촌인 미라플로레스.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새 뒤척이다 다음 날 아침 학원 시간에 맞추어 갔다. 학원에는 마지막 정리를 위해 상당수 스태프들이 나와 있었다. 필자가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온라인 강좌로 대체할 방법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대학에 평생 몸담고 있었지만 아날로그에 익숙한 필자로서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학원 측의 설명을 듣고 나니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담당 선생님과 화상 테스트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니 페루의 환자 수가 어느새 15명이 늘어 86명이 되어 있었다. 아직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증가 속도가 만만찮아 정부에서 초강수 대책을 내놓을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지난 3월 2일 인천공항을 출국하여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와 에콰도르의 키토, 과야킬을 거쳐 3월 8일 어학연수의 최종 목적지인 페루 리마에 입성했다. 그런데 페루는 공식적으로는 그때까지 ‘출입국-검역 화이트리스트’로서 한국인의 입국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 국가로 발표되고 있었고 실제 국내 언론에서도 그렇게 소개되었다.(이런 방침은 3월 15일까지 유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필자도 한국인의 검역을 강화한다고 공표한 멕시코와 에콰도르를 무난히 통과했기 때문에 페루에 대해서는 완전 방심한 상태였다.

그런데 현지 시각으로 3월 8일 8시50분, 에콰도르 과야킬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리마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 뜻밖에도 의료 체크를 받아야 한다고 별도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검역 장소에서는 한 여자 의사가 간단한 문진과 체온 측정을 하였다. 그리고는 페루에서의 연락처와 전화번호를 적고는 안내장을 나누어주면서 14일 이내에 특별한 증상이 있으면 기재된 번호로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의외였다. 당시 페루는 한국인 입국 제한국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전 국가들보다 더 엄격한 검역 절차를 밟은 것이다. 이틀 전 첫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온 후 동양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해외여행길이 막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래저래 이번 여정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낙인(?)’과 함께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지난 3월 15일 페루 국가 비상사태 발표 직후 한 대형마트 앞의 줄서기 장면. 마트 직원이 손소독제를 들고 고객들에게 일일이 뿌려 주고 있다.
지난 3월 15일 페루 국가 비상사태 발표 직후 한 대형마트 앞의 줄서기 장면. 마트 직원이 손소독제를 들고 고객들에게 일일이 뿌려 주고 있다.

리마의 한 마트 내 진열대 모습. 어린이 기저귀, 휴지, 키친타월 용품 코너가 빠르게 비워졌다.
리마의 한 마트 내 진열대 모습. 어린이 기저귀, 휴지, 키친타월 용품 코너가 빠르게 비워졌다.

페루 리마에 오기까지

돌이켜보면 이곳 리마에 오기까지 꽤 오랫동안 준비한 여정이었다. 2019년 8월, 41년간의 의사 생활, 33년간의 흉부외과 교수 생활을 마치고 제2의 인생 출발로 그동안 취미로 연마해온 4개 외국어 어학연수를 결정하였다. 3월부터 스페인어·프랑스어·중국어·일본어의 4개국 현지 어학연수를 계획했고, 페루 리마에서의 스페인어 연수로 대장정의 첫 단추를 꿰기로 했다.

왜 페루를 선택했느냐고? 현재 세계에서 5억명에 가까운 인구가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어를 단독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모두 21개국인데, 스페인 본토와 아프리카의 적도기니를 제외하면 나머지 19개국이 중남미에 몰려 있다. 우선 중미와 인근 카리브해에서는 멕시코를 필두로 과테말라, 니카라과, 도미니카공화국,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쿠바, 파나마, 푸에르토리코를 포함하여 모두 10개국이 스페인어 사용권이다. 그리고 남미에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 등 9개국이 또 있다.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스페인어 어학연수를 계획할 때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다는 뜻도 되지만, 고민의 여지도 많았다. 결국 페루를 어학 연수지로 선택한 것은 3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스페인어가 주요 국제어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스페인이 특별한 정치적·경제적 파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스페인이 대항해 시절 진출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과거 식민지 덕분에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스페인어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이탈리아어 정도의 관심만 받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오늘날의 스페인어를 가치 있게 만든 중남미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싶었다. 스페인어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해 어떤 변화 과정을 겪게 되었는가를 경험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왜 굳이 페루를 선택했느냐. 이왕이면 잉카문명의 중심지에서 스페인어를 경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잉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대의 영역과 세력을 확보했던 제국이었으나,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가 이끄는 불과 200명도 되지 않는 병력에 철저하게 유린당하면서 망했다. 그 뼈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어학연수와 함께 지나간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보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세 번째 이유는 보다 현실적인 것이었다. 스페인어 연수 후 이어질 프랑스어 연수는 어차피 프랑스로 가야 한다. 언어 공부라는 것이 결국 문화와 사회적 체험이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인데 이왕이면 보다 색다른 환경을 접해 보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페루를 스페인어 어학 연수지로 정하고 나니 중요한 문제는 현지 어학원 선정과 숙소를 찾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인터넷을 검색해 페루 리마에 있는 어학원을 선택하고 우선 이메일로 등록 신청을 하였다. 수업 시작 희망일은 3월 9일로 잡고 일단 한 달 수강신청을 했다. 3개월 예정이었지만 한 달을 온라인으로 경험해 본 후 나머지 2개월은 현지에서 신축성 있게 대처하려는 생각이었다. 공부에 몰입하기 위해 1주일에 30시간 수업하는 ‘수퍼 집중코스’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이 코스는 주 5일 수업으로 매일 오전 4시간의 소규모 그룹수업과 오후 2시간의 개인수업이 이어지는 형식이었다. 적절한 반 편성을 위해 희망 레벨을 적게 되어 있었는데, 필자는 과거에 치렀던 공식시험(델레·DELE) 성적을 기준으로 B2 레벨로 신청했다. 참고로 B2는 유럽어 공통평가 기준에 의한 6단계(A1~ C2) 중 4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내 학습자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최상위에 해당하는 레벨이다. 최고 단계인 C1이나 C2는 장기간 외국 체류 또는 유학생들이 취득할 수 있는 레벨이다.

어학원 신청 후 영어로 된 장문의 안내 메일이 어학원으로부터 날아왔다. B2 레벨은 해당 학생이 거의 없어 그룹을 만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일단 온라인 시험을 치러 B2 레벨이 맞는가를 확인한 뒤, 사실이라면 1 대 1 ‘개인 집중코스’를 추천한다고 했다.

별다른 시험 준비도 없이 어학원에서 안내해 준 사이트로 들어가 간단한 인적사항을 입력하고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문법·어휘 파트와 작문 파트로 나뉘어 있었는데 문법 시험은 스페인어 문법의 총아(?)인 접속법에 관련된 문제가 유난히 많았다. 아마도 B2 레벨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평가척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객관식으로 이루어진 수십 문항의 문법 시험을 마치니 작문 시험 문제가 다음과 같이 주어졌다.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예약한 비행기 편에 오버부킹이 생겨 결국 그 다음 날에 떠나야 한다는 회사의 통보를 듣게 된다. 그런데 업무 관계로 그날 꼭 떠나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돈을 빌려 버스로 긴 시간을 들여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에 도착한 후 항공사에 항의 편지를 보내 보상을 요구하시오.’

시험을 마치고 나니 얼마 후 어학원 측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수업을 1 대 1 일정으로 바꾸는 데 동의해 준 필자의 융통성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시험 결과가 B2 레벨에 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어학원 첫 수업시간 전에 짧은 구술시험을 통해 회화능력에 대한 최종 확인이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있었지만 내심 뿌듯했다.

어학원 내부 모습
어학원 내부 모습

아레키파 대로에 있는 아파트가 필자의 숙소다.
아레키파 대로에 있는 아파트가 필자의 숙소다.

약국마다 마스크 품절 사태

그 다음은 숙소 결정이었다. 나이를 고려해 게스트하우스는 배제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것 같았다.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부엌을 갖춘 원룸도 많았지만 좀 답답해 보였다. 깔끔하고 편리하기로 말하면 호텔이 최고겠지만 비용이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남는 것은 아파트였다. 페루의 숙박 중개 사이트에 들어가 안전, 어학원과의 거리, 크기, 평판 등을 참고해 며칠을 고심한 끝에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찾았다. 이곳에 와서 보니 각종 식기, 마이크로오븐, 전자레인지, 건조기가 딸린 세탁기, 냉장고 등이 갖춰져 있고 공간도 꽤 여유가 있어 기대 이상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학원 수업 첫날 이른 아침 인터뷰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어학원은 도보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리마에서 최근 조성된 번화가답게 서울 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어학원 직원들은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레벨테스트 마지막 단계인 인터뷰로 학습 동기, 개인적 신상 등에 대한 질문을 한 후 반 배정을 해주었다. 에리카라는 여선생이 내 담당이었다. 에리카는 20대로 젊은 나이지만 수업 방식은 꽤 노련했다. 내게 질문을 먼저 던진 뒤 관련 이야기를 이어가는 형식이었다. 아무래도 첫날인지라 개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에리카는 내가 말한 내용 중 잘못된 것이 있으면 칠판에 써 가며 그때그때 지적해 주었다.

수업 내용은 문법 등이 추가되면서 다채로워졌다. 수업 중간 10분의 휴식시간 이외에는 선생님과 1 대 1로 계속 대화를 나누니 피곤하기도 했지만 회화에 대한 갈증이 싹 해소됐다. 휴식시간에 보니 대부분 서양인이었고 동양인은 한두 명만 눈에 띄었다. 중국인과 일본인이 많고 한국 학생은 적은 편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응하는 와중에 페루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고, 나의 어학연수도 비상이 걸렸다. 앞으로 2주간은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비상사태 선언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약국에는 정작 마스크가 품절이었다. 시내를 산책하다 약국이 보이길래 들어가 마스크를 찾았다. 품질도 볼 겸 하나 살 작정이었는데 종업원은 난색을 표명하면서 ‘이미 다 품절됐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어깨만 으쓱거렸다. 가격을 물으니 50개들이 한 상자에 12솔(약 4200원)이라고 했다. 또 다른 약국에도 들어가 물어봤는데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약국마다 품절이고 거리에는 마스크 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마스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영악한 사람들이 매점매석을 한 것일까? 아니면 집집마다 만일에 대비해서 비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낯선 리마의 생활에도 서서히 적응이 돼 가는 모양이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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