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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600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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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신라 화랑의 후손 ‘금수저’ 증명서 발급했다

▲ (오른쪽부터) 소병윤 대동보추진위원장, 소운영 대종회 회장, 소융섭 사무총장.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누구인가, 이를 알려주는 것이 족보입니다.”
   
   지난 3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진주소씨대종회(晋州蘇氏大宗會) 사무실에서 만난 소운영(蘇運永·80) 대종회 회장은 이번에 25년 만에 새롭게 발간하는 문중 족보에 큰 기대감을 내비쳤다. 대부분의 대종회(종친회)는 25~30년 간격으로 족보를 재정비한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기 때문이다. 요즘은 족보가 디지털 형식으로도 만들어져 과거에 비해 한층 쉽게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소 회장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며 “족보를 보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족보를 만들고 보는 행위 자체가 나를 찾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소씨 대종회에 따르면, 소씨 성을 가진 탈북민이 대종회를 찾아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자신의 집안 내력을 기록한 종이 한 장만 달랑 들고 탈북할 정도로 한민족은 남북을 떠나 자신의 핏줄을 중시하고 이를 확인하려 한다는 것이 소 회장의 말이다. 특히 오랜 역사를 가진 집안일수록 그러하다고 한다.
   
   이러한 집안의 오랜 역사를 이야기하며 소 회장은 서양시를 인용했는데 현대 족보가 필요한 이유를 어림잡을 수 있는 내용이다. ‘나는 왔구나 온 곳도 모르면서/ 나는 있구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으리라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떠나리라 갈 곳도 모르면서’ -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아마도 모든 문중에 자신들의 뿌리를 증명하는 족보에 대한 애정은 같을 것이다. 특히 소씨 집안은 1000년 전 고려시대부터 씨족의 역사를 기록해왔다는 자부심이 있다. 실제 소씨 족보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소씨 종친회도 그동안 역사 문헌 고증을 통해 소씨 족보의 오랜 역사와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소 회장은 “집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시대까지 간다”며 “현재 중시조인 소알천공(신라 중기의 화랑이자 문인으로 알려진 인물)부터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여건이 되면 그 이전 역사까지 연구하려 한다”고 했다.
   
   
   상고사 연구에 활용되는 소씨 족보
   
   소 회장이 자신의 족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는 뚜렷한 근거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소씨 집안 족보는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기술된 족보에는 ‘상고사 이전부터의 집안 내력까지 기술되어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집안의 내력이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이 이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현재 소씨 집안에서 자랑하는 족보는 동근보(東槿譜), 서풍보(瑞風譜), 부소보(扶蘇譜) 등이 있다. 이 족보들은 발행연도가 각기 다른 족보들이다. 고려 정종 2년 서기 947년 정미(丁未)년 발행된 동근보 서문을 보면 족보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소씨 족보가 존재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동근보는 서문만이 전해지고 있다.
   
   동근보의 ‘근(槿)’은 무궁화를 뜻한다는 것이 소씨 종친회 측의 설명이다. 소씨 집안에서는 오래전부터 소(蘇)가 무궁화를 뜻한다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나라꽃 무궁화를 성으로 쓴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다.
   
   소 회장에 따르면, 동근보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우여곡절도 있었다고 한다. 당초 서기 941년 신축(辛丑)년 봄에 족보 간행을 하자는 이야기가 문중에서 나왔으나, 경주문중은 한문으로 쓰기를 주장하고 진주문중은 이두를 주장해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기 944년 갑진(甲辰)년 현문(玄文·옛 고유문자)으로 쓰기로 합의했다. 당시 소씨 문중이 족보를 제작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신라 말기인 서기 890년 강주 호족 왕봉규, 차윤웅의 난으로 소씨 일족이 죽임을 당하는 화를 입었다. 이후 고려 초 945년에 왕규의 반란으로 한 번 더 습격을 당했다. 이러한 환란으로 소씨 족보가 불에 타 없어져버렸다. 다행히 소씨 각 종파 나름의 방식으로 전수되어오던 기록이 있어 이를 모아 다시 족보를 만들려 한 것이다.
   
   동근보가 발행되고 156년 후인 서기 1103년 계미(癸未)년에는 서풍보라는 족보가 발행되었다. 서풍보도 현재 서문이 전해진다.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 1285년 일연의 ‘삼국유사’보다 앞선 기록이다. 서풍보는 ‘상서로운(瑞), 소씨의 족보’라는 뜻인데 소씨가 풍이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풍(風) 자를 넣었다는 설명이다. 서풍보를 재발행한 이유는 동근보가 발행되고 15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고, 동근보가 현문으로 되어 있어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다시 한문으로 작성해 이두로 토를 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서풍보가 발행되고 217년 후인 서기 1320년 경신(庚申)년에는 부소보라는 이름으로 다시 족보가 발행되었다. 진주소씨대종회는 중시조 소알천공 제사를 매년 3월 셋째 일요일 진주에서 거행하고 있는데, 올해가 부소보 발행 700주년을 맞는 해여서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의 코로나19 사태가 가라앉으면 행사를 실행에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부소보는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유독 소씨 후손들이 큰 시련을 당한 것이 재발행 이유가 되었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극소수였고, 전해오던 족보와 문서들이 전란에 타 없어져 재발간한 것이다. 부소보라는 이름은 ‘소씨의 족보’라는 의미. 소씨 성은 무궁화를 의미하는데, 부소(扶蘇) 역시 무궁화를 뜻하는 말이다. 부소보는 고려 때 소씨의 집성촌이었던 진주 부소동에서 작성됐는데 부소동의 부소도 무궁화를 뜻한다.
   
   
▲ 진주소씨대종회가 발행하는 ‘혈통서’. photo 진주소씨대종회

   해외에서 ‘화랑 소씨’ 입증 가능
   
   소씨 족보에서 보듯 족보에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주는 많은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지만 바쁜 현대인은 자신의 뿌리를 찾을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보통 결혼을 하거나 자식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알기 위해 종친회를 찾고서야 족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때 숲처럼 뻗어 있는 수많은 가지 가운데 자신이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현실에서 소씨 종친회는 좀 더 확실하게 후손들의 뿌리를 각인시키기 위해 ‘한국진주소씨혈통서’를 발급하고 있다. 마치 주민등록등본처럼 소씨 집안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름, 등록번호, 성별, 생년월일 등을 기록하고 한글과 한문, 영문을 병기해 이렇게 증명한다.
   
   ‘상기자(上記者)는 화랑도정신(花郞徒精神)을 계승(繼承)한 진주소씨(晋州蘇氏) 577년 탄강(誕降·태어난)하신 알천공(閼川公)의 ○○대(代) 혈통(血統)임을 확인(確認)합니다. This person is the ○○th great grandson of Jinju So’s Alcheongong was born 577, who inherited the spirit of Hwarangdo.’
   
   이 혈통서를 발급받고자 하는 후손은 대종회 사무실을 방문하면 된다. 해외에 거주하는 후손들도 이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증명서에서 소씨 집안이 조상의 ‘화랑정신’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역사적 근거가 있다. 중시조 알천공의 동생인 소귀산이 아막성전투(서기 602년)에서 아버지를 구출하고 전사하는 등 신라의 화랑도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소귀산은 원광법사로부터 세속오계를 직접 전수받은 것으로 전해진 인물이다. 알천공 역시 화랑이었는데, 당시 화랑은 요즈음의 대장군 격이었다. 소 회장은 “이러한 조상의 화랑정신을 배우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데 족보가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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