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요 아 라 브라사. 숯불에서 구운 통닭 요리다.
포요 아 라 브라사. 숯불에서 구운 통닭 요리다.

국가비상사태로 식당 폐쇄가 장기화하면서 페루 국민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뭘까? 다름 아닌 닭 요리다. 페루에는 닭 요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포요 알 오르노(Pollo al Horno·오븐구이 닭), 포요 알 시야오(Pollo al Sillao·간장양념 닭), 포요 알 비노(Pollo al vino·와인양념 닭), 포요 아 라스 피나스 이에르바스(Pollos a las Finas Hierbas·향신료 닭) 등에다 심지어 콜라로 양념을 한 포요 아 라 코카콜라(Pollo a la Cocacola)까지 있다. 닭고기는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페루 사람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서민들의 주거지역에는 생닭을 파는 행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페루 국민들이 첫 번째로 꼽는 닭 요리는 ‘포요 아 라 브라사(Pollo a la Brasa)’이다. 글자 그대로 숯불(brasa)에서 구운 통닭(Pollo)을 말한다.

페루는 미식국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들이 즐비하다. 언뜻 생각해도 세비체(ceviche), 로모 살타도(lomo saltado), 쿠이(cuy) 같은 메뉴들이 쉽게 떠오른다. 그런데 정작 현지인들에게 페루의 대표 음식을 한 가지만 꼽아 보라면 상당히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다. 바로 ‘포요 아 라 브라사’이다. 그야말로 페루 사람들의 소울푸드이다. 외국에 나가면 가장 그리워하는 음식 1호로 꼽힌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도 어학원 선생님들을 비롯해 현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포요 아 라 브라사’를 못 먹어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고 했다. ‘포요 아 라 브라사’를 이야기하면서 그 맛을 상상이나 하듯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일반 슈퍼에서 파는 ‘포요 로스티사도(전기구이 통닭)’와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면 한결같이 고개를 저으며 “아직 안 먹어 봐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항변했다.

‘포요 아 라 브라사’ 전문점에서 찍은 숯불구이 통닭 모습. 각 전문점마다 숯불구이장치의 구성이 약간씩 다르다. 국가비상사태 속에서 식당 오픈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근접 촬영이 쉽지 않았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포요 아 라 브라사’ 전문점에서 찍은 숯불구이 통닭 모습. 각 전문점마다 숯불구이장치의 구성이 약간씩 다르다. 국가비상사태 속에서 식당 오픈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근접 촬영이 쉽지 않았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포요 아 라 브라사’ 전문점이 문을 열자마자 가득 쌓인 배달 주문 전표들.
‘포요 아 라 브라사’ 전문점이 문을 열자마자 가득 쌓인 배달 주문 전표들.

‘포요 아 라 브라사’의 시초

‘포요 아 라 브라사’가 페루 사회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50년대이다. 당시 리마 근교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던 스위스 출신의 슐러(Roger Schuler)라는 사람이 양계 사업이 시원치 않자 돌파구를 찾기 위해 직접 농장에서 닭을 구워 팔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소금물이 주가 된 양념에 닭을 짭짤하게 재운 다음에 알가로보(algarrobo)라는 나무 숯불에 천천히 굽는 방법으로 숯불구이 통닭을 선보였다. 그리고는 판매전략으로 당시 5솔(화폐단위·1솔=370원)만 내면 원하는 만큼 통닭을 먹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말하자면 무한리필인 셈이었다. 지금은 화폐가치가 많이 달라졌지만 5솔이면 파격적으로 싼값이었다.

당시 레스토랑이라면 호화 식당이 주를 이루던 시절이었는데 슐러의 식당은 싼값에 아무런 격식이 없었다. 맛, 가격, 편안한 분위기 3박자를 모두 갖춘 슐러의 식당은 큰 인기를 얻었다. 손님들이 몰려들자 닭을 제때에 구워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작은 나무숯불 판에 일일이 손으로 돌려가며 닭을 굽는 방법으로는 주문을 처리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슐러는 이런 방면에 재능이 있는 친구 울리히(Franz Ulrich)에게 부탁을 했고, 울리히는 현대식 대량 숯불구이 방법을 고안했다. 오늘날 전기구이 통닭 기계의 모양인데 전기 대신 숯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후 이들이 리마에서 개업한 식당 ‘푸른 농장(La Granja Azul)’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식당들이 뒤따르면서 오늘날의 유명한 ‘포요 아 라 브라사’가 페루인들의 입맛에 뿌리내리게 됐다.

‘포요 아 라 브라사’ 전문점은 페루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각 전문점들은 비장의 양념을 개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페루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페루 정부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매년 7월 세 번째 일요일을 ‘포요 아 라 브라사의 날(Día del Pollo a la Brasa)’로 정하고 판촉 및 홍보 활동에 나서고 있다.

필자 역시 궁금증 때문에서라도 마력적인 맛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포요 아 라 브라사’를 꼭 한번 시식해 보고 싶었다.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모든 식당이 폐쇄돼 아쉬움만 달래고 있던 중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페루 정부가 단계적인 사회 정상화 정책의 일환으로 까다로운 위생점검 조건을 충족하는 식당에 한해 가정배달과 테이크아웃 판매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당연히 ‘포요 아 라 브라사’ 전문점의 오픈 시점이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피자, 햄버거집, 중국집 등을 제치고 ‘포요 아 라 브라사’ 전문점들이 먼저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필자의 숙소 근처에서도 지난 5월 14일 목요일 한 식당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배달 주문이었고 필자처럼 방문고객은 문 앞을 탁자로 막고 그 앞에서 주문을 받았다. 문틈을 통해 보니 카운터에는 이미 배달 주문 전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랜만에 문을 연 때문인지 주문은 ‘포요 아 라 브라사’에 감자튀김, 아보카도샐러드, 큰 콜라를 포함한 단일 메뉴만 받았다. 알고 보니 반 마리, 4분의 1마리도 주문이 가능한데 필자는 엉겁결에 한 마리를 시켰다. 가격은 2만2700원 정도로 현지의 물가를 감안하면 꽤 비쌌다. 드디어 맛을 보게 되었다는 기대감으로 숙소에 들고 와 개봉을 하니 일단 시각적으로도 강렬한 포스가 느껴졌다. 소스도 무려 4가지가 들어 있었다. 마침내 맛을 본 ‘포요 아 라 브라사’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소스 없이도 충분히 그 매력적인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소스마다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튀김 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입맛에 훨씬 잘 맞았다.

이날의 성공적인 시식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더 맛을 확인해 보기 위해 다음 날 문을 연 또 다른 전문점을 찾아 이번에는 반 마리를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였다. 그리고 비교를 위해 인근 슈퍼로 가서 전기구이 통닭을 하나 사들고 왔다. 가격은 점포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숯불구이 통닭이 전기구이 통닭에 비해 1배 반에서 2배 정도 비쌌다. 맛은 확실히 숯불구이 통닭 쪽이 나았으나, 가격 차이를 고려하면 각자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일 정도 시식을 핑계 삼아 통닭을 연속으로 먹고 나니 식탁이 온통 통닭 냄새로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맛있어도 당분간 닭 요리는 안 먹어도 되겠다 싶었다.

피스코 칵테일 제조에 필요한 각종 재료들.
피스코 칵테일 제조에 필요한 각종 재료들.

페루의 자존심, 피스코 칵테일의 세계

얼마 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의 피해가 과거 진주만 공습이나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의 피해보다 더 나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연합군이 독일 나치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날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 75주년을 맞이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코로나19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투쟁은 75년 전 보여준 국가적 노력과 똑같은 정신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위기 상황이 닥치면 최악의 역사적 경험과 비교하곤 한다.

페루도 마찬가지다. 최근 페루의 마르틴 비스카라 대통령은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피해는 과거 태평양전쟁에서의 피해를 능가할 수 있다”라고 그 피해의 규모를 예상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언급한 ‘태평양전쟁’은 과연 어떤 전쟁이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일으킨 연합국과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전쟁이다. 영어로 이 전쟁은 ‘the Pacific War’인데, 페루가 연관된 전쟁은 ‘War of the Pacific’으로 구별해 표현하고 있다.

남미의 태평양전쟁은 1879년에서 1883년 사이에 페루, 칠레 그리고 볼리비아 3국이 아타카마사막 일대의 자원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결론적으로 이 전쟁에서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군은 칠레에 참패하면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우선 볼리비아는 국익에 두고두고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오는 손해를 입었다. 400㎞나 되는 태평양 연안을 접하고 있던 해양국에서 칠레에 해안 영토를 잃고 졸지에 내륙국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페루 역시 볼리비아에 못지않은 손실을 보았다. 타크나 지역을 제외한 칠레 접경 지역의 영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칠레군에 수도 리마가 함락되고 유린당하면서 국민 자존심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 내상은 실로 깊어 페루로서는 차마 되새기기 싫은 아픈 역사이다. 그 후 2007년 칠레는 리마를 점령했을 때 약탈한 국보급 장서 4000여권을 돌려주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으나, 페루로서는 하루아침에 씻을 수 있는 앙금이 아니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페루와 칠레는 양국 간에 발생하는 모든 현안에 대해서 사사건건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참한 패전의 상처를 간직한 국민감정 때문에 페루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칠레에 양보하거나 당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렇게 총칼이 남긴 전쟁의 상처는 ‘피스코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을 낳게 된다. 피스코라는 술의 국제적 상표권을 둘러싼 이 싸움은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그에 못지않게 치열한 대결 양상을 보이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피스코(pisco)는 포도로 만든 증류주인 브랜디의 일종인데 오래전부터 페루가 원조국임을 주장하고 있는 술이다. 그런데 페루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이 술에 대해 언젠가부터 칠레가 자기들도 피스코에 대한 연고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피스코가 만들어진 지역은 지금의 페루 남부와 칠레 북부에 연해 있는 지역이니, 칠레에도 당연히 이 명칭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칠레로서도 피스코를 대량생산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미 국제적 지명도를 확보한 ‘피스코’라는 용어를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칠레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페루 국민들은 칠레가 그들의 국민주인 피스코를 이유 없이 탐내는 것으로 보고 크게 분개했다. 페루의 정치지도자들도 초강경으로 맞섰다. 양측은 역사적·지리적 근거를 내세우면서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종주국 싸움을 벌였다. 2006년 세계지적소유권위원회가 피스코에 대한 칠레 측의 권리 주장에도 타당성이 있다고 결정하자, 칠레 정부는 즉각 페루에 두 나라 정부가 공동으로 피스코 판촉 활동에 나서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페루는 단호히 거절하며 독점적 권리를 주장했다. 2019년 초 페루는 인도 시장에서 법적 투쟁을 통해 피스코 독점사용권을 취득했다. 페루가 독점권을 가진 50번째 국가였다. 칠레 측은 또다시 법적 싸움 대신 협력하자는 유화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페루 정부의 매몰찬 거부 의사만 확인했다. 현재까지는 페루가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최후의 승부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양국이 이렇게 첨예하게 싸우고 있는 피스코는 왜 중요한 것일까. 당연히 피스코라는 이름에 걸려 있는 막대한 상업적 이익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피스코는 술 자체로만으로는 고급 술로 취급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비슷한 도수를 가진 위스키, 코냑은 물론 데킬라, 럼 등과 비교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피스코는 칵테일의 기본 술로 소비량이 엄청나다. 오늘날 피스코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실상 이들 칵테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스코 칵테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피스코사워(pisco sour)다. 레몬주스와 시럽이 주는 새콤달콤한 맛에 달걀흰자 거품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세계적인 칵테일 명주가 됐다. 그리고 최근 간단한 제조법으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칠카노(chilcano)가 있다. 피스코에 레몬주스와 진저에일만 있으면 셰이커나 믹서기 없이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이 칵테일은 최근 서울에서 열린 페루 관광홍보행사에서 페루대사 부인이 직접 제조 시연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는 사람만 찾는다는 알가로비나(algarrobina)도 빼놓을 수가 없다. 피스코에 알가로비나라는 자연산 시럽, 달걀노른자, 연유 등을 넣고 만드는 이 칵테일은 그 매력적인 농밀함으로 한 번 마셔 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게 된다는 명품이다.

페루의 국민주인 피스코 칵테일. 왼쪽부터 칠카노, 피스코사워, 알가로비나. 칠카노는 보통 하이볼글라스에 서빙되나 여기서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같은 글라스를 사용했다.
페루의 국민주인 피스코 칵테일. 왼쪽부터 칠카노, 피스코사워, 알가로비나. 칠카노는 보통 하이볼글라스에 서빙되나 여기서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같은 글라스를 사용했다.

칵테일 제조에 도전하다

필자 역시 이런 명품 칵테일들을 피스코의 본고장에서 프로 바텐더들의 솜씨로 즐길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지만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그 기대는 이미 깨졌다. 더구나 이런 칵테일들의 경우 앞서 말한 ‘포요 아 라 브라사’처럼 배달이 되는 메뉴도 아니다. 일반 식당과는 다른 칵테일 바가 가까운 시일 내에 문을 열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필자는 직접 칵테일을 제조해 보기로 했다. 사실 필자에게 칵테일 제조는 그렇게 생소한 분야는 아니다. 이미 40년 전쯤 동료 의사들을 대상으로 칵테일 강의를 했을 정도로 관심과 경험이 있는 터였다.

우선 슈퍼에서 필요한 모든 재료를 샀다. 제조법이 가장 간단한 칠카노부터 시작해서, 믹서기의 도움이 필요한 피스코사워와 알가로비나를 차례대로 만들어가며 시음을 했다. 필자의 입맛에 맞추어 재료들의 배합 비율을 조절해 보기도 했다. 스스로 만든 작품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가운데서도 무척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어느 정도 자신이 붙자 과거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창작 칵테일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피스코사워를 만드는 데 필요한 하라베 데 고마(jarabe de goma)라는 시럽을 붉은색으로 바꿨다. 그 결과 훨씬 매혹적인 이른바 ‘핑크 피스코사워(pink pisco sour)’가 세상에 탄생했다. 한국에 귀국하면 이 칵테일로 바텐더로 나서 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족했다. 궁즉통(窮則通)이란 말이 있다. 국가비상사태라는 궁한 상황이 칵테일 자가 제조에 이어 새로운 칵테일 개발로까지 통했으니 이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원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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