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div>1</strong> 버스정류장의 간격 두기 표시.<br/><strong>2</strong> 슈퍼 앞의 간격 두기 표시.<br/><strong>3</strong> 약국 앞의 간격 두기 표시.<br/><strong>4</strong> 은행 앞의 간격 두기 표시.<br/><strong>5</strong> 정부보조금을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간격 지키기를 실행하고 있는 모습.
1 버스정류장의 간격 두기 표시.
2 슈퍼 앞의 간격 두기 표시.
3 약국 앞의 간격 두기 표시.
4 은행 앞의 간격 두기 표시.
5 정부보조금을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간격 지키기를 실행하고 있는 모습.

최근 페루 수도 리마의 한 과일시장 상인 164명을 대상으로 한 코로나19 바이러스 검사에서 무려 90%가 양성으로 나왔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유럽, 미국에 이어 남미가 코로나19의 새로운 진원지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남미에서도 특히 페루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난 5월 25일 현재 페루의 총 확진자는 12만3979명이고 사망자는 3629명이다.

무려 두 달 반에 걸친 국가비상사태와 엄격한 사회격리 조치에도 불구하고 환자 증가세가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폭증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3월 15일 전체 환자 수가 불과 70명을 넘어선 상태에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로는 처음으로 전격적인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함께 국경폐쇄, 강제 사회격리 등의 조치를 취할 때만 해도 대부분의 페루 국민은 자국의 열악한 의료 인프라를 고려할 때 불가피한 조치로 생각하며 선제적인 정책에 적극 지원을 보내는 분위기였다. 국제사회의 평가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그 후 페루 정부와 이른바 전문가 그룹들의 예측은 번번이 빗나갔다. 초기에 마르틴 비스카라 페루 대통령은 ‘바이러스에 대한 망치질’이란 용어까지 만들어가며 조기 강경대책의 효과를 역설했으나 이미 공허한 추억이 된 지 오래다. 확진자 5000명이 정점일 것이라던 전문가는 수십 배로 증가한 지금도 여전히 엇나간 예측을 계속하고 있다. 자국민의 생활 패턴에 대한 분석 부족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남녀 성별에 따라 외출 날짜를 격일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하자, 여자 외출 날짜에 TV에 비친 전통시장의 모습은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 사람 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정작 정부가 앞장서서 접촉을 조장한 셈이었다.

결국 전통시장이 가장 심각한 전염원으로 지목되면서 페루 정부는 전통시장 전파를 막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 전통시장 사태에 놀란 정부는 또 사람들 간의 기본 거리 확보를 위해서 슈퍼, 은행, 약국, 버스정류장 등의 대기 공간마다 줄 서는 간격을 일일이 표시하고 있다. 페루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은 바람직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을 파악하는 데 왜 두 달 가까이 걸려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4번이나 종식을 연기했던 국가비상사태 기간이 끝나는 5월 24일을 앞두고, 당국은 환자 수의 의미 있는 감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해 점진적인 사회활동 정상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대내외에 공표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페루 경제에서 70%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용근로자들은 법과 규정에 상관없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렸기 때문이다. 페루 정부로서는 국가비상사태를 해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계속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결국 고심하던 페루 정부는 지난 5월 22일 대통령 발표를 통해 국가비상사태는 6월 30일까지 대폭 연장하되, 사회 정상화 과정은 이와 관계없이 추진해 나간다는 절충안을 발표했다. 예를 들면 이발, 미용, 세탁 등의 영업이 방문서비스 조건으로 가능하게 되었고 의복, 신발, 책, 가전제품 등도 온라인 판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프로축구를 포함한 스포츠 경기도 무관중 경기를 원칙으로 관련 조건을 충족하면 실시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미 그 전주부터 상당수 식당들이 배달 및 테이크아웃 영업을 시작했거나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어린이들도 한정된 시간 동안 부모 동반하에 외출이 가능해졌다.

현지 전문가의 표현대로 ‘가벼운 형태의 국가비상체제’가 6월 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거리 풍경도 국가비상사태 초기와는 사뭇 달라졌다. 이제 페루 정부와 함께 페루 국민도 ‘비상체제인 듯 비상체제 아닌’ 묘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운영의 묘를 찾아 나갈지 궁금하다. 리마에서의 체류가 어느덧 석 달이 되어가는 필자로서도 비록 국외자의 입장이지만 페루가 이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빈다.

우아카 푸크야나의 모습.
우아카 푸크야나의 모습.

아마추어의 세비체, 프로의 세비체

페루 정부의 단계적인 사회 정상화 정책으로 가정배달과 테이크아웃 조건으로 식당 영업이 가능해졌다. 그 덕분에 페루의 소울푸드 ‘숯불 통닭구이(포요 아 라 브라사)’에 대한 시식기를 지난호에 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슈퍼를 가는 길에 세비체리아(cevichería)로 불리는 세비체 전문점이 문을 연 것을 발견했다.

세비체는 한마디로 싱싱한 생선이나 해산물을 레몬 또는 라임 주스에 초절임한 요리를 말한다. 아마 페루의 소울푸드 자리를 놓고 ‘포요 아 라 브라사’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 정도로 페루의 또 다른 대표 음식이다. 그런데 세비체는 ‘포요 아 라 브라사’와 달리 선도가 매우 중요한 해산물이 재료이다. 대폭 강화된 정부의 위생검사 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워 영업을 빨리 재개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집이 용케 문을 연 것이다. 대형 체인점에 속해 있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세비체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세비체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인터넷 정보도 참고하고, 어학원 강사들에게 물어가면서 여러 차례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현재 리마에서 세비체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꽤 알려진 틸라피아(Tilapia)라는 생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지가 썩 좋은 생선은 아니라서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으나 선도가 워낙 좋아 보여 구입 후 세비체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요리를 할수록 맛도 조금씩 좋아졌다. 가끔 틸라피아보다 값이 2배 이상 비싼 고급 어종인 혀가자미(Lenguado)가 나오면 얼른 사와서 세비체를 만들었다. 혀가자미는 우리나라 광어나 도다리와 비슷하게 생긴 어종인데 세비체로 만들면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는 식감과 맛이 일품이었다. 얼마 전에도 혀가자미 세비체를 만들어 먹었다. 삶으면 빨간색이 나는 카모테(camote)라고 부르는 고구마와, 알갱이가 큰 페루 옥수수를 곁들이는 것이 전통인데 필자도 흉내를 내보았다. 붉은 양파를 반드시 넣는데 보통은 길게 썰어 넣지만 잘게 썰기도 한다.

직접 만들어 먹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전문가 솜씨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리사나 전문 식당이 왜 있겠는가. 세비체 전문 식당이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흘 연속으로 전문 세비체를 먹었다. 이왕이면 평범한 재료보다는 페루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재료들을 맛보기 위해 강(江)가재 세비체, 부채조개 세비체, 검은조개 세비체를 차례대로 맛보았다. 원하면 날것 그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할 정도로 선도에 자신이 있어 보였다. 가격은 우리 돈으로 재료에 따라 1만4000~1만7000원 정도였다. 현지 물가로 따지면 아주 비싼 값이지만 풍성한 양과 선도, 맛 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서 3만~5만원 정도의 값어치는 충분해 보였다. 그동안 세비체라고 하면 생선 세비체 또는 생선에 새우, 오징어 등을 섞은 혼합 세비체만 알고 있었는데 색다른 세비체들을 접하고 나니 식도락의 신세계를 맛본 기분이다. 맛이 어떠냐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우아카 푸크야나를 배경으로 마치 이곳을 지키고 있는 듯한 털 없는 페루 개의 모습. 우연히 정말 귀한 장면을 찍은 느낌이다.
우아카 푸크야나를 배경으로 마치 이곳을 지키고 있는 듯한 털 없는 페루 개의 모습. 우연히 정말 귀한 장면을 찍은 느낌이다.

페루의 존댓말

세비체 전문점에 드나들다 보니 주문을 하면서 종업원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동안 어학원 강사, 집주인, 아파트 직원과는 서로 편안한 말투를 썼고, 슈퍼나 동네마트, 길거리에서는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존댓말을 배우는 기회였다. 종업원은 첫마디부터 ‘디가메(dígame)’, 즉 ‘말씀하십시오’라고 시작하였다. 이 경우 어학원 강사와의 대화라면 ‘디메(dime)’, 즉 ‘말해봐’로 말했을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말의 반말과는 어감이 다르다.) 대화 중에 필자가 페루식 관용 표현 하나를 구사하자 종업원이 웃으면서 ‘벌써 익히셨군요’라는 뜻으로 ‘야 아프렌디스테(Ya aprendiste)’라고 말했다. 2인칭 화법이 아니라 ‘야 아프렌디오(Ya aprendió)’라는 존댓말 표현인 3인칭 화법을 사용하였다.

물론 호칭도 깍듯이 ‘세뇨르’(영어의 Sir와 Mr 중간 정도에 해당)라고 불렀다. 슈퍼에서는 심지어 세뇨르보다 조금 공식적인 어투인 ‘카바예로’(caballero·영어의 Sir에 조금 더 가까움)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반면 길거리에서 넉살 좋게 필자에게 길을 물어보면서 대뜸 ‘아미고(amigo·친구)’라고 불러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어느 정도 나이가 짐작은 될 터인데 말이다. 알고 보니 ‘아미고’는 페루에서 굉장히 흔한 표현으로 모르는 사람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라고 한다. 여자에게는 ‘아미가(amiga)’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첫 외국어로 배운다. 그 후에도 영어는 줄곧 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외국어로 자리 잡아서인지 우리는 무의식 중에 다른 외국어를 접할 때도 영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생기는 오해 중 하나가 스페인어도 영어처럼 존댓말 체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페인어에는 우리말과 정도는 다르지만 엄연히 존댓말 체계가 존재한다. 스페인식의 독특한 존대법을 스페인어로 ‘USTEDEO’라고 부르고 반말은 ‘TUTEO’라고 부른다. ‘TUTEO’란 용어는 ‘너’를 가리키는 스페인어 ‘Tú’에서 나온 것이고, ‘USTEDEO’는 존대 호칭인 ‘Usted(당신)’에서 파생된 것이다. ‘Usted’는 원래 주인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 ‘Vuestra Merced(your grace)’에서 변형된 것이다. 14세기경까지 스페인어에는 특별한 존칭이 없었지만 상하 관계를 한 호칭에 다 담는 것에 문제를 느낀 나머지 존칭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말이 14~16세기에 여러 변형을 거치며 결국 Usted(단수)/Ustedes(복수) 형태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Usted/Ustedes 존대법을 사용할 때 3인칭 동사로 마치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에둘러 표현한 것이 오늘날 스페인식 존대 호칭의 유래가 된 것이다.

스페인어권 국가들을 여행하는 중에 조금만 신경을 기울인다면 격식을 차려 대접해야 할 상대방이나 고객을 향한 모든 스페인어에서 Usted 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물론 스페인어를 안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하겠다.) 앞선 세비체리아 종업원의 경우에서와 같이 일단 고객에게는 Usted 화법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회사 사장, 교사, 의사, 경찰 등의 직종군 사람들에게도 Usted 용법의 사용이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고객이나 사장, 교사, 의사, 경찰 등은 상대방에게 Tuteo나 Usted 사용 여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가질 수 있다.

Usted와 Tuteo의 구별은 스페인어 국가 간에도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스페인어 종주국인 스페인에서는 Tuteo의 사용 비율이 훨씬 높고, 중남미에서는 상대적으로 Usted 사용 비율이 높다. 그렇지만 중남미라는 지역이 워낙 넓은 만큼 그 속에서도 국가 간의 차이가 꽤 있다. 어학원 강사의 이야기로는 콜롬비아가 Usted 사용 비율이 높은 국가 중 하나이고, 페루는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좌) 필자가 만든 혀가자미 세비체. (우) 전문 식당에서 나온 강가재 세비체.
(좌) 필자가 만든 혀가자미 세비체. (우) 전문 식당에서 나온 강가재 세비체.

1500년 된 유적지 지키는 털 없는 개

필자의 숙소 근처에는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무려 1500년 가까이 된 페루의 고대 유적지가 있다. 우아카 푸크야나(huaca pucllana)라고 불리는 이곳은 진흙 벽돌을 마치 책장에 책이 꽂혀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 피라미드형 건축물로 유명한 곳이다. 흔히 페루의 옛 역사라고 하면 잉카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세계 4대 문명의 발상 시기와 비슷한 때에 형성되었다는 카랄문명을 필두로 잉카 이전의 페루 문명 역시 정말 다양하다. 이 유적지도 그중 하나인 ‘리마 문명기’에 형성된 대표적인 유적지다.

그런데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정작 유적지보다 이곳에서 키우고 있는 유명한 페루의 털 없는 개 한 쌍이었다. 이름 자체가 아예 페루견(perro peruano)인 이 개는 2001년에 페루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종의 보호를 위해 페루 해안가에 위치한 모든 박물관과 유적지에서는 의무적으로 한 쌍을 키우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이 개는 페루 해안가에 발달한 잉카 이전의 치무, 모체 등 고대문명의 도기나 그림에 종종 등장한다. 그 정도로 페루와의 인연이 깊은 개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 시절 검은색에 털이 없는 모습이 사탄과 연관됐을 수 있다는 잘못된 편견으로 학대를 받았다. 그 이후에도 거리를 떠돌며 줄곧 천대를 받아 멸종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에 바로 이 우아카 푸크야나 유적지에서 개 한 쌍을 키우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인식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001년의 법적 보호 조치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페루에서는 현재 매년 6월 12일을 페루견의 날로 지정하고 이 개의 중요성을 기리고 있다.

페루견은 털이 없기 때문에 보온에 취약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체온이 항상 높게 유지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신 햇빛에는 약하기 때문에 키울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덩치가 큰 것이 순종이며 잡종은 몸집이 작다.

그런데 필자가 지난 3월 페루로 오기 전 잠시 멕시코시티에 들렀을 때 한 관광지 입구 기념품점에서 비슷한 개를 본 적이 있다. 당시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고대 아즈텍제국 이전부터 있었던 멕시코의 전통 개라고 하였다. 현재까지의 학술적 연구로는 오랜 옛날 멕시코에서 페루로 털 없는 이 개가 어떤 경로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한 모양이지만, 국민 자존심에 유난히 민감한 페루에서는 이런 이론을 공개적으로는 쉽게 제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원곤 서울대 흉부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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