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신지호의 正眼世論]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없어야 민주주의다
  • kakao 플러스친구facebooktwiteryoutube
  • 검색
  1. 오피니언
[2544호] 2019.02.11
관련 연재물

[신지호의 正眼世論]‘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없어야 민주주의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 지난 1월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드루킹 댓글 조작’ 관련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선(先) 산업화-후(後) 민주화’의 발전경로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는 ‘산업화 세력=보수, 민주화 세력=진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오랜 세월 통용되어왔다. 그런데 최근의 사태 발전은 이 같은 등식에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 민의를 왜곡하는 댓글 여론조작에 연루되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단죄한 판결에 불복하고 사법부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진보 정치학계의 대부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제자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최근 대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금 정부가 박근혜 정부보다 진보적이라는 건 맞다고 생각하지만, 더 민주적이냐고 물으면 그건 긍정적으로 답하는 게 힘들다.… 지난 정부에 이어 이 정부에서도 민주적인 정부 운영이 갖는 가치가 여전히 최소화돼 있다.”(중앙선데이 2019년 1월 19일자)
   
   진보적인데 민주적이지는 않다? 기존의 통념, 특히 진영논리로 보면 이 같은 진단은 분명 형용모순이다. 그러나 반(反)민주적 또는 비(非)민주적 진보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탈원전, 국민연금의 기업경영 개입 등 이 정부의 대표적 경제정책은 분명 진보적이다. 대북정책, 사회정책도 마찬가지다. 정책의 이념적 컬러로 따지면, 현 정부가 역대 정부 중 가장 왼쪽이다. 그러나 내각은 물론 국회와 법원까지 청와대 밑에 두려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지난 정부 못지않다. 세종이 성군이었어도 그 조선이 백성의 나라가 아닌 왕의 나라였듯이, 제왕적 대통령제는 민주적 국정운영의 최대 위협요인임에 틀림없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가 외부로부터 이식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한국적 산물이다. 많은 이들이 이승만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비유하곤 하는데,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1·2대 공히 선거인단 만장일치로 선출된 조지 워싱턴은 주변으로부터 ‘선출된 왕(elected king)’, 즉 종신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권유와 압력을 받았지만 그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는 두 번째 임기가 끝나기 6개월 전인 1796년 9월에 ‘고별 연설(Farewell Address)’을 통해 불출마 및 퇴임을 기정사실화했다. 워싱턴의 재선 후 퇴임은 이후 미국 역사에서 하나의 불문율로 자리 잡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예외적 4선 직후 수정헌법으로 명문화되었다.
   
   반면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 3·15부정선거 등을 통해 종신집권을 기도하였으나,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장기집권 저지와 정권교체는 민주화의 요체가 되었고, 1987년에 탄생한 현행 헌법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이후 세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외형적 민주화는 달성되었다.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의 지속적 출현으로 민주주의의 내실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이다.
   
   현 정부의 부실한 민주주의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내놓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다. “시민의 이름으로, 이번 김경수 지사 재판에 관련된 법원 판사 전원의 사퇴를 명령합니다”라는 청원은 조건을 충족하여 현재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청와대가 무소불위라지만, 삼권분립 국가에서 이런 게 청와대 청원이 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는 허용하지 않는다. 국회에도 청원제도가 있으나, 재판에 간섭하는 것, 국가원수를 모독하는 것 등은 아예 수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청와대 게시판에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황당한 청원이 정치개혁(?)이라는 카테고리까지 부여받은 채 버젓이 올라와 있다. 앞의 고별사에서 워싱턴은 “자유국가에서는 통치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한 부서의 권력행사가 다른 부서를 잠식하지 않도록 하면서 허용된 헌법상의 영역 내에 국한시키도록 조심하는 사고의 습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없어야 민주주의다.
   
   열성 지지자들의 경쟁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성 문자 폭탄을 경선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으로 비유한 문재인 대통령의 사고 역시 심각한 문제를 노정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연방 대법원의 판사였던 올리버 웬델 홈스는 “자유로운 사고의 원칙은 우리에게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생각에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스튜어트 밀 역시 ‘자유론’에서 “대중은 구성원의 일부를 억압할 욕망을 가질 수 있다”며, 다수의 횡포는 권력의 남용 못지않게 사회가 경계해야 할 악덕 중의 하나라고 했다. 다수결의 원리가 소수를 억압하는 ‘폭민(暴民)’의 출현으로 변질되면, 민주주의는 실패하고 패권주의가 횡행한다.
   
   법치주의에 대한 현 집권세력의 인식 역시 위험 수위다. 법치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더불어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위임받은 권한은 법에 의해 행사되어야 한다. 공화주의자 장 자크 루소는 복종(服從)과 예종(隸從)을 구분하여 “자유로운 공민은 복종하지만 예종하지 않으며, 지도자는 두지만 주인은 두지 않는다. 자유로운 공민은 오직 법에만 복종하며 타인에게 예종하도록 강제될 수 없는데, 이것은 법의 힘 때문이다”라고 했다. 루소에게 자유란 예종이 없는 상태이며,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바로 그런 상태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것이다.
   
   공화국은 흔히 왕국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이지만, 그 본질은 권력자의 자의적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 즉 법치국가에 있다. 고로 권력의 원천인 국민 다수의 의사가 결집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고는 민주공화국에 대한 반쪽짜리 외눈박이 인식이다. 민주는 공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보완되어야 한다. 공화와 함께 가지 못하는 민주는 궤도 이탈로 폭민과 폭정을 낳는다.
   
   공화와 법치에 대한 취약한 인식은 비단 진보만의 문제는 아니다. 통진당 해산 결정에 열광하다가 박근혜 파면 결정에는 헌법재판소 해산을 외친 오른쪽 일부는 박근혜 징역8년 선고에 박수 치다가 김경수 징역2년 선고에는 사법적폐 세력의 조직적 저항이라고 발끈한 일부 진보와 난형난제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 공히 공화가 결핍되어 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나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성취에 대한 자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성찰을 해야 한다. 내수보다 수출,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서비스업보다 제조업을 우선한 산업화 세력의 불균형 성장전략이 낙수효과의 소멸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듯이, 민주화 세력의 진영논리에 입각한 반독재투쟁 전략 역시 민주주의 심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민주화는 완성되었으니 경제민주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에 빠져들고 있다. 진보적이나 민주적이지 않은 정부가 지금 우리 눈앞에 존재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